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여성의 몸 이야기> 연재는 외면하기, 직면하기, 비교하기, 수용하기, 강점 찾기, 표현하기 등 장애여성이 자신의 몸에 반응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타자화된 장애여성의 이미지를 뛰어넘어, 우리 자신의 언어를 통해 장애여성의 삶을 재구성하려는 데 의의가 있다. – 편집자 주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 이젤 앞에서 손에 붓을 압박붕대로 감은 채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손과 힘없이 구부러진 내 손가락을 번갈아 내려다봤다.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언니는 “괜찮아. 다 방법이 있어. 수채화는 섬세한 손동작이 필요하니까 어려울지 몰라도 유화는 할 수 있어. 손이 안되면 입으로 그려도 돼.” 하고 말했다.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구족화가를 알고 있는데, 그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든 일이어서 사양했다. 그날로 등록해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힘이 없는 손가락과 손목에 4B연필을 끼우고 압박붕대로 돌돌돌 감았다. 이젤 앞에 앉아 어깨를 들고 어깨 힘만으로 선을 그었다. 아무 의미 없는 선들이 점점 사물의 모양을 갖추어갔다. 목탄으로 그릴 때는 붕대를 풀고 직접 손으로 그려 뭉개기도 했다. “성격 나온다 성격 나와. 선 그리는 거 보면 성격 다 보여.” 무슨 성격이 어떻게 나온다는 건지 옆에서 강사언니를 비롯해서 사람들이 놀렸지만 나는 진지했다. 어렸을 때 병이 진행되는 바람에 그리다가 만 그림은 언제나 구경하고 감상하는 것이었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는데, 가능해졌으니 어찌 신나지 않으리오. 휠체어, 다리이면서 족쇄였던가 “스키캠프가 있는데 우리 갈까?” 어느 날 친구가 전화를 했다. “스키?! 우리가?” 그때까지 장애인이 스키는 탄다는 사실을 몰라서 깜짝 놀랐다. 친구는 하반신마비 장애인이라 탈 수 있을지 몰라도, 손까지 장애가 있는 내가 할 수 있을지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친구와 함께 2박 3일간의 캠프에 참여했다. 첫날 아침, 아래에서 올려다보는데 장애인 스키어들이 빠르게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지만 정말 멋진 광경이었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체까지 장애가 있는 사람이 타는 바이 스키에 앉아 양팔을 가슴 앞에서 모으고 보호장구로 꽁꽁 묶었다. 어쩐지 좀 겁이 나서 “이대로 병원에 갇히는 건 아니겠죠?” 하고 웃으며 소감을 말했다가, 꼼꼼하게 살피고 있던 외국인 코치의 “다치면 큰일 나니까 더 단단히 묶어요.” 하는 소리에 더 겁이 났다. 개인 코치는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 내 스키와 연결된 긴 끈을 잡고 뒤에서 큰소리로 가르쳐주었다. 어깨 힘으로 방향과 속도를 조절하며 8자로 활강하며 내려왔다. 무서웠지만 진정으로 자유로웠다. 휠체어는 다리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한편으로는 족쇄 같은 것이기도 했던가.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어요” 첫 캠프는 시간이 부족해 초급자 코스에 머물렀지만 그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집에 와서 장애인 스키에 대해 알아봤다. “이거 완전 신세계인데?” 두번째 캠프에서는 4박 5일의 일정으로 훨씬 강도 높고 전문적인 강습을 받았다. 몇 년만이라 감각을 다 잃어버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초급자 코스에서부터 장애인스키 국가대표 감독님의 애정 어린 고함소리와 내 담당 코치의 엄한 지도로 이틀 만에 초급자 코스를 떼고 중급자 코스로 올라갔다. 거기는 초급자와는 비교가 안 되게 높고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내려다보면 일단 먼저 몸이 얼어붙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너무 무서워 속으로 온갖 비명에 피눈물을 흘렸지만 내색도 못하고 “조금만 쉬었다 내려가면 안 될까?”하고 웃었다가 코치의 콧방귀 소리만 들었다. 개인 코치와는 금방 친해져서 서로 눈치 보거나 사양하는 예의고 뭐고 없었다. 남녀 코치들 중에 가장 엄격한 나의 코치는 합숙소에서는 언니, 언니 하며 놀다가 코스 위에만 올라가면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뒤에서 고함소리만 들려줄 뿐 봐 주는 법이 없었다. 정상에 올라가면 무서워서 후회하고 내려가면 바로 올라가고 싶어지는 것은 무슨 조화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쉬지 않고 리프트 타러 가다가 감독님을 만나면 한탄인지 감탄인지 고개를 내저었다. “좀 쉬면서 해요. 선수들보다 더하면 어떡해요. 안 그렇게 생겨가지고 엄청 독종이야!” 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다. 큰 사고로 우황청심환도 먹어보고 마지막 날 스키대회에 출전해서 2등을 하기도 했다. 눈 감고 싶은 순간이 너무 많았지만 눈 감고는 탈 수 없는 스포츠인지라 눈 부릅뜨고 후회 없이 배웠다. 세상은 온통 나를 비추는 거울 장애로 인해 몸으로 뭘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그래서 동경하게 된다. 몸으로 하는 무언가를. 수영을 배우기 위해 몇 년간이나 기다리고 계획을 세우고 거절당하고 테스트를 거쳐 배울 수 있었다. 나보다 먼저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깨닫는다. 거기에는 ‘할 수 있는 내 모습’이 보인다.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상대의 모습 속에서 차등을 두는 것이 아니고, 잘나고 못남을 견주거나 나누지도 않고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비교하기’의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영원히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가능으로 바뀌는 것도 몇 번이나 경험했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해도 괜찮다. 하나씩 조금씩 나를 찾아서 살다 보면 죽을 때쯤에는 완성할 수 있을 테니까. *다비다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지체장애여성으로서 외유내강형의 시트콤 작가입니다.
이 기사 좋아요
<저작권자 ⓒ 일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장애여성 몸 이야기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소수자 시선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