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까짓 딸년들!”

딸을 만나러 가는 길(43) 친할머니 이야기

윤하 | 기사입력 2012/05/05 [01:02]

“그까짓 딸년들!”

딸을 만나러 가는 길(43) 친할머니 이야기

윤하 | 입력 : 2012/05/05 [01:02]
부모님을 뵈러 갈 때마다 나는 두 분이 좋아할 만한 주전부리를 챙긴다. 그러면서 함께 살고 계신 친할머니를 위한 간식거리도 잊지 않는다. 아니, 어머니나 아버지 것은 잊어도, 할머니께 드릴 걸 잊는 법은 없다.
 
이번에도 부모님 댁을 방문하기에 앞서, ‘뭘 살까’ 고심하며 슈퍼의 진열장 앞을 거닐었다. 특히, 할머니에게 드릴 선물을 고를 때는 더 생각이 많다. 아흔 다섯의 연세를 고려해, 공연히 목에라도 걸리면 안되겠다 싶어서 쿠키 류는 일찌감치 제했다. 그리고 카라멜도 이에 너무 달라붙으니, 피하는 것이 좋겠다. 사탕이 어떨까? 아주 달콤한 것이 좋겠다. 또 오래 드실 수 있도록 큰 봉지를 사고 싶다.
 
누가 이런 나를 보면, 할머니를 참 좋아하나 보다 생각할지 모른다. 할머니조차, 방문 때마다 간식거리를 잊지 않는 내게 “우리 집에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너뿐이다!” 하시기도 했다.
 
사실, 이 말에는 많이 당황했다. 나는 결코 할머니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연세 많은 할머니의 상황이 마음 아파, 손녀로서 최소한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뿐이다. 게다가 거동이 조금씩 불편해지는 할머니를 볼 때마다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실감하게 되어 마음이 짠해지곤 한다. 옛날의 서슬 퍼런 기세는 온 데 간데 없이, 한없이 약하고 작아진 할머니가 불쌍한 생각까지 들어 지난번에는 안아드리기도 했다.
 
장남에게 시집온 어머니는 아들 하나에 딸 넷을 낳았다. 아들은 하나밖에 못 낳고 딸만 많이 낳았다고, 할머니는 엄마를 무척 미워하셨다. 어머니와 반대로 할머니는 아들만 넷을 두었기에 그 기세는 더 쩌렁쩌렁했다. “나는 낳기만 하면 아들이었는데, 너는 어쩌면 그렇게 딸만 낳냐?”고 노골적으로 어머니에게 면박을 주기도 했다. 그런 만큼 할머니는 우리 자매들도 예뻐하지 않았다.
 
특히, 아들딸 차별 않고 교육을 시키겠다고 결심한 부모님이 딸들을 대학에 보내기 시작하자, 할머니는 큰 불만을 표시했다. “그까짓 딸년들, 뭐하게 그렇게 공부를 시키냐?”고, 우리 듣는 앞에서 부모님을 야단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우리 자매들에겐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뉘 집 딸은 여상을 나와 취직을 해서 얼마를 벌어오고… 공장에 다니는 어떤 집 딸은 얼마를 벌고…” 이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해 일찌감치 취직한, 알지도 못하는 다른 집 딸들 이야기를 볼 때마다 하셨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딸들을 대학원까지 보내자, 아예 대놓고 “지 에미, 에비 등골 빼먹는 년들!”이라고 욕을 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런 할머니의 말에, 앞에서는 뭐라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내 딸들 공부시키는 데 당신이 학비를 보태주는 것도 아니면서 그런 소리는 왜 하셔! 난 우리 딸들 끝까지 공부시킬 거야!” 라고 말하며, 교육열을 불태우셨다. 어머니의 이런 태도 때문에 우리들은 아무도 할머니의 말에 주눅들지 않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우리 자매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둘러 앉아 “우리가 크면, 딸 많이 낳은 엄마를 꼭 부러워하도록 만들자!” 하며, 서로 손을 맞잡고 맹세를 하곤 했다.
 
물론, 어른이 되었다고 해서 돈이나 물질로 부모님을 호강시켜드릴 만큼 부자가 되지도 못했고,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성공해 부모님이 우쭐댈 만한 딸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다들 고만고만하게 살면서 짬 나는 대로 안부를 묻고, 만나면 어렸을 때처럼 “엄마! 아빠!”하며 졸졸 따라다니고, 가끔은 엄마의 넋두리에 장단을 맞춰드리는 것이 전부지만, 옆에서 보는 할머니의 마음은 그게 아닌가 보다.
 
명절이나 생신같이 중요한 날들만 찾아오는 당신의 아들들과 비교가 되어서였을까?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된 할머니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챙기는 딸들을 가까이 보면서, 엄마를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한번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옛날에는 아들이 많다고 좋아라 했는데, 아들은 하나면 충분해! 딸이 많은 게 좋은 것 같다.”
“할머니! 바로 우리 엄마잖아요! 엄마는 그걸 이미 알고, 그렇게 했잖아요! 하하!”
“그래, 네 말이 맞다!

 
할머니는 한껏 풀 죽은 목소리로 내 말에 동감을 표현했다. 또 아들만 둘인 올케에도 딸이 없는 아쉬움을 표현하며,
“딸이 있어야 해! 네 시어머니 좀 봐라! 딸이 많으니까 얼마나 좋냐?” 하셨단다.

 
자매들과의 약속은 이렇게 엉겁결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요즘은 할머니의 교양 없음이 할머니 탓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한다. 할머니는 남자만 사람대접을 받던 시대에 태어나 학교문턱은 가보지도 못하고, 부모님이 시집가야 한다니까, 그러나 보다 하면서 얼굴 한번 보지 못한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 그때가 16세였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그저 농부로 땅을 파고 쇠죽을 쑤며 일생을 산 할머니셨다. 모든 것이 시대의 탓은 아니겠지만, 할머니가 여자로 태어난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자긍심을 느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자랐다면, 그 정도로 남녀차별적인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막상 우리 자매들의 꿈이 이루어졌지만, 고독한 할머니를 옆에서 보는 것은 마음이 아프다. 이번에 할머니를 뵈면, 좀더 따뜻하게 안부를 물어야겠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라고, 좀더 꼭 안아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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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도 2012/05/17 [16:02] 수정 | 삭제
  • 시대와 환경의 피해자 우리 할머님, 저의 어머님은 얼마전에서야 '난 봉급 없는 종살이했어'하는
    푸념을 짧게 하셨습니다. 그 분들의 고단했던 삶을 밟고 내가 서 있다 싶으니까, 정말 머리카락을 뽑아서라도 짚신을 지어드리고 싶었습니다. 여성 자신마저도 여성을 비하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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