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태어나는 순간

장애여성 몸 이야기⑯ 정체성 찾기

백발마녀 | 기사입력 2010/09/16 [06:27]

새로 태어나는 순간

장애여성 몸 이야기⑯ 정체성 찾기

백발마녀 | 입력 : 2010/09/16 [06:27]
<장애여성의 몸 이야기> 연재는 외면하기, 직면하기, 비교하기, 수용하기, 강점 찾기, 표현하기 등 장애여성이 자신의 몸에 반응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타자화된 장애여성의 이미지를 뛰어넘어, 우리 자신의 언어를 통해 장애여성의 삶을 재구성하려는 데 의의가 있다. – 편집자 주
 
“왜 장애인을 부려먹고 그래”
 
한 달여 전쯤 어느 주말의 일이었다. 몸살 기운이 있어 잠을 설쳤기에 일찌감치 병원에 다녀오는 길에 친정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큰언니가 다니러 왔다는 소식과 함께 혹시 마트 근처에 있으면 옥수수 좀 사오라는 말씀이었다. 병원 옆에 있는 청과가게에서 옥수수를 사가지고 전동휠체어를 탄 채로 부리나케 한동네 살고 계시는 친정엄마집으로 갔다. 친정엄마가 살고 있는 빌라에는 휠체어가 접근할 수 없기에 입구에서 전화를 걸었고 큰언니가 내려왔다. 언니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마침 마트 근처에 있었나보네?"
"왜 멀쩡한 사람들 둘이 장애인을 부려먹고 그래?"
"그냥 혹시나 하고 전화했는데, 네가 사올 수 있다니까……."

 
순간 언니는 몹시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나중에 엄마로부터 확인한 바로도 두 사람 모두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고 했다.
 
내게 무언가를 부탁할 때 우리 가족에게 나는 그저 딸이자 동생으로서 아랫사람일 뿐 내 장애는 고려되지 않는다. 그리고 평소에도 장애가 있는 내가 가족의 보살핌을 받기보다 그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이 더 많다. 보통의 사람들은 장애가 있는 사람이 가족들에게 보살핌을 받으며 살 것이라고들 쉽게 생각한다. 물론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긴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나는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기는커녕 그들의 뒤치다꺼리를 하게 되었다. 그것은 장애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는 엄마의 철학 때문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그 이상 때문에 엄연히 다른 몸의 조건이 고려되지 않은 채 나는 힘겨운 역할들을 감당해야 했다. 그것은 평등이 아니라 장애를 오로지 개인의 몫으로만 감당하게 만드는 차별이었다.
 
가족에게 진 빚
 
나로서는 매우 불평등하다고 여겨지는 그런 관계가 형성되게 된 건 성장과정 내내 내가 가족, 특히 형제들에게 진 빚 때문이었다. 엄마는 어려운 형편 가운데에서도 장애가 있는 딸인 나를 대학까지 보내느라 자신을 희생하였으며, 언니들과 여동생은 나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직업전선에 나서야 했다. 나는 평생토록 그 빚을 갚아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들의 (나로서는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요구에도 떳떳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끌려 다녔던 것 같다.
 
그런 내 입에서 "왜 장애인을 부려먹느냐?"는 말이 나온 건 처음이었다. 그 말을 내뱉기 전까지 나는 (적어도 가족들에겐) 장애인도 장애여성도 아니었다. 그저 가족들의 희생을 딛고 공부를 많이 한 덕분에 사회활동을 활발히 하는 엘리트여성일 뿐이었다.
 
그러므로 대학을 포기하고 자그마한 회사의 경리생활을 하며 꼬박꼬박 월급을 모아 동생의 학비를 대주어야 했으며, 결혼 후 자녀양육을 어느 정도 마치고 돈벌이에 나서도 학습지교사조차 할 수 없는 언니들과 나는 완전히 달라야 했다. 그런 이유로 대학졸업 후 취업을 하지 못하고 백수생활을 할 때도 나는 죄인처럼 지냈으며, 직장생활하면서도 힘들다 고달프단 소리 한번 입 밖에 내보지 못했다.
  
나는 장애여성이다
 
▲ 가족들에게 "나는 장애인"이라고 말함으로써  가장 뛰어넘기 힘든 대상이었던 가족과 화해를 할 수 있었다.     ©김유미
그런 내가 드디어 가족 앞에서 "나는 장애인"이라고 말해버렸다. 그리고 가족들도 내가 장애인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내게 미안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단 한마디로 깔끔하게 정리될 줄 알았다면 진작 토설해버릴 걸 왜 지금까지 혼자서만 벙어리 냉가슴 앓았는지……. 왜 나만 줄곧 가족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생각하며 미안해하고 죄책감에 시달려왔는지……. 나는 어쩌면 그 한마디로 스스로를 장애여성으로 정체화하면서 가장 뛰어넘기 힘든 대상이었던 가족과 화해를 한 셈인지도 모르겠다.

 
그 계기는 개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장애여성은 스스로가 장애여성임을 깨닫고 "나는 장애여성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부터 새로 태어나게 된다. 일례로 미국 시카고의 여성 사업가인 주디 레이스의 일화를 소개할까 한다. 그녀는 휠체어 사용자로서 꽤 성공한 여성 사업가였는데, 교통수단과 관련한 모임을 하던 중 관련기관 전문가들과 마주한 자리에서 “너희 장애인들”이라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주디 레이스는 그때를 가리켜 자신이 새로 태어난 순간이며, 여성 사업가로서의 주디 레이스의 관점이 무너진 순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주디 레이스의 경우처럼 장애여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은, 장애여성이 장애여성 자신으로 새로 태어나는 순간이라 할 수 있다.
 
내가 활동하고 있는 단체에는 비교적 경증의 지체장애로 보조기구 없이 보행이 가능했었지만 허리 디스크 수술 이후 중증이 된 활동가가 있다. 적극적인 성격 탓에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직장생활도 열심히 했지만, 몸의 조건을 외면하고 너무 열심히 산 탓인지 허리 디스크에 걸려 고생을 하게 되었고 급기야 수술을 받기에 이르렀다. 수술 후 디스크의 통증에서는 벗어났지만 그녀에게는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주변사람들은 물론이요, 가족들조차 중증이 된 그녀의 몸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당사자조차도 허리를 제대로 구부리지 못해 걸레질도 못하게 되고, 목발을 짚어야만 걸을 수 있게 된 자신의 몸에 익숙하지 않다. 그러니 가족과 친지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계단을 오르내릴 땐 목발 사용이 익숙지 않아 누군가 한쪽 목발을 들어주어야 하는데, 목발을 짚고 그냥 올라오라고 말하거나 계단을 다 올라갔는데 들어주었던 목발을 갖고 먼저 가버려 난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럴 때 자신이 장애인임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면 상대방은 몹시 당황한다. 이제까지 장애인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에 틀림없는데도, 그들은 그녀의 장애를 받아들일 준비가 조금도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이 정도이니 목하 중증장애인의 정체성을 갖게 된 그녀에게 세상은 참으로 녹록치 않을 태세이다. 장애여성이 스스로를 장애여성으로 정체화하는 과정은 과연 멀고도 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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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별똥별 2010/09/26 [22:42] 수정 | 삭제
  • 비장애인 친구를 만나면 늘상 듣는 소리가 있다 "넌 장애인 안 같애" 처음엔 나를 똑같이 봐준다는 생각에 이런 소리가 좋았다. 하지만 언제부터 뭔지 모르게 귀에 거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속으론 '나 장애인인데' 이 말이 너무 하고 싶었다. 허나 이 말을 내뱉고 남면 또 그들이 나를 친구가 아닌 동정과 시혜의 사회적 차별의 대상으로 볼까봐 겁이 나서 말하지 못했다. 이 글을 읽고 나 혼자만의 망설임이 아니었구나 안도가 먼저 간다. "나는 장애여성이다"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날까지 모두 화이팅.
  • 초이스 2010/09/25 [12:13] 수정 | 삭제
  • 길다면 꽤~긴 시간이었는데 이제서야 장애란걸 발산하셨군요. 물론 가족들이 모르는바는 아니지만 본인의 입에서 들었을때에 가족들은 충격이매우 컸을것같은 생각이 듭니다. 형제들이 장애인 나때문에 대학을 포기하고 또 장애인 나때문에 그 무엇을 포기하고 또 그무엇 등등....한 가정에 장애인이 있다면 그 가족들은 모든것을 포기하는것같다. 그래서 장애를 가지고 더 열심히 살아가려고 하고 장애를 잊고살면서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살아가려는 그 마음 그 무거운 짐을 무조건 나혼자 감당해야만 하는 장애인 이제는 나이도들어감에 지치고 힘듭니다. 이제는 내려놓을때가 된것같아요 힘내자구요 우리 장애여성분들이여 화이팅 합시다!
  • 미니꽃i 2010/09/24 [19:45] 수정 | 삭제
  • 장애인은 자신의 장애때문에 가족에게 피해를 주지않을까해서 더 많은일을 하려고 하는 경향이있습니다 가족들은 그런 행동을 장애가있어도 충분히 할수있는구나 하고 생각하고 다음부터 무심코 일을시키는 경우도 있고요 내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당당히 말하고 가족도또한 그부분을 이해해야 서로 오해하고 힘들어 하는일이 없을꺼 같아요..
  • grace 2010/09/19 [22:51] 수정 | 삭제
  • 그럼에도 시댁 식구들이란?
    장애여성을 절대 장애인 취급?을 안합니다.
    추석이나 명절이 돌아오면 맡이가
    명절을 준비하고 치뤄야 사람이라고 합니다.
    추도식도 있고.. 동서들이 있지만 직장이다 여행이다
    별별핑계 다 대고 음식도 안하고
    심지어는 명절이 가까워지면 신랑하고 싸웠다고 오지도 가지도 않고
    시어머니하고 신랑 애들만 보내니 혼자 일 다 해야...
    이런... 달을 가리키는데 손끝만 보았네요. 죄송.
  • 이쁜마누라 2010/09/18 [16:20] 수정 | 삭제
  • 장애인이 장애를 인정할 때야말로 진정으로 장애를 극복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간혹 장애를 갖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받아들이지만 다른 한쪽으론 부정하고 싶은 마음
    그것으로 말미암아 여러가지 혼란을 겪으며 그 가족들도 힘들어 하는 경우가 있다
    나 스스로 장애를 인정하고 그것을 가족들도 인정한다면 누구를 위해 희생했다는 생각보다는
    가족들이 함께 나누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한다.
  • 미소~ 2010/09/18 [10:13] 수정 | 삭제
  • 가족들은 처음부터 장애을 인정하고 가족으로 받아졌지만 말로 표현하지 않았는 것 아닌가싶다.말로 표현하면 더 약해지고 움추려들까봐 .....
    장애본인이 때로는 자신이 장애인임을 인정하고싶지 않을 때도있다.
    상대는 나를 완전히 알수없으니 내가 어떤일에 가능한부분과 불가능한 부분을 알려주는 것이 좋을 것같아요.
    변화된 몸에대해 본인도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걸리는데 상대방이야....
    장애인이기에 "못한다"하는 소리 듣지않을려고 넘 자신을 혹사시키지 않았으면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