조선일보, 그 속을 어찌 모르리

해외서평 <페미니스트 팬터지> 통해 페미니즘 비방

김윤은미 | 기사입력 2003/07/21 [23:35]

조선일보, 그 속을 어찌 모르리

해외서평 <페미니스트 팬터지> 통해 페미니즘 비방

김윤은미 | 입력 : 2003/07/21 [23:35]
언론이 겉으론 '중립'을 표방하면서 그 매체가 지향하는 이데올로기를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쉬운 방법 중 하나가, 서평이나 인터뷰를 통해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간접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진보가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강박적인 주장을 펼치는 조선일보도 이런 방법을 잘 쓴다. 7월 18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해외서평 <페미니스트 팬터지>는 조선일보가 페미니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싶어 하는지 잘 보여준다.

<페미니스트 팬터지>의 서평을 쓴 이상돈 중앙대 교수는 그간 조선일보 '해외서평'을 통해 진보 세력이 사회를 파탄 낸다는 논지를 펴 온 필자다. 그는 시민사회단체·노조와 '개혁적' 정치인, 진보정당을 공격하는 보수적 논조의 해외서적을 꾸준히 소개해왔다. 예를 들면 '무능한 교사'를 보호하는 교원노조는 "미국의 교육을 파괴한 장본인"이고(2003. 7. 4.) 미국 언론에 소수자·여성이 기자로 많이 진출해있기 때문에 "동성애자가 박해를 당한 사건은 크게 보도되지만 동성애자가 남자아이를 성추행하고 잔인하게 죽인 사건은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았다."(2002. 12. 20.)는 식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30년 동안 미국 여성운동계과 싸웠다는 필리스 쉴라플라이라는 여성의 저서 <페미니스트 팬터지>를 골랐고, 역시 조선일보는 '해외서평'으로 이를 실었다. 한국으로 치자면, 몇 년 새 우후죽순 생겨난 '남성권익보호사이트'의 대표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이상돈 교수는 그녀의 입을 빌려 페미니즘 역시 사회를 병들게 하는 요인이라는 일관된 논조를 유지한다.

"저자는 페미니즘의 폐해를 조목조목 지적한다. 아내와 어머니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여성에게 열등감을 심어 주어 멀쩡한 가정을 파탄에 빠뜨렸고, 탁아소와 보모의 손에서 자란 아이들은 질병과 심리적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남녀에게 본질적 차이가 있음을 무시하고 결과적 동등을 추구해서 남녀에게 모두 나쁜 결과를 초래했다. 여자대학에 동성애 문화를 퍼뜨린 것도, 낙태를 조장해서 생명경시 풍조를 만연시킨 것도,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감 있는 남성상(像)이 사라진 것도, 성공한 40-50대 남성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젊은 여인과 재혼하는 풍조가 생긴 것도 모두 페미니즘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2003.7.18 조선일보 [해외서평] `페미니스트 팬터지` ··· 페미니즘의 허구 고발)

수백 년 간 여성들은 아내와 어머니라는 역할이 여성에게 억압적인 현실을 비판하고, 낙태 결정권을 가지지 못해 자신의 삶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괴로움을 증언해왔다. '남성성과 여성성은 사회적으로 만들어진다'는 주장이 교과서에도 버젓이 실릴 만큼 상식이 된 마당에, 남녀의 본질적인 차이 운운하는 해외서적 단 한 권을 방패막이로 페미니즘을 비판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페미니즘이 허구라는 <페미니스트 팬터지>를 이 교수가 지지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가 슬쩍 보여주는 근거는 저자가 '모범적인' 여자라는 것. 그녀는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워싱턴 대학을 다녀, 학부과정을 3년 만에 전과목 A를 받고 졸업했으며 장학생으로 하버드 대학원에 진학하여 정치학 석사학위를 8개월만에 딴 사람이다. 또한 남편과 해로하고 여섯 자녀를 잘 기른 훌륭한 어머니이기도 하다.

서평을 쓰면서 구구절절 저자가 얼마나 '잘 난' 여성인지 소개하는 모양새는, 그런 '모범적인' 삶을 살아온 여자가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데엔 다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책에 대한 미국 여성계의 반응과 사회적 파장이 어떤지에 대해선 일말의 관심도 없다.(열띤 반론이나 비판이 제기됐을 수도 있고, 반대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종류의 책일 수도 있다.)

조선일보와 같은 큰 매체에서 '해외서평'이라고 소개하면, 별 근거 없어도 '영향력 있는 책'으로 보이는 법.(한국에서 발간된 것도 아닌 이 책을 손에 골라 쥐느라 수고가 많았다.) <페미니스트 팬터지> 서평은 '미국에서 페미니즘이 사회를 위험하게 했다'는 주장을 들먹이며 독자들에게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을 심화시킨다. 참으로 조선일보스러운 서평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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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늬만진보? 2003/07/26 [17:28] 수정 | 삭제
  • 조선일보가 페미니즘을 비방한다? 그럼 한겨레는 페미니즘을 옹호하나요? 네, 표면적으로는 옹호하기는 옹호하죠. 가끔씩(?) 결정적인 순간에 반여성적 태도를 보여서 문제죠. 물론 한겨레가 페미니즘에 대해 좀더 호의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페미니즘 문제에 있어서 조선이나 한겨레가 그렇게 큰 논조의 차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 저도 안티조선운동을 열심히 했지만 소위 진보언론들이 권력을 장악한다음서부터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서 조중동이나 진보(?)언론이나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오마이뉴스만 해도 사실에 어긋나는 보도를 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죠. 엠비씨의 경우는 크리스천의 촛불시위를 마치 반미 촛불시위인양 왜곡해 보낸 적이 있죠.

    말콤X가 이런 말을 했다죠. "나는 흑인편인양 생색내는 북부 백인보다 차라리 흑인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남부 백인이 좋다구요." 저는 그의 말을 오랬동안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정확하게 이해합니다.
  • 캥거루 2003/07/24 [01:07] 수정 | 삭제
  • 쿠! 30년동안 여성운동계와 싸워온 여성이라.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왜 싸웠는지 참 궁금하기도 하구.
    거시기한게. 블랙코미디 같은데.
    그걸 사뭇 진지하게 신문이랍시고
    서평에 실었다니
    정말. 웃을 수 밖에. 쿠!
  • ㅂㅂㅂ 2003/07/22 [21:04] 수정 | 삭제
  • 그 필자가 진보진영에 몸을 담았다가
    그 병폐를 현명하게, 그리고 단단히 깨달은 다음에 나와서 하는 비판이라는 것이죠
    한총련을 탈퇴한 사람을 인용하여 좌익의 폐쇄적이고 권위적인 행태를 말한다거나
    탈북이주민을 이용하여 공산정권이 얼마나 인권을 유린하며 자유민주주의가 위대한지를 말한다거나..

    그렇죠..
  • Yong2 2003/07/22 [13:35] 수정 | 삭제
  • 페미니즘이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얘길 외국책을 빌어서 하는 군요.

    조선일보 안 본 지 꽤 됐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신문이죠.

    페미니즘이 허구가 아니라 저런 기사가 허구라는 걸 독자들이 알면 좋겠지만요.
  • 후아유 2003/07/22 [09:54] 수정 | 삭제
  • 노골적으로 반여성주의를 드러내는 군요.
    재수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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