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씨는 사람들이 집을 사고 팔고 이사를 들고 나고 하는 과정에서 사다리역할을 하며, 자신의 일에 대해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저는 중개업소라는 말보다 복덕방이 더 좋아요. 중개비도 그냥 복비라고 해요. 남들은 그게 비하하는 말이라고 하지만, 전 원래 이 일이 그런 것 같아요. 복덕방이란 복(福)과 덕(德)을 나누어주는 곳이란 의미거든요. 잘 살게 해주고, 복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이사 들고 나고 하는 게 쉬운 일 아니잖아요. 개인의 인생에서 보면 대사(大事)죠.” 이주가 잦은 도시생활을 하며 지금까지 많은 부동산중개업자를 만나봤어도, “복을 나눠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손님을 대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만큼 김영희씨에겐 특별한 데가 있었다. 서대문 홍은동에 있는 ‘조은집’ 공인중개사사무소를 찾아가 그녀의 삶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일 욕심 많던 공무원, 삶의 전환점을 맞다 김영희씨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초, 당시만해도 사회적으로 여대생들의 미래는 ‘일보다는 결혼’에 더 가치를 두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 잘 만나는 것이 우선순위’라는 분위기에 동조할 수 없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20대 초반의 김영희씨는 지방에 있는 한 맹인학교에서 영양사로 일하며,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학교는 방학도 있고 해서 영양사가 일하기 편한 곳이었지만, 그녀는 보건직 시험을 보고서 의료원으로 직장을 옮겼다. 병원에선 환자에게 세끼 음식을 다 제공해야 하고 식단의 변화도 많아서, 더 많은 일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김영희씨에겐 편함과 안락함보다는, 배움에 대한 열의와 일 욕심이 더 컸다.
“몸이 많이 아팠어요. 스트레스성이었죠. 자식들도 돌봐야 하고, (의사가) 일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건강을 잃었던 경험. 그것은 외롭고 고통스러운 경험이었지만, 새로운 눈을 뜨게 해준 경험이기도 했다. “아침에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고, 바람에 버들잎이 흔들리는 모습을 봐도 눈물이 났어요. 오늘도 햇빛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요. 제가 그렇게 아팠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더 이해해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건강을 잃든 돈을 잃든, 뭔가를 잃는다는 것은 같거든요.” ‘가진 게 없는 사람’ 입장에 서주는 공인중개사 4,5년 간 집에 있었다지만 마냥 일을 쉰 것은 아니었다. 도시락위탁업체에서 비정기적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 아이들과 서점에 자주 다니며 책도 많이 읽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그 날은 혼자 서점에 갔는데, 갑자기 EBS 책(공인중개사 교재)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전 십대 때에도 눈에 들어오는 책만 봤거든요. 점원에게 이게 다 몇 권짜리냐고 묻고, 여덟 권인가 아홉 권인가 그 무거운 걸 짊어지고 와서는 그날부터 보기 시작했어요.” 2003년 3월 7일. 날짜도 정확하게 기억한다. 그로부터 6개월 후, 김영희씨는 공인중개사 시험을 보고 자격증을 땄다. 1년간 일을 배웠고, 본격적인 중개 일을 시작한 지 6년째다.
무엇보다 김영희씨의 중개사무소가 특별한 이유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가치관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저는 되도록 편안하게 해주려고 해요. 그래선지 사후(계약이 성사된 이후)에도,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도 사람들이 저에게 문의를 해와요. 그 분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노력하죠. 우리는 없는 사람 입장이 되어주어야 하니까.” 공인중개사가 왜 없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주어야 하냐고 물었더니,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왜냐면 (그분들이) 약자니까요.” 힘든 사정들 “누군가는 들어주고 보듬어줘야죠” 없는 사람 입장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직업윤리를 가진 덕분에, 김영희씨의 중개사무소는 때로 상담소가 되곤 한다. “일하다 보면, 진짜 돈 많은 사람 빼고는 대부분 다 어려운 사람들이에요. 형편이 어려워져서 집을 옮겨야 하는 경우가 많아요. 누군가는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고 보듬어줘야죠. 전세에서 월세로, 지하 방으로 옮겨야 하는 분들이 있어요. 직장에서 갑자기 쫓겨나 오갈 데가 없는 사람도 있어요. 그분들이 누구한테 하소연하겠어요? 제가 들어줘야죠. 얼마나 마음이 아픈가 하고. 찬바람 몰아치는데 따뜻한 방 있나 최선을 다해서 구해보자 이야기하죠.”
“공무원사회는 타성에 젖기 쉽고 변화를 두려워해요. 분위기며 색상이며, 사람이 바뀌는 것도 싫어하죠.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어요. 저도 그랬어요. 하지만 이 일은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나야 하잖아요. 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이성적인 사람과 감성적인 사람. 그래서 내가 한가지 틀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변해야 사람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겠구나. 이성적으로만 판단할 일이 아니구나. 내 틀에서 벗어나서 다른 사람 입장이 되어보려고 노력했더니, 사람들 사정이 이해가 되더라고요.” 집도 없이 차 안에 세면도구랑 4개월 치 입을 옷을 넣고 다니는 사람을 봤을 때, 예전 같으면 “뭐 하는 사람이길래 저렇게 다닐까”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다 까닭이 있겠구나” 하고 이해해준다. 그래선지 집을 구하러 다니던 사람들이 김영희씨를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속사정을 다 털어놓고, 어떤 사람들은 실컷 울고 나서 중개사무소를 나서기도 한다. 들어주는 것만이 역할의 전부는 아니다. 비밀 이야기를 많이 아는 만큼, 사람들의 사생활을 보호해줘야 하는 의무도 크다. “말이 새나가지 않아야 하니까, 사람들의 비밀은 내 가슴에 영원히 묻고 가야잖아요. 내 가슴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어있어요.” 그 이야기들이 다 소중하다는 김영희씨. 물론, 사람들을 대하는 일이 마냥 즐거운 것은 아니다. “1년에 3개월 정도는 슬럼프 기간”이라 할 정도로 버겁고 힘든 시기도 찾아오는데, 그땐 사람들한테 치이고 지쳐서 몸이 천근만근 된다고 한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 “복을 나누는” 일을 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또한 일을 통해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해나간다. “(사람들이) 속이 시원하다고들 해요. 마음의 짐을 여기 내려놓고 가시는 거죠. 그런 얘길 들으면, 미미한 존재인 내가 조금은 쓸모가 있나 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좋아요. 저에게도 고마운 일이죠. 왜냐면 그분들 이야기가 별나라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다 사람 사는 얘기고, 그만큼 제가 인생을 배웠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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