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적 사건에 가려진 ‘분리된 삶’을 주목하다

장애여성 숨은 그림 찾기(12) - 영화 '숨'

호야 | 기사입력 2011/11/09 [10:07]

충격적 사건에 가려진 ‘분리된 삶’을 주목하다

장애여성 숨은 그림 찾기(12) - 영화 '숨'

호야 | 입력 : 2011/11/09 [10:07]
[※ 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영화 <숨>이 상영된다는 것을 알았을 땐 이미 한 상영관의 짧았던 상영일을 놓친 후였다. 못 보고 끝나버리는 줄 알았는데 다행히 동료인 장애여성이 볼 수 있는 곳을 알려주어 함께 보러 갔다. 그 친구도 나도 한 영화평론가의 글을 읽고 영화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기대에 부풀어 영화관을 향했다.
 
나는 주인공인 장애여성의 행위성이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점을 기대했다. 영화 <도가니> 열풍 때문인데, 이전에 책을 통해서 본 <도가니>는 아무래도 청각장애 학생보다는 비장애인 선생님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숨>에서는 실제 장애여성이 주인공이라고 하니 관심이 더해졌다.
 
장애여성, 사랑도 하고 욕망도 드러내다
 
▲ 수희는 연인을 유혹해 성관계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며 틀에 갇힌 장애여성의 캐릭터를 흔든다.
<숨>은 어려서부터 시설에서 자란 장애여성 수희가 중심이 되는 이야기이다. 첫 장면을 보자마자 ‘역시 잘 보러 왔다!’는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녀가 연인관계인 남성을 외딴 창고 같은 공간으로 데려와 성관계를 하는 장면이 나왔다. 강조하건대 그 남자가 아닌, 그녀가 손짓하며 데려온 것이다. 그곳은 그들의 아지트인가 보다. 숨겨놓은 거울로 보이는 물건과 립스틱이 꺼내어지고 그녀의 입술은 빨갛게 변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들의 성적인 즐거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될 만큼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녀는 초반부터 장애여성의 정형화된 무성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게다가 자원활동을 하러 온 여성이 수상한 낌새를 느끼고 목욕을 끝낸 지적장애여성의 행방을 묻자, 수희는 원장 아들의 방으로 여성을 안내한다. 그 대가로 눈여겨두었던 자원활동가의 십자가 목걸이를 갖는다(구체적인 획득과정은 드러나지 않는다).
 
얼마나 발칙한 행동인가? 흔히 장애여성은 자신이 원하는 욕망조차 잘 인식하지 못하며 욕망이 있다 한들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수동적이고 착한 이미지로만 그려진다. 이와 다른 그녀의 모습에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 나오는 조제가 떠올랐다. 조제는 할머니의 보호(?)로 인해 오랫동안 집에서만 생활했지만,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특히 남자친구의 여자 후배에게 부러우면 “네 다리를 자르라”고 말할 정도의 까칠함과 당돌함이 있었다. 나는 수희에게도 조제와 같은 전형성을 벗어난 모습을 발견하길 기대했다.
 
그런데 이런 기대에 부응하는 짜릿함은 너무 짧았다. 중반 이후 그녀가 임신을 한 이유가 성폭행으로 판단되어지면서 쉽터로 옮기게 되는 과정, 쉼터에서의 생활 등에서 그녀는 마치 영화 ‘오아시스’의 여주인공 같았다. 주위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그냥 수동적으로 흘러가는 듯 보인다. 마지막 즈음에 쉼터 소장에게 “나 안 해”라고 몇 차례 소리친 것을 제외하고.
 
물론 수희는 어려서부터 시설에서 자랐고, 원장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한 경험도 있다. 게다가 매일매일 반복되는 행동 속에 갇혀 있다. 그런 상황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으리라. 이런 상황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막연히 당당한 주체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아쉽다.
 
영화를 본 후 나중에 관련기사들을 검색해본 뒤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니 그녀의 행동도 사실에 근거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과연 그뿐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지울 수 없었다.
 
친절하진 않지만 현실적인 일상의 재현
 
이런 아쉬움과 의문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그녀의 행동 외에는 거의 단서가 없어서일 수도 있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상황전개가 충분히 설명되는 방식은 아니었는데, 특히 주인공의 감정과 생각을 읽어내기가 어려웠다.
 
이는 뇌병변장애라는 장애 특성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내가 아는 주위의 뇌병변장애여성들의 표정은 다양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호불호는 명확하다), 표정의 변화가 많지 않았다. 게다가 대사도 거의 없고, 생각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방식도 아니다.
 
이로써 보이는 행위 외에 단서가 없기에 고민, 갈등, 선택의 과정이 묻혀 어쩌면 수동적인 모습으로 보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장애인을 다룬 영화에서 자주 비판되는 지점이기도 한데, 영화상에서 그녀가 뇌병변장애여성이고 언어장애가 심해 말을 거의 하지 않는 것인지, 어느 정도 지적장애도 중복되어 있는 것인지 명확히 알 수도 없다.
 
대개 너무 세밀하게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것보다 생략과 여운이 많아 생각의 여운을 주는 영화를 나는 좋아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의도 여부는 모르겠지만 사건이 전개되는 부분도 그렇고 주인공에 대해서도 너무 생략이 많았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난 후, 함께 본 친구와 내용을 확인하는 작업이 한참이나 이어졌다. 예를 들어 지적장애여성이 병원에 가서 자궁적출을 한 것인지 아닌지, 그녀의 아이가 누구의 애인지 등등.
 
그러나 이 영화는 장애인들이 경험하는 현실을 잘 포착해내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영화 속에서 표현된 시설에서의 일상은 마치 현실 속 그 모습 그대로 같다.
 
나는 간접적으로 시설을 경험했을 뿐이지만, 잠시 시설에서 산 적이 있는 친구는 매우 놀라워했다. 예를 들자면, 목욕봉사 온 자원활동가의 말투나 내용이 그렇다. 다정하게 대했다가 엄하게 대했다가 하는 시설 원장의 모습도 친구가 실제로 거주하던 곳의 원장과 너무도 비슷했단다. 원장이 수희의 임신사실에 결혼식을 올려주겠다고 하는 의외의 모습을 보이다가도, 웨딩숍에서의 심드렁한 태도로 그 진심을 엿볼 수 있는 그런 상황들일 것이다.
 
시설에 조사를 나와 수희를 구출해주는 상담가의 ‘약간 어린애 다루듯 하는 말투’도 익숙하다. 몇 자리 차지하지 않은 한적한 영화관에서 비장애인들은 심각하게 조용한 때, 우리는 이런 장면에서 그들의 정형성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키득거리기도 했다.
 
장애인시설 안과 밖의 ‘작은 폭력’ 드러내기
 
▲ 영화 <숨>의 모델이 된 실화에서 수희는 자신을 성폭행 했던 목사에 의해 강제로 자궁적출까지 당한다.  그러나 영화는 '자극적으로 보일' 사건들을 배제하고 장애여성인 수희의 삶 자체에 주목했다. 
이 영화는 2007년 밝혀진 ‘기독교 영광의 집’ 사건을 토대로 한 것인데, 인권침해의 측면에서 보면 ‘도가니’ 만큼이나 심각성이 크다. 그런데 드러난 방식은 그리 자극적이지 않고 앞서 말했듯 오히려 생략이 많아 구체적으로 포착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함께 본 친구는 평소에 상당한 논리력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잘 모르겠는 영화”라고 일단 정리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를 보고 나니 두고두고 생각이 많아진다. 성폭력, 자궁적출 등의 폭력 외에도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차별과 폭력이 어떻게 곳곳에 미묘하게 존재하는지 은근히 드러낸다.
 
시설에서 성폭력 등의 무시무시한 사건이 일어나서만 무서운 것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매일매일 반복되는 강요된 노동이 힘에 부쳐 다리를 두드리는 그녀의 모습과 “수희야, 너는 우리 가족이잖니”하는 원장의 다정한 말투를 연결해보면, 그녀가 계속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그녀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창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는 장면에서, 세상에 직접 부딪히지 못하고 창문을 보는 카메라 시선을 통해 느껴지는 그 외로움, 서글픔, 답답함이 삶에서의 분리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시설 안에서는 수희가 몸은 힘들지만 목욕을 시켜주던 입장이었다면, 시설에서 나온 후 목욕을 당하는(?) 이로 전환된다.(이때 가슴노출도 의도된 것일 수 있을 듯하다) 매니큐어를 발라주지만 어떤 색상을 원하느냐고 묻지 않는 쉼터 동료들의 소소한 자기결정권의 무시까지, 어느 곳에서든 시설과 다를 바 없이 약자를 차별하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자 한 게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은 크고 자극적인 사건에는 동조하여 분노하지만, 시설에서 매일매일 그날이 그날이고, 매일 같이 당하는 내재화된 차별의 무서움에는 분노하기 쉽지 않다. 이 영화 ‘숨’을 보면서 시설 경험은 없지만, 내 어린 시절 좁은 방에서 작은 창문에 빛을 보며 돌아올 언니와 가족만을 기다리던 그날이 그날 같던, 그렇지만 마냥 허송세월을 한 것은 아닐 수도 있는 그 시간을 떠올리게 되었다. 장애가 있든 없든 일상적이어서 사소하게 여겨지는 무서운 분리의 삶에도 더불어 분노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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