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에 걸려도 웃고, 화가 나도 웃고
"넌 웃는 모습이 예쁘니까, 항상 웃어야 돼!" 초등학교 때 나를 무척 귀여워 해주시던 선생님께서, 내가 서울로 전학 가던 날 당부하신 말씀이다. 선생님 말씀 잘 듣는 착한 모범생이었던 나는 정말로 그러자고 다짐했고, 실제로 그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몰라도 다른 사람보다 잘 웃고, 또 밝게 웃는 사람이 되었다. 확실히 난 웃지 않으면 B사감만큼이나 차갑고 엄격한 인상이긴 하다. 그렇다고 웃음이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까지 웃을 필요는 없는데, 정신 차려 보면 어느새 속없이 웃고 있었다. 몸살에 걸려도 웃고, 화가 나도 웃고, 실연당해서도 웃었다. 아무리 웃는 얼굴이 예쁜 사람이라도 늘 그렇게 웃기는 힘든 일이다. 그런데 난 강박관념처럼 웃었다. 어느 누가 웃는 얼굴을 싫어할까마는, 예의 조언을 해주셨던 선생님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밝게 웃는 장애인의 모습에 기뻐한다. 아무 문제없어 보이는 밝은 웃음을 보면 세상이 장애인에게도 평등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그래서 그 웃는 모습을 보면서 죄책감을 덜어내는 건 아닐까 하는 심술궂은 음모론을 풀어보는 건, 물론 내가 장애인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니까 더 열심히 일하라?
저질 체력에 무리해가면서 일해 놓고도 매일매일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상사에게 "굿모닝/굿애프터눈/굿나잇" 인사를 바쳤다. 장애인이기 때문에 더욱 "몸이 너무 힘들어서 오늘은 일찍 퇴근하고 싶습니다"라는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러기엔 어쩐지 자존심 상했다. 그래서 비명을 지르며 휴식을 외치는 몸의 요구를 무시하고 캔디처럼 씩씩하게, 로봇처럼 묵묵히 일했다. 하지만 난 결국 난 장렬히 전사.......가 아니라 퇴사했다. 이런 일을 겪은 장애여성이 역시 나 혼자만은 아닌 것 같다. 지난 6월, 장애여성 리더양성 프로그램에 참여해 일본 연수를 다녀왔다. 한국과 일본 장애여성 리더들의 대화에서 자립, 연애, 결혼, 임신/출산, 취업 등 사회생활에서 겪는 거의 모든 일이 이슈가 되었는데, 역시나 직장에서 "장애인이니까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는 문제도 논의가 되었다. 자신의 몸 상태를 무시해가면서까지 무리해서 일하지는 말자는, 당연하지만 실제로는 지키기 어려운 결론이었다. 물론 쉬고 싶을 때 쉬고, 배고플 때 밥 먹는 직장인은 비장애인 중에도 거의 없다. 하지만 생리 때도 아닌데 하루 세 번 조제된 진통제를 챙겨 먹어야 하는 허약한 몸으로, 비장애인 이상으로 일하며 힘든 척도 못하는 기분은 조금 더 서러웠다고 주장하고 싶다. 결국 3개월 동안의 직장생활은 심한 근육통과 위장장애, 불면증, 괴물 같은 여드름 등의 상흔을 몸에 남겼다. 그리고 결국 경력으로도 안 쳐줄 근무기간동안 내 몸 하나 소중히 여기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마음에 남았다. 웃다 보면 웃을 일이 생길 수도 격무에 시달리지 않더라도, 현대 사회를 살아내기 위해선 어느 정도 몸을 옥죌 수밖에 없는 것 같다. 8시간 이상 책상 앞에 앉아만 있다 보면 허리 및 관절에 많은 무리가 가지만,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으니 파스를 더덕더덕 붙이고 일한다. 장애여성이건 비장애여성이건 배가 나오면 유죄이므로 식사량도 신경 써서 조절한다. 나 같은 경우 아무리 더운 날씨라도, 몸에 비해 너무 가늘어서 '비정상'적인 다리를 자랑하고 다닐 순 없으니 핫팬츠나 미니스커트 대신 롱스커트나 긴바지를 입는다. 동물처럼 본능에 충실히 살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라면 필요 이상으로 몸을 억압하는 건지 모른다. 그리고 웃음이 나오지 않는데도 밝게 웃는다. 입꼬리를 올리는 이 간단한 동작으로 내 기분과 마음상태까지 기만한다. 누구에게나, 생각이란 몸의 미묘한 변화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몸이 아플 땐 저절로 우울한 생각이 든다. 아픈 날이 더 많은 요즘은 별다른 일 없이도 우울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불행하거나 불평불만이 많은 장애인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웃고 있다. 그래서 가끔은 백화점 직원이나 승무원처럼 "감정노동" 하시는 분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퇴사하고 나서 쉬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결국 내게 달린 문제인데, 다른 사람을 필요 이상으로 의식해 가식적으로 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직장에서도 장애인이란 이유로 소외될까 두려워서, 누가 걱정하고 신경 쓰지 않아도 혼자 잘 살아가는 씩씩한 장애인이 되고 싶어서 난 내 몸과 마음을 혹사시키고 있었다. 몸이 불편하다는 것 때문에 꼭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배려를 받을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몸을 무리할 필요도 없었다. 혹시나 이게 나 스스로도 "나는 모자란 사람이야"라고 생각했다는 증거는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웃고 싶지 않아도 웃는 버릇에 대해선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트랜스젠더의 이야기를 다룬 "헤드윅"이라는 뮤지컬이 있다. 성전환수술에 실패해 "분노한 1인치"가 남는 바람에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게 된 주인공은 굴곡이 심한 삶을 살아내면서, 비참한 상황에서도 소리 내어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우는 것보단 낫잖아요?" 헤드윅만큼이나 굴곡진 삶을 살면서도 곱게 자란 인상이신 우리 어머니가 항상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웃을 일이 있어서 웃는 게 아니라 웃다 보면 웃을 일이 생기는 걸 수도. 이젠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웃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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