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았던 ‘검은 소리’를 찾아서…

페미니스트의 음악 블로그⑦ 디 디 브릿지워터

성지혜 | 기사입력 2008/12/11 [02:10]

들리지 않았던 ‘검은 소리’를 찾아서…

페미니스트의 음악 블로그⑦ 디 디 브릿지워터

성지혜 | 입력 : 2008/12/11 [02:10]
▲ 디 디 브릿지워터(Dee Dee Bridgewater)
이 세기의 대표적인 코드를 ‘다원성’으로 정할 수 있다면, ‘낯선 것’을 향한 열정은 이 시대를 가로지르는 욕망이라고 생각해요. 가히 ‘마인드 트렌드’라고 할만하게 인정받지 못했던 것, 무시되었던 것에 대한 양적.질적 조명이 엄청나게 일어나는 시대이긴 하니까요. 더불어 국경, 인종, 성별, 계급 등의 기존 조건들을 초월하려는 야심들도 대단하지요.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집단 간의 치열한 다툼과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천지지만, 일상에서 사람들은 머리 아프게 이것저것 따지기보다는 유행처럼 채식을 하고, 알려지지 않은 부족(혹은 민족)문화에 관심을 갖고, 성별 일반성의 룰을 깨는 패션에 즐거워합니다.
 
어떤 면에서, 이 시대의 다양한 문화를 향한 갈망은 문명의 팽창시점을 상기하게 하는 것 같아요. 또는 보다 넓은 세상을 보며 끊임없이 인간한계에 도전하려 하는, 네오-콜럼버스적인 세상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현실적이고 역사적으로 일구어져 온 기존의 땅(영역)을 자신이 이름 붙여줘야 할 ‘새로운’ 대상으로 여기는 콜럼버스주의적인 착오처럼, 웃지 못할 일들도 많을 겁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이야기해볼 생각이고요. 오늘은 현시대의 반인종주의적 관심사에 반응하는, 한 흑인여성 뮤지션의 ‘뿌리 찾기’ 여행에 관한 것입니다.
 
‘낯섦’의 미학 앞에서
 
▲ 2005년 발매한 <J'ai Deux Amours> 앨범재킷
사실 ‘이국정취’에 대한 관심은 인류의 문화사에서 늘 존재해왔었던 주제 같아요. 사적 영역에서만 봐도 우리는 늘 ‘나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갖고 있으니까요. 이것을 긍정적으로 평한다면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을 욕구하는 인간의 고유한 특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문화적인 호기심에 의한 ‘퓨전’이 단지 일대일 항 사이의 평등한 교류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갖가지 구조적인 사건들을 ‘인간 본능론’에 가두어버려서는 안될 것 같아요. 비슷한 문화권의 자기표현들도 관계와 위치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하니까요.
 
어쨌거나 낯섦을 발굴하는 권력자의 시선 앞에서, 발견의 대상이 될 ‘낯선 이’가 자신의 뿌리에 천착하게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인 것 같아요. 게다가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억압받아왔다면, 이제야 ‘매력적인’ 타자로 발돋움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되물음이 필요해지겠고요.
 
여성의 가치를 주장하는 몇몇 책들이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온 일군의 역사를 추적해 위대한 여성상을 정립하려고 하는 것처럼요. 혹은 침탈 받아온 민족이 그 울분을 자기 우월성을 통해 해소하려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요.

 

흑인이 ‘유행’하는 시대에 한 흑인여성의 자기인식
 
▲  <Red Earth- A Malian Journey>(2007) 앨범
아프로-아메리칸(Afro-American) 뮤지션 디 디 브릿지워터(Dee Dee Bridgewater)도 이 대열에 합류합니다.

 
그녀는 여지까지 주로 스탠다드재즈를 해온 전형적인 흑인 재즈싱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최근 들어 부쩍 자신을 구성하는 사회적인 조건들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초기 재즈의 모델인 엘라 피츠제럴드(Ella Fitzgerald)의 성향을 이어받으려고 하는 등, 그녀는 언제나 여러 면에서 ‘흑인성’을 인식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것이 더 구체화되었습니다.
 
2005년에 발매한 <J'ai Deux Amours>는 샹송의 정취를 수용한 앨범인데요(그녀는 1980년대에 프랑스로 이주하였습니다). 흥미롭게도 그것 다음에 이어진 이 앨범 <Red Earth- A Malian Journey>(2007)에서는 말리의 민속음악, 즉 ‘토속적인 사운드’에 심도 깊게 접근합니다(실제로 그녀는 이 앨범을 위해 말리 현지를 방문하고 그곳에서 곡 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와 서아프리카라… 얼핏 보면 어딘지 반대되는 것 같지만 그 두 앨범의 음악적 테마는 묘하게 한곳으로 모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가 조심스레 만지고 있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그것. 바로 이주와 이산의 문제-‘디아스포라 Diaspora’-로 점철된 억압받는 자의 역사입니다.
 
프랑스를 비롯하여 서구유럽제국주의와 인연(?)이 깊은 아프리카. ‘여전히’ 가난한 지역이자 풍부한 ‘낯설음’을 보유한 환상의 공간으로 말해지는 그곳에, 미국에서 태어나 대도시에서의 경험을 안고 살아가는 한 흑인여성이 음악을 소통구로 하여 잊혀진 흔적들에 다가갑니다. 유럽백인남성을 비난하거나 아프리카의 신비를 드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흑인이자 여성인 자신의 ‘현재’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뿌리’들을 연속선상에서 경험하려는 시도로서 말이죠.
 
하지만 그녀가 찾는 ‘흑인성’과 민속풍습은 온전히 순수한 것이거나 최종적인 결론이 아니라 역사적이며, 지속되는 삶입니다. 수입판 앨범속지에 실린 창작 의도를 밝힌 글에서도 그녀는 혈통이란 결코 한 가지 색깔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짚고 넘어가지요. 그녀는 저마다 다른 농도의 검은 빛을 담고 있는 흑인과 아시아인 여성들이 지금까지 우리들 자신의 피부(몸)에 대해서는 겉도는 말밖에는 할 수 없었음을 깨달으면서 백인미학에 의해 덮여있던, 존재하지만 말해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시작합니다.
 
재즈보컬리스트와 ‘현재적인’ 민속음악의 교감
 
▲ Dee Dee Bridgewater 의 <dear Ella> 앨범재킷
들어보시면, 첫 트랙부터 심상치가 않습니다. 몸 속 기관들을 온통 춤추게 하는 듯한 ‘전통적인’ 타악기들이 여기저기서 굴러나오며 길들여진 감각을 되살려줍니다.

 
더불어 하프의 일종인 말리의 악기 코라(kora)랄지 건반악기인 발라폰(balafon) 등의 아프리카 민속악기들도 연주됩니다. 이름은 낯선 악기들이지만 소리를 들어보면 어딘지 익숙합니다. 이 앨범에서 그녀는 혼자 노래하지 않고 몇 명의 다른 보컬들과 함께하는데요, ‘Dee Dee’나 ‘No More(Bambo)’를 같이 부른 토착 여성보컬들에게서는 흡사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에서 들어 보았음직한 음색도 느껴지죠.
 
월드뮤직에 무지한 제게 이 음반이 가져다 준 첫 번째 충격은 아프리카적인 색조가 남아시아는 물론이요, 동아시아에 이르는 우리 지역의 전통음악들과도 굉장한 유사성을 가진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보다 큰 쾌감은 이 음반이 갖고 있는 탁월한 ‘번역력’에서 비롯되죠.
 
디 디 브릿지워터의 스캣(scat)과 이 음반에 참여한 많은 흑인 ‘형제.자매들’은 박물관에 있는 음악을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그 음악의 숨결로 살고 있는 현재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상황과 비교해 볼 때 이런 점은 참 부러워요. 전에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아이슬란드의 외침>이라는 영화를 보면서도, 월드뮤직이라는 건 단지 한 민족의 옛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흐름을 함께하며 소통하는 한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장르라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근현대사에서 거의 배제되어 있는 우리의 민속음악을 구태의연한 전통 되살리기 운동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노력들이 절실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미 이곳 저곳에서 몇몇의 새로운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긴 하지요.
 
각자의 시간을 부정하지 않는 음악 ‘From Africa To America’
 
▲ <Keeping Tradition> 앨범재킷
다른 측면에서 이 음반은 역사를 구전으로 전달하는 아프리카 그리옷(Griot)의 전통, 또한 흑인문화에서 강조되는 ‘주고-받음(부름-응답)’의 미학을 선보입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공동체문화, 블루스와 재즈가 그러하듯이 이쪽에서 하나의 이야기를 하면 저쪽에서 그것을 이어받는 형식이 곡을 완성합니다.

 
Oh My Love (Djarabi)’에서 말리의 토속어인 밤바라(Bambara)로 부르는 여성 노래꾼과 영어로 노래하는 이 뮤지션이 주고받는 소리들은 각자의 공간을 넘나들다가 어느 샌가 밤바라 언어의 노래를 공유하는 상황으로 나아갑니다.
 
다양한 타악기로 가득 차서 넘실대는 음악 속에서 한 여성재즈보컬리스트의 ‘자신을 찾는 여행’은 자기부정의 역사를 딛고서 ‘검은 목소리’를 교류하는 순간들을 체험하는 듯 합니다. 종족성을 밝히는 작업들이 곧잘 계급이나 성별의 문제를 희석시키고, 민족주의에 흡수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디 디 브릿지워터의 음악학에는 마음이 갑니다.
 
언젠가 오케스트라와 백인여성 성악가에 재즈밴드와 그녀가 함께 배치되어 모차르트의 명곡을 부르는 퍼포먼스를 본 적이 있는데요. 서양고전음악에서 노니는 그녀의 재즈 스캣은 억지로 가져다 붙인 것 같지 않았고, 심지어 은근히 클래식에 반감이 있었던 저에게도 그 음악의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했답니다.
 
대중음악이 민속음악을 변형시켜 트렌드를 만들려고 할 적에, 개별 악기의 성격이나 창법들을 무시하거나 그것들을 그저 이국정취를 위한 향신료로 사용하는 일이 흔한데요. 그런 경우에 빗대어 봐도 그녀와 동료들의 합동작업에는 무언가 따뜻한 면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불편한 관계였던 백인클래식음악이나 가족관계였던 아프리카토착음악에서 그녀의 재즈는 어느 한쪽을 누르거나 자기 음악의 고유성을 말하기보다는 우리가 서로 완전히 다르지 않지만 동일하지도 않다는 것, 즉 우리가 서로 닮아있지만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숨쉬는 이유로 각자의 존재감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억압에 의해 분절되고 가로막힌 문화를 드러내는 여정이 그녀의 균질적이지 않은 뿌리를 말해줄 수 있었듯이, <Red Earth- A Malian Journey>는 말리의 어떤 음악과 만난 이 흑인여성의 재즈에 색다른 전환기를 부여합니다.
 
그것은 낯설음에 대한 탐닉에서 멈추지 않는, 동시대를 함께 호흡하려는 의지이자 존중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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