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폭력, 성착취로부터 벗어나기 힘든 이유

폭력 안에서 살기를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최현정 | 기사입력 2008/10/31 [12:31]

가정폭력, 성착취로부터 벗어나기 힘든 이유

폭력 안에서 살기를 바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최현정 | 입력 : 2008/10/31 [12:31]
우리는 각자 자기만의 평범하고 안락한 삶을 꿈꿉니다. 매일 그러한 삶을 예상하면서 내일을 맞이 합니다. 만약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거나, 예상치 못할 일이 닥쳐올지 모른다는 상태로 살게 된다면 몹시도 불안할 것입니다.
 
별 탈없이 일생을 마무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꼭 우여곡절이 깃들게 마련인가 봅니다. 물론 인생의 굴곡이 너무 크고 깊지만은 않다면 하나의 굴곡에 교훈과 힘을 얻어 어쩌면 더 풍요롭고 단단한 삶을 살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나친 굴곡은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기 때문에 모두 피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지요.
 
그런데 만약 인생에서 큰 굴곡을 피해갈 수 없었던 누군가가 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대해 점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럴 만한 사람이니 그런 일을 겪은 것?
 
▲ 폭력과 착취가 빈번한 환경이 사람의 마음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해야 한다.  © 일러스트-정은
많은 경우에 나 자신만은 그런 힘겨움을 피해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래서 암묵적으로 피해간 사람과 피해가지 못한 사람을 가르게 되기도 합니다.

 
‘그는 그럴만한 사람이므로 그런 일이 겪었을 것이다’라고 갈라놓는 것은 암묵적으로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일을 겪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자기 삶에 대한 보호와 방어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상대가 ‘의지가 부족해서’이거나 ‘그런 삶을 원해서 선택했다’라고 갈라놓는 것은, ‘나라면 그런 상황에서 달리 대응하여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의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실제로 우리 삶을 영위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큰 일이 닥쳤을 때 내가 이를 잘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 ‘나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다’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불안감 없이 내일을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삶을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 “겪어보지 않은 당신은 모른다” 라고 단절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에 대해서 곱씹어 볼 필요도 있습니다.
 
타인의 삶에 대해 판단할 때 그가 의지가 부족해서, 혹은 그렇게 살기를 원해서 그리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굴곡이 너무나 크고 깊을 때 인간이 마음이 어떻게 파괴되는지를 간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경험이나 상황 자체가 사람 심리에 가하는 영향력에 대해 고려하지 않고 사람의 의지와 판단에 모든 원인을 전가시키는 것인데, 몹시도 무책임한 생각입니다.
 
특히 폭력과 착취가 빈번한 환경이 마음에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하지 않고 ‘그 사람은 그렇게 살고 싶어하니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폭력과 착취를 은폐하고 보지 않으려 하면서 자기 삶에 안정적인 울타리를 치려는 ‘방관’과도 같다는 점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평화로운 상황에서 사람은 충분히 힘을 발휘하여 대처할 수 있지만, 폭력과 착취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사람이 자기 힘을 발휘하여 이로부터 벗어나기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폭력과 착취는 사람의 힘, 자율성과 정체성을 앗아가고 인간다운 삶에 대한 의지를 파멸하는데 목적을 두고 행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의도적인 목적에 굴복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힘을 빼앗긴 사람들은 그 심리적 후유증, 가해자와 얽힌 관계의 지독함, 그리고 생계수단이나 사회적 지지를 박탈당함으로 인해, 폭력적인 환경으로부터 탈피하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향력을 충분히 파악해야 합니다. 피해자에게 원인을 전가한다거나, 그가 피해상황을 원한다고 하는 끔찍한 피해자 비난에 빠져들지 못하도록 다시 생각하고 고쳐 말해야 합니다.
 
매맞는 아내가 남편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못할 때
 
가정폭력과 성 착취의 체계는 피해자 비난과 폭력의 은폐가 일어나는 아주 단적인 상황입니다. 가정폭력을 겪는 여성이 가해자와 관계를 단절하지 못하거나, 성 착취 체계에 놓인 여성이 이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때, 많은 사람들은 피해자들이 그러한 환경을 ‘원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계속 그렇게 살도록 그들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허나 이는 자유를 중시하는 발언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을 폭력에 방치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킬 기회를 앗아가는, 인간으로서 평온한 삶을 꾸릴 권리를 누릴 진정한 자유와 존엄성을 지키는데 반하는 말이며, 진실을 외면하는 말입니다.
 
가정폭력 피해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 반복되는 폭력을 견뎌야 합니다. 성매매 피해자는 가장 은폐된 장소에서 낯선 사람이 휘두르는 폭력에 대비해야 합니다. 제가 만난 한 성매매 피해자는 “맞는 것쯤은 늘 일어나기 때문에 큰일도 아니다”고 말했습니다. 폭력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야 할 만큼 폭력이 잦다는 뜻입니다.
 
또한 폭력에 노출된 여성에게는 몸이 도구처럼 취급되는 일이 부지기수입니다. 가정폭력 피해자나 성매매 피해자나 원치 않는 상황에서 성적인 행동에 굴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폭력에 의한 굴복은 대단히 지독하고 지속적인 심리적 후유증을 남깁니다.
 
인간으로서 폭력에 굴복한 경험은 엄청난 무력감과 수치심을 남깁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통스러운 감정이 지속되면,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를 억누르기 위해서 애써야만 합니다. 때론 술에 취하고 약물에 취해서 고통을 견뎌보고자 하고, 보다 강하고 자극적인 감각을 주는 행동을 하면서 고통을 잊어버리고자 합니다.
 
심각한 경우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심리가 작동하면서 내면의 모든 욕구가 감정이 사라져버리는 결과가 초래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고 사람으로서 자율성과 정체성이 파괴되는 극단적인 고통의 순간입니다. 이 고통이 더욱 치명적인 것은, 자율성과 정체성이 사라질 때 무엇이 내게 해롭고 무엇이 안전한지를 판단하는 역량이 파괴되면서 피해가 지속될 위험이 커지는데 있습니다.
 
폭력상황을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는 이유
 
▲  가정폭력 실태를 알리는 거리 캠페인  © 서울여성의전화
가해자와 얽힌 지독한 관계도 폭력으로부터 빠져 나오기 어렵게 만드는 큰 요인입니다. 가정폭력 내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그리고 성 착취 산업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는 매우 유사합니다. 가정폭력 내에서 폭력이 발생할 때, 피해자는 최대한 폭력을 줄이기 위해 가해자를 달래고 통제하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애초에 피해자가 폭력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니므로, 피해자가 폭력을 좌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는 스스로를 탓하게 되고, 다음 번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가해자에게 보다 더 복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폭력과 폭력이 발생하는 중간의 평온한 시기에, 가해자는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인양 피해자에게 헌신과 사랑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폭풍 전야의 평화로운 시점은 피해자가 폭력상황을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합니다.
 
성 착취 체계에서도 업주를 부를 때 가족을 부르는 호칭이 사용되는 등, 일종의 ‘가족관계’가 형성됩니다. 업주는 가혹한 상황에서 피해자가 고통을 잊을 수 있도록 보상물을 제공하면서 피해자의 마음을 삽니다. 그래서 가족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십대여성이 자신에게 잘 곳과 음식을 제공해주며 가족에게서 얻지 못한 즐거움과 애정을 주는 듯한 업주에게 심적으로 의존하게 되는 일은 다반사입니다.
 
사람에게 고통과 평온을 마음대로 선사하고 심리적 평온 상태를 좌우하는 누군가가 있을 때, 사람은 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은 전능한 신이 되고, 나는 그의 뜻에 따르고 그가 끼치는 해로움은 부정하며, 내게 전달되는 해악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해야 내가 사는 삶을 받아들일 수 있으며 내가 겪는 고통을 설명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가해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굳어지면 피해로부터 벗어나기 힘들어집니다.
 
또한 가정폭력 가해자나 성 착취 체계의 가해자들은 여성이 독립할 수 있는 물질적 자원을 획득할 수단을 봉쇄하고, 주변 사람들의 지지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자원을 차단시킵니다. 따라서 빈곤한 여성은 다른 생존 방략이 부재하므로 폭력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며, 탈출해 머무르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에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게다가 반복적으로 폭력을 겪었다면 사람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선뜻 다른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거나 신뢰관계를 허용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피해자가 자율성 회복할 권리, 모든 이가 책임감 가져야
 
만약 우리가 큰 굴곡 없이 살 수 있는 삶의 기회를 허락 받았다면, 험난한 삶을 대신 살아온 누군가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진정으로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욕구와 감정에 공감하며, 그를 갈라내지 않고, 그에게도 나처럼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실현시킬 힘이 있다고 진정 믿는 행위입니다.
 
또한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행위입니다. 마음과 몸을 쉬는 것이 허락되고, 진정 믿을 만한 누군가가 있어야만 사람은 진짜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폭력을 겪어야 했을 때, 그는 빼앗긴 자율성과 정체성을 회복 받을 정당한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권리를 보장해줄 책임감은 다른 모든 사람이 지녀야 합니다. 인간에게 평화로운 환경을 제공할 수 있는 능력은 또 오직 인간에게만 있기 때문입니다.
 
폭력 안에서 살기를 아무도 바라지 않습니다. 굴복 당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맞아도 싼 사람도 없고, 사랑과 애정이 기반하지 않는 성 행동에 응하는 데서 진실로 쾌락을 느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따로 있다고 누가 말한다면, 그에게 어떤 의도가 있는지 우리는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 개굴 2008/11/12 [13:21] 수정 | 삭제
  • 열혈 독자에요. 앞으로도 좋은 글 기대할게요~
  • 끄덕끄덕 2008/11/06 [11:57] 수정 | 삭제
  • 폭력의 피해자를 바라보는 제삼자들의 심리에 대해 잘 이야기해주셨어요. 자기를 방어하고자 나와 다른 남을 가르고 비난하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모습이 없다고 어떻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어요. 성찰하며 살아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