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다>는 개인의 입체적인 경험을 통해 ‘여성의 삶’을 반추해보는 생활문학 칼럼을 개설했습니다. 필자 윤춘신님은 50여 년간의 생애를 돌아보며 한부모로 살아온 삶 이야기, 어머니와 할머니와 외숙모 이야기, 일터 이야기, 그리고 딸과 함께 거창으로 귀농한 현재이야기를 들려줄 것입니다. -편집자 주
외숙모가 올해 환갑의 나이라고 한다. 나하고의 나이 차이를 셈해보다가 아득해지고 말았다. 고작 스물 갓 넘은 나이에 시집을 온 외숙모 얼굴을 곰곰이 생각했다. 냉이를 캐겠다고 호미질을 해놓은 밭두렁이 움푹 패듯이 외숙모 얼굴도 얽어 있었다. 그 얼굴 위에 찌그러진 족두리가 얹혀졌다. 윗목에 자리 잡은 까만 궤짝 속에서 족두리를 꺼내 만지작거리다 망가트렸다는 말을 지금도 하지 못하고 있다. 어릴 때 약을 잘못 먹었다는 삼촌은 마루 끝에서 한종일 해바라기만 했었다. 단 한 마리뿐인 돼지 먹일 음식 찌꺼기조차 부족했던 외가에서는, 역전 병원 집에서 나오는 구정물을 날마다 받으러 가곤했다. 장대에 낀 구정물 통은 앞서 걷는 할머니 쪽보다는 팔 짧은 어린 계집아이 쪽으로 기울곤 했다. 두 팔로 장대 끝을 붙잡고 오는 내내 씨근덕거렸다. 삼촌의 두 다리가 마루에서 흔들거리고 그 아래에는 영락없이 자고 있는 누렁이가 있었다. 내 돌팔매질에 누렁이가 깨갱거려도 웃기만 하는 삼촌이 야속했다. 할머니와 매파 할머니의 수군거림을 호롱불 아래서 듣고 있었다. ‘쪼깐 모자라서 그렇지 암시랑토 않다’는 할머니와, ‘얼굴만 곰보일 뿐이지 살림은 야무지게 잘할 것’이라는 매파할머니가 날을 잡자는 언질을 했다. 만날 앉아만 있던 삼촌이 푸른 사모관대를 갖추고 혼례를 치르는 날. 색시가 얼굴만 곰보가 아니라 빙신이라는 말이 사람들 입에서 흘러나온 채 수채 구멍 속으로 빠져 나갔다. 장가든 후에도 삼촌은 앉아만 있었다. 들일을 마치고 기우뚱거리며 돌아오는 숙모가 보일라 치면 ‘응’ 소리를 내며 머리까지 끄덕이곤 했다. 숙모의 한쪽 팔은 일자로 곧게 펴진 채 손목만 움직이는 손으로 호미질을 하고, 반대편 팔은 초승달처럼 휘어진 채 길이마저 짧아서 밥을 먹을 땐 머리가 기울고, 발목이 옆으로 돌아간 굽은 다리로 보리방아를 찧고, 성한 다리 하나에 꿰찬 파란 슬리퍼 바닥은 절반이 닳아 있었다. 조막만한 손으로 집안일을 거들던 손이 편해지자 할아버지 옆에 달라붙어 고자질을 해댔다. 노란 양은도시락에 척하니 들어 앉아 있던 김치대가리를 그대로 들고 돌아와 뚜껑을 열어 보였다. 김치대가리는 안 먹겠다며 눈물이 그렁해진 나를 두고 숙모는 애가 터져 죽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말대꾸를 하도 해 싸서 패주고 싶어도 시누 딸년이라 그러지도 못했다며 호방하게 웃어 주었다. 절뚝거리는 숙모다리가 안절부절 못할 때가 더러 있었다. 내 키만 한 까까머리 사내아이 머리꼭지가 보일 때면 뒤란으로 숨어들었다. 누나 배고파서 왔어 라는 말이 들리는 날에는 보리쌀 한 움큼을 싸서 들려 보내기도 한다. 개다리소반에 차려진 밥상머리에서 숙모에게 물어 보았다. 숙모 아까 온 애 누구예요 라고 물을 때면, 숟가락을 내려놓은 채 꽁보리밥조차 먹지 못하고 정지로 나가 들어오지 않았다. 가지나물조차 설익은 것을 무쳤느냐는 할아버지 불호령은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끼니조차 연명하지 못하는 친정으로 며칠씩 내쫓김을 당하기도 했다. 항아리속 보리가 절반으로 가라앉아서인지 가지나물 때문인지 어린 내가 알 턱이 없다. 다만, 할아버지 가지나물 타령은 꽤나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때. 배고파서 찾아온 숙모의 남자동생이 누나 환갑잔치를 해준다고 한다. 엄마는 숙모 동생이 제법 돈도 많고 성공했다는 말에 의기양양해졌다. 거 봐라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집 친정을 얼마나 도와준 줄 아느냐며 자신들이 베푼 은공을 받는 것인 양 행세를 하고 싶어 하는 눈치다. 숙모는 두 아들을 두었다. 서울에서 번듯한 직장에 다니고 결혼해 일가를 이루어 용돈도 꼬박꼬박 보낸다는 말을 듣고 삼촌이 복이 많다고들 한다. 삼촌에게 흘러넘치는 복은 누군가의 희생이 전제된 것이니, 그 복을 복이라 말하기 참으로 계면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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