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다는 장년층 레즈비언들의 삶과 진솔한 목소리를 담기 위해 ‘그루터기’ 회원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그루터기’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35세 이상 여성이반모임입니다. –편집자 주]
생활의 편린을 쓰는 것쯤 아무것도 아니라고 큰소리를 치고 났더니 일은 왜 이렇게 쏟아지며, 쓸만한 것은 왜 이렇게 생각이 안 난단 말인가? 내일 새벽에 엄마, 아빠, 동생과 함께 2박3일 일정으로 설악산에 가기로 했다. 요즘 가장 유행하는 직업, 백조임에도 불구하고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어째 이리 많은가! 한탄하고 있다. 일다에 실을 원고를 쓰는 일도 그 중 하나다. 눈물 줄줄. 왜 쓴다 했던고? 그야 뻔하다. 난 쓰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쓰는 일이야말로 내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이 직업으로 먹고 살아본 적은 없지만. 현재 나의 계획은 쓰는 일로 먹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 지면을 주겠다는데 어찌 마다하겠는가. 그렇다. 나는 내일 ‘가족’과 함께 설악산에 간다. 백담사로 들어가서 오세암, 봉정암, 소청, 중청, 대청, 천불동 계곡을 걸어 설악동으로 하산할 것이다. 오십대 엄마와 육십대 아빠를 위해서 1박2일이면 될 일정을 2박3일로 늘려서 간다. 어지간히 헤매지 않는 한 우리 가족은 하루에 두세 시간 정도는 숙소에서 지루하게 때워야 할지 모른다. 이 가족에 나의 애인, 크리스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처음부터 크리스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계획을 세웠다. 아니, 나는 사실 조금은 염두에 두었다. 크리스가 1박2일 워크숍을 가는 날짜와 맞추려고 했다. 그래서 크리스도 내일 워크숍에 들어간다. 그러니까 휴가를 같이 간다는 계획에는, 크리스는 전혀 포함되지 않았다. 나는 요즘 가끔 한번씩 크리스 네 놀러 간다. 크리스 어머니께 나는 성경공부 모임에서 만난 친구이자 크리스의 직장에서 자원활동을 할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이다. 내가 크리스의 애인이라는 사실만 빼고 나머지는 사실대로 알려드렸다. 듣기 대략 난감한 칭찬을 크리스가 미리 열심히 해둔 덕에, 애인의 연로하신 어머니는 나를 좋게 봐주신다. 우리는 서로 집이 멀어서 크리스가 볼 일을 보고 우리 집에 묵고 가거나, 내가 볼 일을 보고 크리스의 집에 묵을 때도 다른 핑계를 댈 필요가 없다.
내 동생은 나보다 한 살 어려서 서른 다섯인데, 아직 혼인을 안 했다. 언제 할지도 모르겠다. 남자친구도 없다. 올해 누군가 동생에게 소개팅을 해주겠다고 했을 때,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혼인을 하고 우리 부모에게도 사위라는 것이 생겨서 명절이나 제사 때 부모님 집에서 어정거리고 다니는 꼴을 본다면, 내 머리에서 김이 나겠구나…. 내 인생에도 동반자가 있는데, 왜 너만 이 집에 데리고 와 어정거리는 꼴을 보여준단 말이냐! 대상도 없는 질투심이 불타올랐다. 우리 자매에게, 또는 나에게 동생을 향한 질투심은 때로 놀라운 추진력을 준다. 덕분에 나는 중학생이라는 늦은 나이에 젓가락질 제대로 하는 법도 배우고 자전거 타기도 배웠다. 으음, 이번에도? 질투심에 불타올라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하게 될까?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한다는 생각은 별로 해본 적이 없다. 우리 엄마는 죽기살기로 나올지 모른다. 너 죽고 나 죽자! 또는 믿지 않고 무시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주 적극적으로 그리고 개념 없이 ‘그래, 한 번 잘 해 봐라’ 했다가, 어느 날 교회 가서 이상한 설교를 듣고는 때늦게 말릴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 됐든 엄마는 별로 걱정되지 않는다. 아빠는 좀 걱정된다. <네 멋대로 해라>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제대로 본 회가 거의 없는데, 하필 제대로 본 회에서 아들 복수가 암 진단을 받았고 별로 살 가망이 없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 신구가 자살하고 만다. 아빠에게 커밍아웃하려는 생각을 하면 꼭 드라마의 그 부분이 떠오른다. 심약하고 소심하고 알코올중독인 아빠가 정말로 술독에 빠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근데 어쩌면 다 기우일지도 모른다. 연세가 들면서 나름대로 이기적인 된 아빠가 (이를 테면 아빠가 먹으려고 했던 과일을 엄마나 동생이 다 먹어 치우면 화를 낸다. 이제 엄마와 동생은 ‘아빠 과일’에는 손을 대지 않는다) 절망과 좌절을 딛고, “그래도 나는 살아야겠다!”고 천명할 지도 모르는 일이다. 정말로 모르는 일이다. 아아, 저 애인을 어떻게 부모에게 소개하고, 얼굴을 보여주고, 한 번 두 번 세 번 자꾸 보여주고, 나중에는 명절마다 보여주고, 주말에도 같이 부모님 댁에 놀러 가고, 그러다가 결국 휴가도 같이 가고, 또는 부모님과 함께 가는 휴가에서 내가 빠지고… 뭐 그런 역사가 일어나야 할 텐데. 부모님에게 커밍아웃하는 일은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어제까지 모르던 놈이 사위입네 하고 당당하게 들락거릴 꼴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머리에서 김이 오른다. 단지 질투심 때문에라도 엄마, 아빠와 크리스를 아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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