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보다는 사람을, 사진 찍기보다는 이야기하기를, 많이 돌아다니기보다는 한 곳에 오래 머물기를 선택한 어느 엄마와 세 딸의 아시아 여행기입니다. 11개월 간 이어진 여행, 그 길목 길목에서 만났던 평범하고도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같이 나누고자 합니다.
인도네시아 아체②
한낮이면 덥고 습한 기운 때문에 숨이 훅훅 차올랐지만 여교사들은 교실 안에서 아이들처럼 히잡을 쓰기로 하였다. 꼭 그래야 한다고 누가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고, 더 솔직하게는 우리는 너희들 친구니까 부디 친하게 지내줘 하는 마음이 컸다. 아무리 그래도 도저히 긴 팔 옷은 입을 수 없어 스카프로 머리를 가리는 것까지만 하기로 했다. 좌충우돌하던 수업도 제자리를 잡아갔다. 교사들이 네 명씩 짝을 이뤄 큰 아이들과 작은 아이들 교실로 각각 들어갔고, 서로 돌아가며 수업을 이끌었다. 인도네시아 말이 서툰 외국인 교사들이 영어를 섞어 쓰는 탓에 수업 통역이 필요했는데, 큰 아이들 교실에선 프레자가 그 역할을 자청하였다. 평화수업에 관한 여러 가지 조언이 담겨있는 교사용 교재를 참고해가며 저녁 늦게까지 수업준비를 하고 아침이면 졸린 눈을 비비며 학교로 뛰어가는 날들이 계속됐다. 아이들은 어설픈 교사들을 너그러이 봐주었다. 먼 곳에서 온 교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이것저것 접거나 만들기를 하며 재미있다고 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고 돌아갈 때면 일일이 교사의 오른손을 끌어다 자기 이마에 댄 채 무릎을 구부려 인사했다. 그게 어른들에게 인사하는 법이라고 했다. 나는 그 인사를 받을 때마다 황송한 마음이 들면서도 기분이 참 좋았다. 아이들의 이마는 작고 매끄럽고 따뜻했다.
나중에 아이들이 발표하는 걸 듣고는 좀 놀랐다. ‘쓰나미’가 무섭다고 쓴 아이들이 제일 많았고 그 다음이 독사, 전갈 순이었다. 몸집이 작은 나자리아는 코끼리라고 썼다. 귀신이나 유령이라고 쓴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나는 이 수업을 한국의 학교 아이들하고도 한 적이 있다. 아이들은 별별 귀신들의 이름과 식인괴물, 흡혈귀, 육식공룡, 빨간 마스크라고 썼었다. 거의 모두가 아이들 사이에서 회자되던 공포영화나 무서운 이야기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러니 그 두려움들은 삶 속에서 경험한 것이라기보다 어떤 이미지를 상상하여 만들고 번식시킨 것에 가깝다. 하지만 아체 아이들이 건져낸 두려움은 날것처럼 생생한 기억들이다. 등짝 서늘하였던 어느 한 때가 거기에 있었다. 아이들은 무서운 것을 써넣은 그 위엣 장에 연필을 꼭꼭 눌러 또 적었다. 쓰나미로부터 자신을 지켜주는 것은 알라(Allah)라고, 독사와 전갈로부터 나를 보호해주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삐뚤빼뚤 적어놓은 글자들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옆에다 꽃도 그리고 별도 그리고 알록달록 색도 칠하였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나면 잠시 쉴 틈이 생긴다. 젊은 교사들은 그 시간에 바닷가 산책도 하고 차가운 음료수를 사먹으러 다니기도 하였다. 결코 젊지 않았던 나는 시원한 방바닥에 등을 대고 낮잠을 자곤 했다. 내가 한낮 무더위에 맞서 고요한 전투를 치루는 동안 작은 딸아이들은 집 안팎을 돌아다니며 놀았다. 아이들도 오전에는 인도네시아 말링게 초등학교 최초의 외국인학생이 되어 학교에 다니는 중이었다. 우리가 방을 빌려 쓰고 있는 바박(bapak, 아버지라는 뜻이지만, 나이 많은 남자어른을 칭하기도 한다)네 집에는 동물들이 많았다. 닭이며 오리, 개나 고양이 외에도 거위가 여러 마리 있었고, 깜삥(kambing)이라 불리는 귀가 축 늘어진 염소도 대여섯 마리나 되었다. 막내 짜이는 동물과 대화가 좀 되는 녀석이라 첫날부터 신이 났다. 어느 날은 보니까 바박네 집 몇 십 마리 동물들에게 전부 이름을 지어놓고 저 혼자 챙겨 부르고 있었다. 염소들도 내 보기엔 다 그 놈이 그 놈인데, 아이는 하나하나 이름을 구별해 부르며 골고루 풀을 먹이느라 때마다 골똘하였다.
우리 부모는 오래 전에 이혼했어. 돈 벌러 멀리 가야 했던 엄마 때문에 한동안 어린 형제들끼리 살아야 했어. 고등학교 때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 적도 있어. 그래서 자살을 하려고도 했었어. 지금은 괜찮아졌지만 예전엔 좀 힘들었던 거 같아. 갑자기 침묵이 흘렀다. 누구도 뭐라 말을 꺼내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그때 구석에 앉아있던 프레자가, 나 말해도 돼? 하였다. 프레자는 교사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막둥이였다. 아인, 나도 그랬어. 나도 죽으려고 계속 바닷가에 앉아있었어. 엄마, 아빠, 동생들이 쓰나미로 다 죽고 여동생 울파하고 나만 남았었어. 나는 그 때 열두 살이었어. 나도 그냥 죽고 싶었어. 진짜 죽으려고도 했었는데 자꾸 울파 생각이 나는 거야. 나는 좋은 오빠도 아니고 매일 싸우기만 하는데도 울파 때문에 죽지를 못 했어. 아인처럼 나도 지금은 살기를 잘한 거 같아. 그냥 네 얘기를 들으니까 그 때 생각이 났어. 우리는 말없이 한참을 앉아 있다가 조용히 옆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는 잠을 자러 갔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아인 때문인지, 프레자 때문인지, 부모님 일찍 여읜 내 설움에 겨워서였는지 분명치 않지만, 혼자 잠깐 울었던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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