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보다는 사람을, 사진 찍기보다는 이야기하기를, 많이 돌아다니기보다는 한 곳에 오래 머물기를 선택한 어느 엄마와 세 딸의 아시아 여행기입니다. 11개월 간 이어진 여행, 그 길목 길목에서 만났던 평범하고도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필리핀 민다나오 까미귄 섬②
그러니까 사람들 지나다니는 길을 산책하다가도 멀리 앞서 걷는 둘째에게 “설사는 좀 어떠냐?” 소리쳐 물을 수 있고, 가끔 반항모드로 자동 전환되는 큰 아이에게 “정말 이딴 식으로 할 거냐”고 누가 있든 말든 쏘아붙일 수 있다는 것인데, 그 뒷자락에는 남들이 눈치 못 채도록 온화한 얼굴에 평이한 어조를 유지해야 하는 소소한 어려움이 따르기도 하였다. 필리핀 사람들은 영어에 능하였다. 딸내미 보러 잠시 다니러 오셨다는, 여든 가까운 마마로사의 어머니께서 일제 치하에 처녀공출을 피하려고 일찌감치 결혼한 사촌 얘기를 영어로 들려주실 때, 우리와 흡사한 식민역사도 놀랍거니와 능수능란한 할머니의 영어실력에 입이 떡 벌어졌다. 마침 방학을 맞이한 동네 아이들도 매일같이 에니그마타(Enigmata: 예술 커뮤니티)를 드나들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부끄럼 탓에 말을 안 하다가도 일단 낯을 익히고 나면 종알종알 궁금한 것들을 영어로 묻곤 하였다. 이 외진 섬 작은 학교에서도 대부분의 수업을 영어로 한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 딸들은 뛰어 노는 게 곧 공부라고 믿어온 부모 덕분에 아직도 영어를 장님 코끼리 만지듯 하였고, 영어 까짓 거 하며 살아온 내 처지 또한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 하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마음을 다독이며 일단 말문을 트기로 한다. 그런데 내가 뒤돌아 앉아 기억 저편 어딘가에 화석처럼 박혀있는 단어와 문법들을 홀로 파헤치고 있을 때, 딸아이들은 팔랑팔랑 뛰어다니며 말을 배웠다. 나는 짧게 한 마디를 하려 해도 머리 속에서 몇 번이고 문장을 만들었다 해체하며 전전긍긍인데, 아이들은 남들 말하는 대로 대충 따라 하는 시늉을 하고 급하면 아는 단어들만 주워섬기면서도 희희낙락이다.
사실 나는 어린 아이들에게 너도나도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 마땅치 않았었다. 우리말의 고운 결들을 채 익히기도 전에 다른 나라 말을 배운다고 법석을 떠는 것이 두 마리 토끼를 단번에 잡겠다는 어리석음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영어 때문에 한바탕 마음을 졸이고 나니 갑자기 생각이 뒤죽박죽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여겼던 영어 몰입식 교육이 필리핀이나 말레이시아에서도 진작 행해지고 있었고, 그 성과를 부분적으로 목도한 뒤로는 솔직히 좀 풀이 죽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에니그마타 스태프 부다이가 숙제하는 걸 지켜보게 되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려고 공부 중인 대학생 부다이는 자신이 영어로 써놓은 리포트 초안을 필리핀 공용어 따갈로그(Tagalog)로 번역하며 끙끙 앓고 있었다. 영단어에 적합한 따갈로그 말을 찾느라 연신 사전을 뒤적이면서, 뜬금없이 따갈로그어를 고집한 교수의 별난 성정을 탓하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영어로는 술술 써지는 글이 따갈로그 말로는 억지로 꿰 맞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다이만 나무랄 일은 또 아닌 것이, 전공 서적이며 강의내용이 모두 영어인데 그걸 마땅한 전문용어도 없는 따갈로그어로 무조건 바꾸라고만 하니 누군들 고역스럽지 않겠는가. 생각해 보니 우리가 말레이시아에 머물 때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두로 몰려나와 큰 시위를 벌인 적이 있었다. 중고등학교의 수학, 과학 교과를 말레이어 대신 영어로 가르치기로 결정한 것에 반대하는 시위였다.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꼭 필요한 조치라는 정부의 입장에 대해, 사람들은 말레이어를 사양길로 몰아넣는 성급한 결정이라고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결국 시위대는 뿌연 최루탄 연기 속에 강제 해산되었고, 영어는 교육용 언어로 승격되어 보무도 당당하게 학교 안으로 진입하는 모양이었다. 말레이시아에서 제 2의 부다이가 나타나는 일은 이제 시간 문제다. 자국어로는 더 이상 수학이나 과학에 관한 표현을 쓰지 않을 테고, 그렇게 말은 점점 잊혀져 갈 것이며, 뒤늦게 그것을 지적하는 어른이 나타난다고 해도 아이들에게 괜한 불평을 살 뿐이다.
그러나 경쟁에서 밀려나 타의로 삶을 단축해야 하는 언어의 문제는 좀 다르다. 더구나 그 경쟁을 부추기는 것이 국가와 자본 권력이라면, 이것은 단지 언어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공산이 크다. 경쟁에서 밀려난 언어의 최후는 경쟁에서 밀려난 문화, 경쟁에서 밀려난 사회 그리고 경쟁에서 밀려난 인간들의 최후를 동반하게 될 것이며, 우리는 머지 않은 때에 삶의 모든 다양성들을 뒷산에 묻고 똑같은 얼굴로 밋밋하게 살아갈지 모른다. 그런데 이 모든 사유를 뒤로 한 채 나는 여전히 영어를 끌어안고 뒹구는 중이다. 핑계는 끝이 없다. 에니그마타의 친절한 보수주의자 빈센트와 트랜스젠더 논쟁을 계속해야 하고, 마마로사의 깊고 단단한 세계를 온전히 들여다보기를 원하며, 여행길 오며 가며 만나는 이들과 속을 터놓고 사는 얘기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 우리 딸들이 예 혹은 아니오 대신 굽이굽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으면 좋겠고, 어미 귀에 대고 속삭이는 곱고 어여쁜 얘기들을 이곳 친구들과도 조곤조곤 나눌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남들이 다 영어를 쓰니 별수 없이 나도 써야겠다는 거다. 그게 왜 하필 영어인가는 차치하고, 영어를 그저 소통을 위한 공용어로 삼은 채 저마다 제 빛깔로 힘껏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한 것인가. 아, 나 같이 단순한 인간이 살아가기에 이 세상은 너무도 겹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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