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늙음’에 대한 시선

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36) 늙음에 대하여 ①

이경신 | 기사입력 2011/01/27 [00:42]

역사 속의 ‘늙음’에 대한 시선

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36) 늙음에 대하여 ①

이경신 | 입력 : 2011/01/27 [00:42]
오랜만에 장거리 여행에 나섰다. 외가의 친척 어른들을 뵐 생각이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후 거리를 핑계 삼아 한 번도 그 분들을 찾지 못했었다. 이제는 다들 연로하시다는 생각이 드니, 갑자기 마음이 초조해졌다.
 
난 기차 안에서 읽을거리로 도서관에서 빌린 두껍고 무거운 책, <노년의 역사(아모르문디, 2010)>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이상화된 정신적 노년, 저주받은 신체적 노년
 
▲ 조르주 미누아의 <노년의 역사> (아모르문디, 2010)
비록 서양의 역사를 관통해서, 그것도 고대부터 16세기 르네상스까지의 제한된 시기의 노년만을 분석해 쓴 것이긴 하지만, <노년의 역사>를 읽다 보면, 노년을 바라보는 시선이 극단적으로 대립적이다. 양극단의 편견 사이를 시계추 모양으로 오가는 느낌이다. 마치 여성을 여신과 마녀라는 두 시선에 가두는 것과 닮았다.

 
역사학자 조르주 미누아에 의하면, 예수 탄생 이전 구약성서에서나 유대사회에서 노인이 위엄 있는 존재로 존경받았던 것과 달리, 신약성서 속에서나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노인이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경멸받는 존재였다고 한다. 그런데 고대 그리스 사회와 중세사회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긍정적인 노년을 이상화된 정신적 측면과, 부정적인 노년을 체험된 신체적 노년과 결부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최고의 행복은 영원한 젊음에 있고, 노년이야말로 신의 저주였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젊은이보다 노인을 경시했던 당시의 사회문화적 편견을 그대로 수용해 노인을 부정적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즉, 신체의 노쇠는 정신의 노쇠를 가져오기 때문에, 노인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이고 까다롭고 소심하고 의심이 많고 비겁하고 수다스럽고 비관적이라 보았다. 그러나 철학자 플라톤은 이상주의자답게 현실적이고 체험적인 노년에 주목하기보다 노년 자체를 이상화해서, 나이가 들면 육체적 즐거움이 줄어드는 대신 정신적 기쁨이 늘어난다고 주장했다.

 
중세에 들어와서도 노인에 대한 상반된 견해는 계속된다. 그러나 선하고 현명한 자로서의 진정한 노인은 드물고, 대부분의 노인은 늙고 병들고 죽음을 기다릴 뿐인 무익한, 불행한 존재로 여겨졌다. 노년이란 죄의 대가로 주어진 신의 처벌로서 개인적 비극에 불과했다. 비록 백발을 지혜의 표시로 간주하긴 했어도, 늙고 추한 외모는 기본적으로 죄의 표시로 바라보았다. 결국 종교적인 사회문화적 환경은 노인을 악한 존재로 설정해 놓는다.

하지만 노년을 이상화하는 경우에는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신체적 노년을 부정하면서 정신적 노년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나이가 들면 오히려 육체적 욕망에서 해방되어 미덕과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정신적 노년을 도덕적으로 긍정하기도 했다.
 
노년은 아름다운가?
 
무엇보다도, 구전전통을 중시하는 아프리카 문화 속에서 노인은 집단기억을 계승하는 자로서 그 위상이 높을 수밖에 없다. 사하라 사막의 투아레그 족인 무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나이 듦 속에서 지혜의 샘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고장에서 ‘나이들다’라는 말은 성스럽다는 뜻에 가깝다. 나이듦이란 젊음을 만드는 것이기에 아름답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시간에 맞춰 성장할 줄을 모른다. 오히려 시간을 잡아두려고 한다. 하지만 나이듦은 무척이나 아름다운 것이다...... 사람을 말해주는 삶의 이야기이므로. (무사 아사리드, <사막별 여행자>, '테제베와 단봉낙타')
 
▲ 무사 아사리드의 <사막별 여행자>(문학의숲, 2007) 중.
21세기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아프리카인 무사에게는 여전히 늙음, 노년은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노년은 아름답기보다는 오히려 추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사하라 사막과 같은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노년에 도달하는 것이 힘든 일일 것이다. 그래서 ‘노인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칭송의 대상일 것이다. 게다가 삶의 다채로운 경험과 무수한 고난과 역경을 헤쳐 온 노인이라면, 풍부한 지혜와 기억을 나눠줄 만큼 현명해서 부족 공동체에 큰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평가될 것이다.
 
이처럼 전염병, 자연재해 등으로 오래 살기가 어려웠던 시대나 사회 속에서는 오래 살면서  자손을 많이 번식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노인은 경이로운 존재가 되고, 공경과 추앙의 대상이 된다. 이때 노인은 삶과 죽음을 매개하는 신성한 자이고, 신이 장수하도록 축복해준 자이니  당당히 행복을 누릴 특권을 소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족이나 공동체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면 노인은 바로 부담스러운 짐이 된다. 과거부터 경제적으로 곤궁한 시기에는 쇠약한 노인을 불필요하다고 판단해 제거, 희생시키는 것이 당연시되어 왔다. 더불어, 현대사회처럼 빠르게 변화하고 복잡한 사회에서는 노인의 경험이나 지혜가 경시되고, 오래 산 자의 집단적 기억에 대한 중요성도 약화된다. 노인은 생물학적 죽음에 처하기에 앞서 이미 사회 속에서 소외되거나 망각되어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인다.
 
이렇듯,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노년을 통해, 또 노년에 대해 던지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극화된 시선을 통해 노인이 여성만큼이나 권력의 주변부에 내몰린 힘없는 소수자임을 알 수 있다.
 
늙는다는 것이 생명체라면 죽기 전에 거쳐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고, 개개의 생명체는 그 과정을 똑같이 겪지 않고, 개별적 차이를 갖는다. 이 과정이 선, 악이라는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가치판단 대상일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역사 속의 노인들은 당시의 사회, 문화, 경제적인 관점에서 저울질되었고 대부분의 경우 약자로서 부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었기에 우리는 실존적이고 체험적 존재로서 노인의 모습을 지난 역사 속에서 퍼 올리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나이든 여성에 대한 혐오
 
그런데 역사 속에서 거론되는 노년이 대부분 남자 노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노인에 대한 이야기도 충분하진 않지만, 여성 노인에 대한 이야기는 드물다. 여성차별적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 여성 노인이 역사 속에 제 흔적을 남길 기회를 어찌 얻을 수 있었을까?  게다가 여성이 노인이 될 정도로 오래 살 수 없었던 현실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오늘날 누구도 여성 노인이 남성 노인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는다. ‘여성은 세상 어느 문화권에서도 남성보다 죽을 확률이 낮다’는 어떤 생물학자의 지적대로, 여성은 생물학적으로 남성보다 강한 성이다. 현대 여성들 대부분은 완경 이후에도 살아남는다. 네팔, 인도 등과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여전히 남성이 여성보다 더 오래 생존한다지만, 대다수 국가의 여성들은 완경 이후에도 인생의 3분의 1 이상을 더 살 수 있는 것이다.
 
▲ '마녀'로 지목되어 잡혀가는 노인 여성을 그린 19세기 미국 삽화가 하워드 파일의 그림.     
하지만 이렇게 여성 노인이 남성 노인을 숫자상 앞지른 것이 몇 세기 되지 않는다. 조르주 미누아는 고대부터 15세기까지 서양에서는 여성이 남성보다 일찍 사망했으며, 위생상태가 나아진 16세기에 와서야 귀족층에서 겨우 여성노인의 수가 남성 노인의 수를 앞지르기 시작했다고 분석한다.

 
출산이 여성 사망의 주요한 원인이었던 만큼, 위생상태가 개선되고 외과의술이 발달하고 항생제가 등장하기 전까지 여성들은 오래 살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겨우 살아남아 노인이 될 수 있었던 여성은 더 이상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평가절하 되고, 외모가 늙어 추하다면서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로마 시대에도, 르네상스 시절에도 늙은 여인은 추한 존재로 경멸당했다. 남성 노인이 때로는 정신적인 측면에서 이상화되기도 했던 것에 비해, 여성 노인은 생물학적이고 신체적 측면만 고려된 채 역사 속에서 철저히 무시되고 부정되었다.

역사가 여성 노인에 대해서는 거의 주목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간혹 몇 줄 남긴 대목을 살펴보더라도 부정적 편견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칠 뿐이다. 나이든 여성의 처지는 참으로 암울하고 비참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중세 초기 살인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던 시절, 노파는 몸값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 완경에 이른 여성은 생식능력이 없어 무익한 존재이니 죽이더라도 아무 상관없었던 것이다. 반면 65세 이상의 남자 노인들의 몸값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10세 이하의 아이들과 동일한 값이 매겨졌다. 또 근대 초기에 와서도 나이든 여성의 처지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가 포위되면 쓸모없다는 이유로 여성 노인이 제일 먼저 추방되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여자 노인은 사회 경제적으로 무익하고 불필요한 존재로 취급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도덕적으로도 부정되어 악과 동일시되었다. 14, 15세기 서구 종교예술에서는 늙은 여자를 악의 현신으로 다루었으며, 16, 17세기의 마녀재판에도 이러한 나이든 여성에 대한 혐오가 그대로 드러났다. 젊은 여자보다는 늙은 여자가 마녀취급 당하는 일이 더 흔했다.

 
이러한 나이든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은 남성 중심의 사회 속에서 여성에 대한 뿌리 깊은 부정적 시선과 맞물려 있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까지도 늙고 추하게 만들며 급기야 공포스러운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 바로 여성의 존재라는 서구의 신화적 사고는 여성에 대한 경멸을 넘어 증오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교 성서의 창세기에 등장하는 이브와 그리스 신화에 출현하는 판도라를 보라.
 
역사적으로 여성은 나이가 들면서 ‘여성’에다 ‘늙음’이라는 표지를 하나 더 껴안음으로써 권력의 중심에서 더 멀어지게 되고 사회적으로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취급당한다. 거기다 ‘가난’을 보태면, 이 가난한 늙은 여자는 그 어떤 사람보다 사회 최하위계층으로 버림받는다. 역사가 우리에게 전하는 여성 노인에 대한 이야기는 다름 아닌 이것이다.
 
<노년의 역사>를 덮으면서 든 생각은 우리가 앞으로 써 나가야 할 노년의 역사는 좀 더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편견, 좁은 시선에 갇힌 것이 아니라 생생한 무엇이었으면 좋겠다. 선악, 유익과 무익, 필요와 불필요, 지혜로움과 어리석음 등과 같은 개념에 가둬둘 수 없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노년이야말로 이 시대의 노인들 누구나 체험하는 현실적인 노년이다.
 
이번에 만난 외숙모만 해도 그렇다. 일흔을 내다보는 나이셨지만 여전히 직업적인 일을 포기하지 않고 당당히 당신의 삶을 살아내고 계셨다. 나이가 들어서 몸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여전히 독서도, 음악도 즐기고 계시다고 했다.
 
나는 도서관에서 이 시대의 나이든 여성이 스스로 풀어놓는 나이 드는 이야기를 담은 책을 한 번 찾아보리라 마음먹었다.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여성 노인의 진짜 이야기가 궁금하다.
이 기사 좋아요
  • 도배방지 이미지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