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다는 라오스의 문화, 생태, 정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여행기를 연재합니다. 필자 이영란님은 라오스를 고향처럼 생각할 정도로 특별한 인연이 있는 분으로, <싸바이디 라오스>의 저자입니다. –편집자 주
아이는 2007년 여름 열여섯 살이었다. 1990년생이니 우리 식으로 하면 열여덟 살 어쩌면 열아홉 살일 수도 있으나, 라오스에서는 16년 11개월이 넘었어도 17년이 안되었으니 열여섯 살이다. 아이는 싸이냐부리 중등학교 6학년, 우리로 치면 고3이었다. 라오스의 학교는 등수를 매기지 않지만, 굳이 또 한국식으로 따져보면 아이는 전교 1, 2등을 다투는 우등생이었다. 그 여름 아이는 싸이냐부리 군(郡)내 모든 고등학교가 참가한 라오스-베트남 혈맹 45주년 기념(매년 두 달 넘는 기념기간을 설정하고 각급 기관마다 기념식을 치르는 등 라오스는 베트남과의 관계를 아주 각별히 여긴다) ‘베트남 역사 겨루기 대회’에 학교대표로 출전해 1등을 하고 상금으로 50만 낍(한화 약 5만원, 라오스 교수 한달 월급에 달한다)을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아이는 2007년 가을(라오스의 학교는 가을에 입학하고 학년을 시작한다) 라오스국립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했다. 우리와 달리 의학과 약학을 같이 배우고, 따라서 자격증도 같지만(대부분의 라오스 사람들은 약사도 의사 또는 박사라는 뜻의 ‘탄머’로 똑같이 부른다), 라오스에서도 약사는 5년만 공부해도 되지만 의사는 2년 더 배워야 한다. 아이는 아마도 5년만 공부해 약사가 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내가 생각해 봐야 할 게 좀 있었다. 2007년 8월 대학입학원서를 교육청(라오스는 각 도교육청이 원서를 받고 국가계획에 따라 학과정원, 성적 등을 고려하여 지원학과를 조정하고 입학을 허가한다)에 내야 할 때였다. 주인아줌마는 아이 때문에 더욱 분주해졌지만, 여느 때처럼 내 저녁 끼니까지 챙겨줄 요량인 듯 부엌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의외로 아줌마가 물었다. “씰리펀, 발전사회학이 뭐야? 그건 어때?”
아줌마가 들고 있던 것은 라오스국립대학교 교정별(수도 위양짠, 북부 루앙파방, 남부 빡쎄) 설치학과 목록이었다. 이전부터 아이가 갈 것이라고 했던 의학부는 물론이고, 제법 많은 학과이름 가운데 아줌마가 손가락으로 찾아준 데를 잘 들여다보니, 분명 발전 또는 개발사회학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학과가 있었다. 근데 이건 왜? 아줌마는 아이가 갑자기 발전사회학과에 지원하고 싶다고 했다며, 내게 어떤 답을 얻으려고 하는 간절한 표정이었다. 약사와 의사, 그 의미를 혼동한 것도 있었지만 그때 나는 당연히 아이가 의학부를 가서 의사가 될 거라고만 생각했다. 아이는 공부를 잘하는데다 아빠는 경찰관, 엄마는 (탄머는 아니고 그저 약을 파는 것이지만) 약방을 하고 있고, 집안형편도 외국인에게 집을 임대할 만큼 비교적 넉넉하니 어떤 문제가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이게 라오스 사회에서는, 우리 주인집 식구들에게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까닭은 일단, 라오스는 사회주의 체제로 거의 무상교육을 한다고는 해도 최빈개도국이다. 자급자족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화폐로 지불할 수밖에 없는 교재비며, 과외비(영어, 프랑스어, 컴퓨터 등), 특히 농사지은 쌀을 보내는 데도 돈이 들어가는 수도 위양짠에서의 유학생활비는 만만치 않은 것이다. 게다가 이미 첫째 딸이 같은 라오스국립대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하고 있었고, 그는 앞으로 3년을 더 비싼 생활비를 들이며 위양짠에서 공부해야 할 것이었기 때문에.
세 번째 문제는 바로 이 발전사회학. 사실 아이는 엄마가 내게 와 묻기 전에 이미 나에게 몇 번을 물었다. 처음부터 발전사회학이라는 구체적인 것을 묻지는 못했다. 시작은 두루뭉실 나에 대한 궁금증에서부터였다. 내가 왜 라오스에 왔으며, 어떻게 올 수 있었으며, 무엇을 할 것인지, 또 나 이전에 살았던 유럽적십자사 직원과 같은 사람들은 무엇인지. 아이는 그렇게 바깥세상에 대한 관심이 키우다 발전사회학이라는 것으로 무언가 가닥을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아이는 의학부에 지원했고, 5년 공부하고 돌아오겠다며 위양짠으로 갔다. 아이의 시도는 내게 그저 한 번 물어보는 것으로 그쳤고, 꿈은 보수적인 아빠의 뜻을 좇아 조용히 묻혔다. 이렇게 아이의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풀지 못하는 문제를 안게 되었다. 라오스의 비물질적 측면의 발전은 어떠해야 할까? 나는, 우리는 저개발국 라오스의 발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나라는 보통 저개발국가의 초등교육 부문을 지원한다. 생계와 직결되는 직업교육도 있고, 일본과 같이 생색내기용 대학건물도 짓고, 저개발국에서 다룰 수도 없는 고가의 최신 기자재를 지원하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고등교육, 대학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한 계획은 아예 머릿속에 없는 것 같다. 뭐, 유엔의 새천년개발목표(Millenium Development Goals, MDGs)에서도 초등교육만 언급하는 걸 보면, 우리만 무식하고 촌스럽다고 할 일은 아니다.
교육의 순차는 사람 한 명이 학습을 하는 단계 문제이지, 사회시스템의 문제는 아니다. 무슨 이상한 평등을 위해 사회 전체적으로도 꼭 같은 단계씩을 밟아나가야 한다고 한다면, 초등교육을 맡을 고등의 교육자는 어떻게 육성할 것인가? 선진국의 고학력자들이 몰려가 영어로 학생들을 가르치면 될까? 이거 너무,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 폈던 교육정책의 논리와 유사한 것은 아닌가? 내 코워커 아짠 미노의 누나도 라오스국립대학에서 전산전신학과를 졸업하고, 싸이냐부리로 돌아와 라오텔레콤(라오스 정부투자기관)에 취직했다. 싸이냐부리에 있는 학교의 젊은 선생님들도 모두 루앙파방이나 위양짠에 있는 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엘리트들이다. 나는 이들을 보면서는 이들의 경향이 한국의 개발시대 불행한 이촌향도의 격랑을 라오스에서는 재발시키지 않을 것을, 최소한 그 속도를 늦출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놓이고 고맙기까지 했다.
내 책에 라오스 지도를 그려준 우리학교 학생 쏨분은 컴퓨터를 배워 돈을 많이 벌거나 비보이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나는 은근히 라오스 전통건축이며 예술이 아름답다며, 쏨분에게 라오스 전통문화를 담은 그림을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부추겼다. 사라져가는 저개발국가의 전통문화가 안타까워 나온 선의였다고 자위한다. 하지만 나는 라오스에서 빌게이츠나 피카소 같은 인물이 나오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할까, 아니면 전통을 지키는 민속예술가가 느는 것을 더 대단하게 생각할까? 얼마 전 국제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아시안브릿지의 ‘착한 여행’을 함께 다녀온 후배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요즘 열심히 학교 다니면서 개발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는데, 과연 개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원조, 자원봉사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있단다. 내부인이 아닌 외부인이 바라보는 시각에서 개발이라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단다. 공동체가 파괴되고 순수함을 잃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개발이라는 것이 꼭 필요한가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했다. 나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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