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이 되면서 어머니들의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 <창의성.철학 프로그램>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공부를 무얼 가지고 어떻게 가르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 수업시작 전 학부모님의 방문은 거의 필수 코스처럼 되어 있다.
내 설명을 듣고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도 많지만, 자기 아이에게 시키고 싶은 공부와는 거리가 있다며 발길을 돌리는 분들도 없지 않다. 또 마음에 들어도 시간을 맞춰 팀을 구성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서, 수업으로 이어지는 것은 ‘인연의 문제’인 것 같다고 늘 생각한다. 그래서 방문한 어머니들께 프로그램 소개를 마치면, 공부를 하는 것과 상관없이 추천도서목록을 드리고, 여러 가지 교육과 관련한 질문을 받고 그것에 나름대로의 생각을 말씀 드리기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어머니들이 쏟아놓는 다양한 질문들 가운데, 특히 자주 받는 질문들이 여럿 있다. 그 중 하나가 “우리 아이가 만화책을 너무 좋아하는데 어쩌죠?”라는 질문이다. 이번 달에도 어김없이 이 질문을 여러 차례 받았다. 나는 항상 “만화책도 좋아요. 많이 읽히세요.” 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그리스.로마 신화>를 꿰고 있는 것 같다. 바로 만화책 <그리스.로마 신화> 덕분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도 이런 만화가 있었다면, 나도 아주 재미있게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었겠구나 생각한다. 준영이도 좋은 예가 되고 있다. 함께 도서관에 다녔던 3학년에서 4학년 기간인, 1년 반 내내 그는 항상 만화책만 읽었다. 나는 준영이가 읽고 싶다고 꺼내오는 책들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가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이는 점점 책을 읽으면서 만화책의 수준도 스스로 높여가는 것이었다. 김훈의 <칼의 노래>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책꽂이에서 발견하고는, “이 책은 쉽게 읽을 기회가 오는 게 아닌데, 오늘은 정말 운이 좋아요.”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생생하다. 이런 책이 만화로 다시 출판되지 않았다면, 이 책들을 읽기 위해 준영이는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만화책도 요즘은 좋은 것들이 너무 많다. 아이들의 관심은 흐르게 마련이다 또, 부모님들 가운데는 아이가 영영 만화책만 좋아할까 봐 걱정하는 분들도 계시다. 그러면 나는 만화책을 계속 좋아하는 것이 문제될 것도 없겠지만, 그렇게 되기도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니 염려 말라고 한다. 만화책만 읽던 준영이도 요즘은 과학, 역사, 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모두 좋아하며 즐겨 읽는다. 가끔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화제로 꺼내며, 교양을 자랑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관심은 흐르게 마련이다. 어떤 것에든 깊이 집중해있으면 있을수록, 어느 순간 ‘이건 이제 시시하군!’ 깨닫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건 내가 초등 5-6학년 심취해 있던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빠져 나올 때도 경험한 바이고, 고교시절 내내 푹 빠져 있던 이청준의 소설작품에서 빠져 나올 때도 경험한 것이었다. 이렇게 흠뻑 무엇엔가 빠져보는 ‘몰입의 경험’은 내가 원하는 것을 밀고 나가는 추진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많이 된 것 같다.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기 전까지 계속해서 한 가지 주제나 문제에 매달려 있을 수 있는 힘은 그렇게 길러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만화책뿐만 아니라, ‘판타지소설’이나 ‘세계문화’에만 빠져있다고 걱정하는 부모님들께도, 그 아이가 싫증나서 스스로 그만 읽겠다고 할 때까지 그냥 놔두라고 말씀 드린다. 게다가 세상에는 감동적인 만화작품도 너무 많다. 요즘 나는 어렸을 때보다 더 만화책을 많이 읽는다. 최근에 읽은 것은 <천재 유교수의 생활>시리즈와 <대한민국 원주민>으로, 참으로 감동적인 작품들이었다. 만화책이 아니었다면 이만큼 감동을 줄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세상에는 만화책인 그 자체로 명작인 작품들이 있다. 활자화된 책에 비해, 만화를 수준 이하로 보는 만화책에 대한 폄하는 불공평한 평가가 아닐 수 없다. 좋은 책은 만화책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작가의 관점과 그 책의 내용으로 평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교육일기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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