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보다는 사람을, 사진 찍기보다는 이야기하기를, 많이 돌아다니기보다는 한 곳에 오래 머물기를 선택한 어느 엄마와 세 딸의 아시아 여행기입니다. 11개월 간 이어진 여행, 그 길목 길목에서 만났던 평범하고도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인도네시아 아체①
평화활동가들과 교사들이 모여 이야기 나누는 모임에서 아체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한때 아름다운 왕국이었던 아체는 네덜란드 식민치하에 있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네시아로 합병되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독립을 되찾기 위한 싸움을 해왔다. 인도네시아 정부군에 의해 고문, 납치, 살해된 아체 사람들의 주검이 날마다 쌓여갔다. 2004년 겨울, 그 위로 검은 파도 쓰나미까지 덮쳐왔다. 아체는 그렇게 뿌리째 뽑혀 세상 앞에 나동그라졌다. 쓰나미로 집과 부모와 친구들을 순식간에 잃고 덩그러니 남겨진 아이들의 처지는 더 아득하였다. 아체에 머물고 있던 평화운동단체 ‘개척자들’(The Frontiers) 활동가들은 아이들에게 당장 한 조각의 빵을 쥐어주는 대신 꿈과 친구들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그 생각에 깊이 공감하여 우리 반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전하였고, 아이들은 먼 곳의 친구들을 향해 편지쓰기를 시작하였다. 내가 아체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본 것은 마을 깊숙이 밀려들어와 있는 엄청난 크기의 배였다. 항구에 매어 있던 이 거대한 배는 쓰나미에 떠밀려 근방의 집들을 모조리 쓸며 여기까지 들어와 그대로 마을 안에 박혀버렸다. 헛헛한 마음으로 돌아보니 주변에는 외국 구호단체들이 허겁지겁 지어준 새 집들이 똑같은 모양새를 하고 단조롭게 줄지어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부모와 동생들을 잃은 오누이 프레자와 울파를 만났다. 멀리 할머니 댁에 가있어 화를 면한 울파와는 달리 오빠 프레자는 쓰나미의 물결 속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고 했다. 아이의 얼굴과 몸 여기저기 깊이 패인 흉터에 자꾸 마음이 쓰였다. 열다섯 살이라던 녀석은 해질 무렵이면 집 앞에 나와 앉아 자원봉사자들이 두고 간 기타를 끼고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그로부터 두 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아체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아이들은 나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그런데 다시 찾은 아체는 조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직 바다로 돌아가지 못한 배가 마을 한 가운데에 여전히 버티고 있었지만 어수선하던 주변은 말끔히 정리되어 쓰나미 공원으로 조성되었고, 길가 어디서나 마주치던 장총을 멘 인도네시아 군인들이나 군용트럭들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정부군에 맞서 아체 독립투쟁을 이끌던 자유아체동맹(GAM) 사람들 중 여러 명이 지역선거를 통해 정치권에 편입되었다는 소식도 들렸다. 완전독립의 기치를 내려놓는 대신 자치권과 경제적 이권을 얻는 것으로 오랜 분쟁의 가닥을 잡은 듯하였다. 아체 독립군들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군사훈련을 하던 언덕에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염소를 분양해주는 외국 NGO의 염소은행이 들어서있었다. 총을 마주대고 숨죽이며 살던 시절의 흔적은 이제 어디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프레자(Freza)를 다시 만났다. 작은 키도, 앳된 생김새도 2년 전 그대로였다. 올 봄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는 아이는 친구들과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친구들 중 한두 녀석은 눈빛이 흐리고 말이 어눌하면서 계속 웃기만 하였다. 나중에 들으니 여기선 대마초가 흔하여 아이들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서먹하게 웃는 프레자에게 이번 평화학교 교사를 같이 하면 어떻겠느냐고, 너처럼 영어 잘 하는 사람이 꼭 필요하다고 자꾸 졸라댔다. 사실 인도네시아에는 영어 잘 하는 사람이 가뭄에 콩 나듯 하였다. 평화학교 교사로 참여한 대부분의 인도네시아 대학생 청년들도 영어를 거의 할 줄 몰랐다. 말레이시아나 필리핀에서는 여태껏 영어만으로도 불편함 없이 소통하며 살았는데, 인도네시아에서는 ‘바하사 인도네시아’(인도네시아어)를 모르고선 물건 하나 사기도 어려웠다. 다른 도리가 없던 외국인 청년들은 틈틈이 인도네시아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당장 아이들을 만나 수업을 하기 위해서라도 간단한 말들을 익혀야 했다. 그런데 나는 영어사용자들이 새삼 궁지에 몰리는 이 상황이 꽤나 유쾌하였다. 인도네시아에 왔으니 인도네시아 말로 얘기하려 애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고 아닌가.
평화학교는 플라우아체(PlauAceh)라 불리는 조그만 섬에서 열렸다. 수마트라 본섬에서 다시 배를 타고 먼 바다로 좀 나아가야 했다. 그 곳에서 교사들은 다시 세 팀으로 나뉘어 학교가 있는 마을마다 흩어져 머물렀다. 나는 작은 딸아이 둘을 데리고 초등학교가 있는 말링게 마을로 가게 되었다. 큰 아이 써니는 또래 친구들이 있는 다른 마을로 손을 흔들며 떠났다. 여행 중 이렇게 오래 떨어져 지내는 것이 처음이라 속으로 걱정을 쌓아가고 있는데, 아이는 홀가분한 얼굴로 쌩 하니 가버렸다. 대신 나의 바람대로 프레자가 우리 마을 평화학교에 합류하게 되었다. 비워지고 채워지는 것, 어느 것도 내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말링게(Malingge)는 쪽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거나 산비탈에 고추를 심어 키우거나 뒤꼍에 닭과 오리들을 키우며 오종종하게 살아가는 작은 해안가 마을이었다. 마을 안에 딱 하나 있는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서른 명 남짓 되었는데, 크고 작은 아이들을 얼추 둘로 나누어 한 명뿐인 선생님이 두 교실을 오가며 근근이 수업하고 있었다. 혼자 애면글면하던 자그만 체구의 여선생님은 우리를 한껏 반기며 아이들 수업시간을 몽땅 내어줄테니 뭐든 해보라고 했다. 살림이 좀 넉넉해 보이는 ‘바박’(bapak, 원래 바박은 아버지란 뜻인데, 때로 연배가 높은 남자어른을 칭하기도 한다)네 집에 방 두 개를 빌려 교사들 짐을 풀었다. 안주인 ‘이부’(ibu, 역시 어머니라는 뜻이지만 가까운 사이의 아주머니를 부를 때 쓰기도 한다)는 우물물을 길어다 야채를 씻고 나무로 불을 때서 밥을 쪄내었다. 살림이 정갈하고 음식솜씨가 좋은 이부 덕분에 우리는 갖가지 인도네시아 가정식을 맛보는 호사를 누렸다. 말링게 평화학교 여덟 명의 교사들이 첫 회의를 하러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대만,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한국에서 제각기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교사보다는 학생에 가까워 보이는 어린 얼굴들이 대부분이다. 방과 후 교사를 잠깐 해 본 적 있다는 휘뜨리(Fitri)와 고향마을에서 아이들에게 코란을 가르쳤다는 프루완또(Pruwanto) 그리고 나 정도가 아이들 앞에 서본 경험이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인도네시아 청년들인 휘뜨리와 프루완또는 영어를 전혀 할 줄 몰랐다. 나의 인도네시아어 밑천 또한 금세 바닥나 버렸다. 우리는 작은 일 하나를 결정하는 데에도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같은 얘기를 끝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수업은 당장 내일부터였고, 벌써 날이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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