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여성의 몸 이야기> 연재는 외면하기, 직면하기, 비교하기, 수용하기, 강점 찾기, 표현하기 등 장애여성이 자신의 몸에 반응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타자화된 장애여성의 이미지를 뛰어넘어, 우리 자신의 언어를 통해 장애여성의 삶을 재구성하려는 데 의의가 있다. – 편집자 주
문득 몸에 갇히다? 한 유명인이 TV에서 “자연스럽게 거리를 돌아다니는 기분이 궁금하다”고 말한다. “음, 나도 궁금하네...”하며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를 걸을 때, 남의 시선이 신경이 쓰이는 것은 나와 비슷한가 보다. 다른 점은 그녀는 너무 ‘예뻐서’일 것이고, 나는 '장애' 때문이라는 게다. 그런데 요즘 내 느낌은 좀 다른데, 누가 실제로 쳐다보지 않고, 누가 쳐다본다는 느낌을 받지도 않는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것은 단지 나의 느낌이다. 자체 검열 중인가? 암튼 시쳇말로 ‘혼자 영화 찍고 있는 중’이다. 내 몸의 움직임도 너무 생생히 느껴진다. 목발을 짚고 걷고 있고, 흔들리고 있고, 오른쪽 발을 딛지 않고 그저 무겁게 들어 옮긴다. 몸무게가 늘어 걷기가 더 힘들어져서일까? 예전에는 어땠을까? 대개 무의식적으로 걷거나, 다른 생각에 빠져 있어 내 몸은 별로 의식되지 않았던 듯하다. 이런 몸의 새로운 느낌을 표현하기는 어려운데 유쾌하지는 않다. 장애가 있는 내 몸에 갇혀버리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곧 지나가겠지’ 하면서도 약간의 불안감이 맴돈다. 최근에 몸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가져서일까? 다시 비장애인들(날씬하고 예쁘고 젊은 여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일까? 그런데 며칠 전 이런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찾은 척하면서 불안을 떨어내고자 하는 욕망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내 몸이 나름 충분히 자유로웠던 상황을 떠올리자, 그때 몸의 느낌이 함께 기억났다. 여행에서 얻은 몸의 자유
특히 외국에 몇 번 짧은 일정으로 갔을 때 그랬다. 목발을 짚은 몸에서 휠체어를 탄 몸으로 종종 변신한다. 국내에서는 시간, 교통수단, 도로 상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휠체어를 이용하지 않는데, 편의시설 등이 잘 갖추어진 국가에선 거부할 이유가 없다. 언젠가 해질 무렵 전동휠체어를 탄 이들, 수동휠체어를 탄 이들이 모여 우르르 근처 항구로 산책을 나섰다. 항상 전동을 사용해 온 이들은 더욱 거침이 없다. 그래서 간만에 수동휠체어의 몸이 되어 전동휠체어 뒤에 손잡이를 잡고 몸을 맡긴다(기차놀이 같기도 하다). 손수 휠체어를 밀지 않아도 되니 팔도 아프지 않을 뿐더러 속도감도 있어 좋다. 눈에 확 띄는 ‘이상한’ 몸들이 여럿 몰려 다녀도 전혀 따라붙는 시선이 없다. 어쩌면 우리에게 시선 따위는 알 바 아닌 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한 번은 강변을 따라 길게 뻗은 자전거길을 따라 전동휠체어를 타고 달렸다. 평소에도 바람을 좋아하는 터라,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달렸던 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길가의 버드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자동차 안에서 느끼는 속도감과 바람과는 사뭇 달랐다. 평소에 막연히 상상해보던 뛰거나 자전거를 탈 때의 느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 단편적인 기억들을 떠올리자니 다시 웃음이 실실 흘러나오고 몸이 근질근질하다. 비장애인의 눈으로 본다면, 혹은 ‘정상’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보자면, “에게게..” 할 수 있을 정도의 움직임일 수도 있다.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타거나 모두 손상된 몸의 제한된 경험일 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냥 내 기분에 따르면, 평소와는 다른 한 순간의 몸의 자유를 느낀 것이다. 비장애인의 몸이 되어 본 적이 없으니 비교는 어렵겠지만, 아무튼 내 경험상으로는 최고였다. 목발을 짚었을 때는 불가능한데 휠체어라는 기구를 이용해 비장애인 몸에 조금 더 가까운 속도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렇다면 영화 ‘아바타’에서처럼 장애가 있는 몸을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에까지 이르게 되지 않을까? 글쎄 단순히 몸의 기능적 향상만의 작용은 아닌 듯하다. 몸의 움직임을 즐기는 법을 터득하다 내 몸에 꽂히는 시선 또는 꽂힐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의 자유로움도 빠뜨릴 수 없다. 한국에 있을 때도 보기 어려웠던 뮤지컬을 몇 년 전 외국에서 보았다. ‘맘마미아’였는데, 물론 영어라 이해가 안 되니 내용도 대충 이해하며 보았지만, 노래와 춤에 한껏 빠져들어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까지 화끈거렸다. 끝난 후 극장 앞에서 우리 일행은 평소 피우지도 않던 담배를 빌려 함께 피웠다. 피우던 담배 맛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수많은 인파 속에서 낄낄대며 내품던 연기 속에서 맛보았던 그 흥분은 짜릿하게 남아 있다. 아는 사람이 없는 지리적으로 먼 공간이 주는 해방감, 잘 갖추어진 편의시설, 사람들에 대한 편안한 느낌들이 더해져 가능한 일이다. 멀리 공간이동을 하지 않더라도 장애인들끼리 있을 때 느끼는 편안함 속에서의 자유도 흔히 한 몫 한다. 오래 전 한 장애여성 캠프에서, 야외에서 한 밤중까지 춤추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다. 모닥불도 있었던 듯하고 리듬에 맞춰 춤을 추었다. 기억이 어렴풋하지만 나는 목발로 스텝을 꽤 잘 밟았었다. 그 전에 나이트에서 한 번 춤추었을 때 박수를 치며 상체만 움직였던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목발을 움직이면 내 몸은 불안정해지지만 그 불안정이 곧 흥을 이끌었다. 내 뜻대로 몸이 움직여 주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누구에게 어떻게 보일지도 상관없었다. 몸의 움직임을 느끼는 그 자체를 즐기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내 몸이 자유를 느낄 시간과 공간을 찾아서 ‘나도 이렇게 자유로운 몸으로 느껴졌던 순간이 분명 있었구나!’ 그때의 느낌을 떠올리면서, 요즘 들어 ‘내 몸에 갇힌 이 이상한 느낌’이 계속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줄일 수 있었다. 일상적으로 내 몸의 장애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되기도 하고, 또 문득 나를 더 장애화하는 제약과도 만나기를 반복한다. 그리고 가끔은 자유로움을 느낄 수도 있음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 있다.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기억을 더듬기보다 어떤 방식으로든 내 몸의 자유를 느낄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가는 것일지 모른다. 내 몸도 나름대로 충분히 자유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었다. 그러니 자꾸 ‘몸에 갇힌 느낌’만 부정적으로 생각되며 과장되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맘을 다잡기에만 몰두하지 말고, 잠시 내 몸의 긴장을 풀어줄 만한 숨 쉴 곳, 내 몸의 자유공간을 어디에서 찾을지나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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