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판단하고 선택을 내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올바른 결론을 내리고 이를 실천할 수 있다면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도 높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부분 판단은 우리 손에서 떠나있는 듯 보이고, 소신껏 행동하기란 힘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다고 좌절하거나 체념하게 되는 경우가 더 많지요.
그래서 부당하게 여겨지는 일에도 따라야 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내 생존을 쥐고 있는 사람이 지시하는 일이거나,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따르는 일이라면 용기 내어 이의를 제기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의를 제기하는 행위를 동료들이 비난하게 되거나, 혼자서만 관점이 다르다고 생각할 때 소외감과 수치심을 겪게 되면서 힘이 더더욱 빠지지 않습니까. 허나 마음에 새겼으면 싶은 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 도덕성에 비추어 이의를 품고 마음 안에서 저항했더라도, 이미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 무엇을 행동으로 옮겼다면 결국엔 문제를 제기하고자 했던 처음의 관점도 사라질 우려가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상자 안의 모든 사과를 썩게 만드는 것은 이는 페스팅거라는 심리학자의 ‘인지 부조화 이론’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행동을 선택할 때 만약 일치하지 않는 두 가지 신념이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강한 갈등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지 부조화’ 상태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이러한 복잡한 갈등을 경감시키고자 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하게 된다면, 우리는 갈등하는 두 생각 중 행동에 반대하는 생각은 버리고, 결국 행동을 지지하는 생각을 옹호하고 정당화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패기 있던 많은 사람들이 외부의 압력에 시들시들해졌던가 봅니다. 만약 힘있는 사람이 자기보다 힘없는 누군가에게 비도덕적인 어떤 행동을 지시한다 했을 때, 이는 단순히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한번 강요함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개개인이 가진 신념을 무시하는 행위이고, 스스로가 정의롭고 주체적인 사람이라는 자기상에 상처를 주는 행위입니다. 더 깊게, 결국 도덕적 신념을 저버리게 만들고 어긋난 생각에 동조하게 만듦으로써 신념과 정체성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어쩌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존엄성을 훼손당했기 때문에 그 자는 시들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충분히 선하고 정의로운 판단을 내리고 실천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아주 흔들리기 쉬운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좋은 일은 좋은 사람이 하고, 나쁜 일은 나쁜 사람만이 저지른다고 믿어지겠지만, 메이어라는 심리학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의 썩은 사과 때문에 주변의 사과가 모두 썩어버리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지만, 하나의 썩은 사과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천천히 엄습하는 열기와 습기는 단숨에 모든 사과를 썩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온도와 습도를 잘 조절하기 위해 조금씩이라도 정의로운 행동들을 잘 저축해두어야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악에 눈감는 방관자가 될 여지를 줄일 수 있습니다. 사과는 순식간에 썩습니다. 그렇다고 영웅이 필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스스로의 삶과 신념을 지키는 내 안의 작은 영웅은 희망을 가능케 하고, 희망은 더 많은 작은 영웅들을 키워낼 수 있음은 자명해 보입니다. 알맞은 온도와 습도의 정의로운 환경으로 잘 버티면서 썩은 사과는 천천히 굴려 떨어뜨려야지요. 요즘 흉흉한 소식들을 접할수록 드는 생각입니다. 아,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겠구나 하고요. 밀그램의 ‘복종실험’: 누구나 나치가 될 수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였던 밀그램은 1960년대 실시한 무서운 실험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밀그램의 이 ‘복종 실험’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실험상황에서 참여자는 ‘선생’의 역할을 맡습니다. 상대방(실제로는 연기자)은 쌍으로 제시된 단어들을 외워야 합니다. 만약 쌍을 틀리게 대답할 경우에 선생의 역할을 맡은 참여자는 15볼트에서 시작하여 틀릴 때마다 15봍트 단위 증폭시키면서 상대방에게 전기충격을 가하게 됩니다. 120볼트에 이르면 연기자가 연기를 시작합니다. 아프다고 외치고, 실험을 중단하라고 멈추고, 비명을 지르다 결국 아무 말도 못하는 상태에 이르도록 말입니다. 실험자는 참여자가 계속 볼트를 증가하도록 지시하는데, 결과적으로 참여자 중 65%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지시에 저항하지 못하고 최대의 전기충격을 상대방에게 가하는 행동을 지속했다고 하지요. 이 실험이 비윤리적이라고 지적 받아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만, 실험참여자들은 나중에 자신이 마치 나치대원이 된 것 같은 기분을 토로했다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저 실험실에서 복종하기를 거부할 것 같지만, 실은 우리도 저 평범한 65%의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 (자기는 안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람이 흔히 보이는 생각의 오류이지요.) 비판의 목소리를 억압하고 소신 있는 행동을 처벌하는 지금,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심리적 갈등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볼트를 올리고 있어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볼트를 올리는 행동을 정당화하는 논리에는 빠져들지 않고 조금씩 저항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옳지 못한 일을 판단하고 저항할 수 있는 힘 참여자가 직접 충격을 가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충격을 지시하게 되었을 때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복종에 따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기충격을 받는 상대방과 가까이 앉아있을 때 복종하기를 저항하는 참여자들이 더 늘어났다 합니다. 최근의 뇌신경학 연구에 입각하여 본다면, 이것은 감정경험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이 도덕적 판단에 관여한다는 발견과 관련이 큽니다. 그러니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맹신하지 말고, 사람다운 살가운 감정에 입각하여 판단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복잡한 도덕적 판단을 내릴 때에는 감정경험을 담당하는 뇌의 영역과, 갈등을 알아차리는 뇌의 영역과, 사고능력의 영역에 해당되는 고차원적인 추론 능력을 모두 동원하게 됩니다. 따뜻한 감정과 명석한 사고능력 그 어느 하나도 배제하지 말고 갈등이 사라진 마음에서 우러난 판단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불편하다면 행동을 멈추고 도덕적 판단을 재고해 보십시다. 어떤 판단을 내리거나 행동을 취해야 할 때 만약 마음에 갈등이 생긴다면, 그것은 곰곰이 신중하게 생각을 정리해 나가야 한다는 신호입니다. 우리 감정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불안함에 발을 동동 구르지 마십시오. 그런 경우 집중해서 생각하기 어려우니 오랜 시간 심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잘 가라앉히고 지혜로운 결론을 내릴 채비를 잘 갖추어 보십시오. 마음이 산란하면 좋은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습니다만, 사람은 누구나 가장 정직하게 자기 역량에 따라 현명한 판단을 내릴 힘을 갖추고 있습니다. 자기 역량의 테두리를 설정하고, 할만한 수준에서 조금씩 실천해 보는 소중한 경험도 간직하십시오. 마음의 힘은 그 안에서 솟아오릅니다. 또 한가지, 실험실 안에서 전기충격을 중단하도록 주장하는 다른 사람이 있었을 때 사람들은 복종보다는 저항하기를 더 선택했다고 하지요.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좋은 동료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도덕적으로 불편하다고 문제 제기할 수 있고, 나와 같은 마음인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면 희망이 생기고, 희망이 생기면 다시 또 목소리를 조금 더 키우고자 하는 힘이 생깁니다. 거리껴지면 꺼려야 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꺼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처음부터 뒤엎지는 못하지만, 옆 사람에게 “이거 왠지 거리끼지 않냐” 하고 말 붙여 보면 누군가는 동의할 터이니 기운 내십시오. 이건 왠지 옳지 못하다 싶을 때, 어두운 곳에 작은 불 밝히고 모여 그렇다면 무엇이 옳지 못하고 무엇이 옳은 걸까 말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지켜내는 일이 참 중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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