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눈물에 대하여

‘윤춘신의 생활문학’ (3)

윤춘신 | 기사입력 2010/02/02 [17:18]

익명의 눈물에 대하여

‘윤춘신의 생활문학’ (3)

윤춘신 | 입력 : 2010/02/02 [17:18]
<일다>는 개인의 입체적인 경험을 통해 ‘여성의 삶’을 반추해보는 생활문학 칼럼을 개설했습니다. 필자 윤춘신님은 50여 년간의 생애를 돌아보며 한부모로 살아온 삶 이야기, 어머니와 할머니와 외숙모 이야기, 일터 이야기, 그리고 딸과 함께 거창으로 귀농한 현재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편집자 주
 
[익명의 눈물에 대하여]

여자가 말했다.
“열쇠를 우편함에다 숨겨 놓고, 때리면 도망쳤다가 밤에 몰래 들어가요.”

 
다른 여자가 말했다.
“그 인간은 때릴 때 멍도 안들 게 때려요. 이불을 뒤집어씌우고 골프채로 두들겨 팬답니다. 얼마나 아픈지 몰라요.“

 
또 다른 여자가 말했다.
“차라리 때렸으면 좋겠어요. 밤새도록 일어나라, 앉아라, 들어가라, 나와라 그러는데 미칠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매 맞을 짓을 안하고 싶은데, 날마다 맞을 짓을 한대요.”

 
내 나이 서른 초반에 알코올중독 가족치료모임에 갔다. 가족 중에 술로 인한 문제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만나는 익명이 보장된 모임이다.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오직 술로 인한 파괴적인 행동들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었다.
 
여자의 이야기에 내가 울고, 내 이야기에 여자가 울면서 서로의 눈물이 되곤 했다. 우리들은 배우자의 알코올로 인한 가정폭력에 대해 몹시 두려워했으며, 그들이 자각해주기를 기도했다. 누군가의 배우자가 단주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다는 말을 하면, 우리에게도 그런 날이 올 거라며 지치지 말자는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이곳에서 오랜 기간 훈련된 봉사자가 조언을 했다. 지구의 절반이 남자인데, 그 중에서 하필이면 이 남자를 선택한 것에 대해 되짚어보라고 한다.
 
해 뜨면 선택에 대한 미숙함에 대해 자책을 하고, 해지면 소리 안 나는 총을 가지고 싶은 욕구에 죄책감을 느꼈다. 오늘밤이 어제보다 덜 잔인하기를 빌었다. 남자가 귀가하기 전에 토막 잠이라도 자야 살수 있을 거라며, 아기한테 젖을 물리고 눈을 감았더랬다.
 
남자의 발자국 소리가 저벅저벅 현관 가까이 들려올 때면 심장이 요동을 쳤다. 네 살, 한살인 아이들이 잠든 방문을 잠그고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장난감은 깔끔하게 정돈돼있는지. 밥상은 제대로 차려져 있는지. 당신의 노고에 보답하기 위해 버스정류장에서 두 시간이나 서 있었다는 말도 꼭 해야 했다.
 
그 밤. 보슬비가 내렸다. ‘이빨 물어’로 사전경고 후 주먹을 날리던 남자의 손이 얌전했다. 그 대신 발가벗긴 채로 베란다에서 벌을 섰다. 오월의 새벽바람은 서늘했다. 방충망 사이로 들락날락하는 보슬비가 분무기로 칙칙 뿜어대는 물 분자와 닮았다.
 
맨몸이 드러난 사실에 대해 수치스러웠다. 남자에 대한 살의와 적개심으로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오소소 소름이 돋은 두 팔로 가슴을 껴안고 웅크리고 앉아서 곰곰이 생각했다. 언제 끝이 날까.
 
알코올중독 가족치료모임의 협심자는 그가 술로 인한 문제를 깨닫도록 오줌이거나 똥이거나 그대로 둔 채 대신 처리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하루가 얼마나 행복한지 눈을 돌려 느껴보라고도 했다.
 
깨진 술병과 조각난 유리컵을 조심조심 쓸어 담지 말아야 한다. 방바닥에 그대로 꺼진 담뱃재로 타 들어간 장판을 도려내어 그 구멍을 말끔하게 때우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해가 중턱에 걸리면 남자의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그가 아프다고 핑계를 대는 일도 하면 안 된단다.
 
춥고 쓸쓸했다. 남자가 질병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은 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십 년 동안 가정폭력에 시달린 나는, 하지 않은 것에 대한 화풀이가 심해질 것이 더 무서웠다.
 
바깥양반이 술이 좀 과했으니 아주머니가 이해하라는 충고를 하는 경찰과, 오늘만이라도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달라는 나와, 여자가 오죽하면 이러겠느냐는 남자에 대해 체념을 하게 되었다. 자포자기 상태에 빠진 내 목숨 줄을 쥐고서 남자는 기세 등등해졌다.
 
가정폭력에 대한 남자의 면죄부는 알코올중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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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ay 2011/04/07 [13:57] 수정 | 삭제
  • 다들 왜 일케 답답한 소리만 하셔요? 경찰관도 법관도 거진 다 남자니까. 그들도 울화통이 터지면 보기 싫은 여편네 한대 패고 싶으니까. 그 따위 사소한 일로 처벌받을 것은 생각도 하기 싫으니까. 세상이 아직 이런 거잖아요.
    여자들이 힘이 세져야 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상대는 단호히 절연할 것이며, 아이가 있어서 참아야 한다는 따위의 말에 굴복하지 않아야 그들도 꼬리를 내릴 겁니다.
    그리고, 가정폭력이라는 것이 너무 정형화되는 것 같아요. 백분율이야 물론 남자가 많겠지만. 저는 남자가 아닌 여자들에게 폭력을 당했어요. 이유없이 저를 패는 사람은 늘 어머니였고, 언니였습니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손찌검을 하지도, 바람을 피우지도 않았지만, 아버지와 닮았다는 이유로 자식 셋 중에서 저만 늘 맞았어요. 다 큰 저를 발가벗겨서 대문 밖에 세워둔 적도 많아요. 나이 들어 이야기했더니 이제 와서 지난 일을 꺼내 어쩌라고? 그럽디다. 늘 늦게 들어오셔서 아무것도 모르시던 아버지는 저더러 어머니께 대드는 불효자식이래요. 이젠 다 덮어버리고 지내지만, 가끔씩 어머니의 옛 모습을 생각하면 돌아버릴 것 같아요. 제 경험상 제 상상 속의 악마는 남자가 아닌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요.
  • 미칠 것 같아 2010/02/09 [14:27] 수정 | 삭제
  • 잔인한 폭력앞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끼면 상대를 죽이는 것이 정당방위 아닌가요? 그 폭력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어떡하구요? 법은, 그리고 사회는 알콜중독과 폭력을 휘두루는 남자에게 왜이리 관대하지요? 이런 이야기들.. 우리 어머니세대에서 끝이 났어야 할 이야기들 아닌가요?
  • 그 눈물.. 2010/02/08 [00:35] 수정 | 삭제
  • 그 눈물이 묵직하게, 잔잔히 전해져요.. 님의 글을 계속 지켜보겠습니다.
  • 거참 2010/02/07 [21:29] 수정 | 삭제
  • 이 가정폭력 문제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문제는 영화 "거짓말"에 대해서는 부정적이면서 가정폭력에는 너무나도 관대한 아이러니, 솔직히 이건 거꾸로죠. 술 먹고 동의없이 배우자를 때리는데, 이건 어떻게 봐도 폭력인데 봐주잖아요, 하지만 서로의 동의 하에 쾌락을 위해서 때리는 거 이건 절대 폭력이 아닌데, 부정적으로 보죠. 겉으로 보기엔 폭력이 포함된 듯 보이지만 폭력이 아닌 것들 (태권도, 무술, 액션영화관람,...)은 익숙하니까 거부감이 없는데 SM도 그런 종류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그리고 가정폭력은 익숙하다는 이유로 "뭐 그럴수도 있지". 이상함에 대한 거부감이 폭력에 대한 거부감을 이기는 세상은 좋지 않아요.
  • 거참 2010/02/07 [21:28] 수정 | 삭제
  • 마약음료수를 먹고 가정폭력을 일으키면 죄값을 할인해주는 시스템... 이 시스템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알코올보다 덜 위험한 것으로 알려진 다른 마약을 섭취하면 그냥 잡아가고. 마약의 종류에 따른 이 지독한 이중기준. 코케인 먹고 사람을 쳤는데 "코케인 먹었으니까 봐줄께."라고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또는 "내 밑으로 다 마리화나 한 모금!" 이렇게 말하는 선배가 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 최현숙 2010/02/06 [05:27] 수정 | 삭제
  • 한참동안 멍하게...또 다시 분노와 속앓이를....
    함께 자꾸 꺼내서 풀어 놓자구요....
    풀어 놓는 것도 듣는 것도 또 아프지만....
    그래도 풀어야 .... 나눌 수 있겠지요.
  • 꽃게랑 2010/02/03 [04:56] 수정 | 삭제
  • 아, 마음이 아프네요. 눈을 뗄 수 없이 읽혔어요. 제 주변에도 말하지 못하고 속앓이 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여자들이 겪는 진짜 이야기, 진짜 글을 읽을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다는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