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연극은 이제 시작이다

여성교회 무대에 어수룩한 이인극을 올리며

삼순이 | 기사입력 2008/11/10 [10:09]

우리의 연극은 이제 시작이다

여성교회 무대에 어수룩한 이인극을 올리며

삼순이 | 입력 : 2008/11/10 [10:09]
[일다는 장년층 레즈비언들의 삶과 진솔한 목소리를 담기 위해 ‘그루터기’ 회원들의 글을 총 6회에 걸쳐 연재하였습니다. ‘그루터기’는 공동체를 지향하는 35세 이상 여성이반모임입니다. –편집자 주]

지난 주에는 여성교회 19주년을 맞아 축하예배가 있었다. 매년 맞이하는 생일 예배에는 연극이 상연되었는데, 올해 연극의 주제는 “여성교회의 꿈”이었다. 그 중에서도 크리스와 나는 성적소수자의 이야기를 이인극으로 올렸다. 대사도 다 외우지 못한 짧고 어수룩한 연극이었지만, 크리스와 나의 경험이 들어있는 연극이었다. 대본도 함께 썼다.
 
여성교회의 20대들이 교회에 품은 꿈을 펼쳐 보인 연극이 있었고, 남양주 이주노동자여성센터에서 온 이주노동자/여성은 “이주여성/노동자와 효녀심청의 이야기”를 무대에 올렸다.

 
“결혼여성이민자들의 이야기”는 계획에 있었지만 아쉽게도 무대에 오르지 못했고, 대신 결혼여성이민자들의 삶에 대한 짧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씨받이”라는 말과 “돈을 주고 사왔다”는 말이 아프게 들렸다. 내가 이고 있는 하늘 아래.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했던가. 연극은 어떤 진지한 논문보다도, 연구결과보다도 마음을 움직인다. 잘 모르던 이야기,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가깝게 다가온다. 말 그대로 눈 앞에 펼쳐진다. 관객이 앉아 있는 것과 같은 높이의 무대에 서서, 나는 미약한 흔들림을 느꼈다. 떨림을 느꼈다.
 
생전 처음 레즈비언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잘 드러나지 않지만 공존하고 있는 다른 세상을 봤기를, 견고한 이 세상에 난 작은 틈을 봤기를.
 
그 사이에 나는 먼저 자신을 느낀다. 남들의 시선이 닿기 전, 내가 먼저 내 모습을 보고 목소리를 듣는다. 무대에 서고 목소리를 높이고 즐거워하는 내 모습을 본다. 깔아 놓은 멍석 위에서 춤을 추는 나를 본다. 이 작은 무대의 작은 파장을 더 많은 곳으로 가져갈 수 있다면, 내가 이고 있는 하늘 아래, 혼자서 꿈을 꾼다.
 
꿈의 틈새를 비집고 크리스의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 이 연극을 좀 더 잘 만들어서 다른 곳에서도 하자!”
“연습을 훨씬 더 열심히 하자.”
“대본도 다시 쓰자.”
“좀더 길게 늘리자.”
“우리가 가는 곳에 따라서 대본의 내용을 조금씩 고쳐야 할 거야.”

잘못 들으면 달달 볶는 것처럼 들리는 크리스의 의욕에 찬 목소리가 오늘은 아주 달갑다. 고개를 끄덕인다.

“응, 우리 꼭 해보자.”

말 나온 김에, 우리가 했던 연극의 대본 전문을 공개한다. (여러분의 사연도 들려주시길~!)

제목: “환타스틱” 동성애


장면 #1.

여자1(크리스): 아, 우리 교회 몇 달 다녔던 그 사람들이 너랑 친구였니? 걔네들 너무 예쁘잖아, 왜에. 둘이 손 잡고 다니는데 자연스럽고도 잘 어울리더라. 맘에 안 맞는 남자랑 사느니 그렇게 사는 게 낫지. 안 그래? 

여자2(삼순): 여자라고 맘에 다 맞는 것도 아냐. 오죽하면 내 엑스걸프렌드는 이런 말까지 했어. “웬만한 남자 비위 맞추는 것보다 내 비위 맞추는 게 더 어려워. 그러니까 너는 이담에 남자 만나도 잘 할 수 있을 거야” 라고.

여자1: 그래서 너 레즈비언이라고 고백하는 거니, 지금?

여자2: 말하자면 그래. 넌 동성애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충격적인 고백인가?

여자1:  난 네가 동성애자인 건 상관없는데,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나 윤리적인 면으로는 맞지 않는 거 같아.

여자2: 너의 종교나 윤리하고 내가 동성애자인 게 무슨 상관이야?

여자1: 글쎄. 교회에서나 우리나라 사회에서 동성애는 사실 드러나 있지도 않을뿐더러 금기시돼 있잖아? 그런 걸로 볼 때 난 자신이 없어. 네가 내 친구니까 너의 동성애는 이해하지만 또 다른 사람이 하면 어쩐지 좀 “으으으으”! (자기 팔을 닥닥 긁는 시늉, 닭살 돋는, 소름 끼치는 느낌)

여자2: 개인의 종교나 윤리가 다른 개인의 존재 방식을 함부로 규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아무런 차별 없이 포용하고, 계급으로나 성으로나 인종으로 편가르고 배제하지 않으시잖아?

여자1: 하지만 어떤 기독교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어. “사랑만 하십시오. 동성애자 여러분, 정말 어쩔 수 없다면 사랑은 해도 됩니다. 하지만 섹스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끼고 교회의 순결을 보호하는 마음으로 섹스는 하지 마십시오. 사랑한다면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참을 수 없거든 교회에서는 나가 주십시오” 라고.

여자2: 내가 아는 목사님은 그 말에 이렇게 대답했지. “교수님의 태도는 성적소수자들을 향한 폭력이며 억압입니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훼손과 폄하를 하지 마십시오. 성적소수자들에게 악의는 없지만 혐오감을 느끼거나, 성적소수자들이 보이는 데도 보이지 않는 척 눈을 돌려버리거나, 성적소수자들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는 소극적인 부정의 심리도 윤리적으로는 ‘악(惡)’입니다! 악!”

장면 #2.

아는 동생(크리스): 저는 십 수년 전에 동생에게 커밍아웃했어요. 작년에는 동생이랑 같이 미국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봤고요.

아는 언니(삼순): 그 동성연애도 하고 남자들끼리 섹스하는 영화? 나 같은 이성애자한테는 그런 장면이 동성애자들에게 더 편견을 갖게 해. 그건 좀 가슴 아픈 일이야. <왕의 남자>에서는 그렇지 않았거든?

아는 동생: 그럼 <왕의 남자>에서처럼 평생 쳐다보기만 해야 한다는 거에요? 동성애자는 낭만적인 사랑만 하라는 법 있나요? 그건 동성 섹스에 대한 편견이에요. 또 동성연애자가 아니라 동성애자라고 부르세요. 이성연애자라고 안 하고 이성애자라고 하는 것처럼. 동성애자라고 평생 연애만 하고 사는 건 아니거든요.

아는 언니: 알았어. 그런데 레즈비언들은 기본적으로 남자에 대한 거부감이 너무 많은 거 같아. 나는 네가 다른 동성연애자들처럼 그러지 않으면 좋겠어. 남자들하고도 만나고 어울리고 말이지. 인류의 절반이 남잔데 너무 외롭지 않니?

아는 동생: 흐흠… 남자에 대한 거부감이라… 사실 “남자가 너무 좋아!”, 이러긴 어렵겠지요. 그나저나 언니, 동성연애자가 아니라 동성애자라니까요! 그리고 저 외롭지 않아요. 제가 속해 있는 성적소수자 커뮤니티와 교회를 통해 살아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불끈 생겨요. 먹구름에 가려져 있던 무지개가 이제는 선명하게 보인다고나 할까? 세상에 내 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아는 언니: 네가 교회를 다닌다고? 어떻게? 교회에서 알아?

아는 동생: 네, 물론 알아요. 그래서 ‘여성교회’와의 인연이 더욱 소중해요. 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감사할 일도 많고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 옆에 함께 있고, 내가 찾고 준비하던 일을 할 수 있어서 더 흥분되고요. 그리고 멋진 커뮤니티 친구들과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어주면서 이 길을 걸어나갈 거예요. <끝>

지금 대본을 다시 정리해 보니 꽤나 노골적인데다가 예술적으로 덜 떨어진 내용이다. 하지만 크리스와 삼순이의 의기는 꺾이지 않는다. 이런 면에서 낙관적인 커플이라고나 할까! 내년에는 좀더 준비하고 연습해서 새로운 내용으로 올리자고,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둘이서 먼저 손 맞잡고 약속한다.

제목이 “환타스틱” 동성애인 이유는, 남들이 보는 것처럼 “환타스틱, 로맨틱”한 것이 동성애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와 이성애주의가 촘촘하게 지배하는 세상에 작은 틈을 내는 우리들의 일상이 나름 “환타스틱”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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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현숙 2008/11/17 [13:33] 수정 | 삭제
  • 그런 일이 있었군요~ 대본도 재미나고 좋아요~ 꽤나 노골적이어서 좋은데요^^ 두 분 화이팅~!!!^^
  • 삼순 2008/11/11 [19:31] 수정 | 삭제
  • 담에는 로마님도 출연을 고려해 보시지요 ㅎㅎㅎㅎ
  • 로마 2008/11/11 [14:52] 수정 | 삭제
  • 크리스님의 의욕에 찬 목소리... 듣지 않아서 알 수 있을 듯 싶어요.ㅋ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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