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기후변화 해법 찾지 못하는 이유

<기후변화, 어떻게 대응할까>② 기후변화는 ‘기후 부정의’다

이정필 | 기사입력 2012/05/15 [00:33]

인류가 기후변화 해법 찾지 못하는 이유

<기후변화, 어떻게 대응할까>② 기후변화는 ‘기후 부정의’다

이정필 | 입력 : 2012/05/15 [00:33]
세계는 지금 극심한 가뭄과, 혹한, 쓰나미 등 강력하고 무서운 환경재앙에 직면해있으며, 그 주요 원인으로 ‘기후변화’가 꼽힌다. 인류가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면서, 이전에는 기후변화와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 <일다>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와 공동 기획으로 “기후변화, 어떻게 대응할까” 기사를 연재한다.
 
연재를 통해 기후변화가 우리 삶에 미치는 광범위한 영향을 알아보고, 사회 문제들과 어떻게 연관되어있는지 짚어본다. 또한 끝없는 생산과 소비를 전제로 한 자본의 논리가 정치사회 전반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속 가능하지 않은 이 시스템을 어떻게 변화시켜야 할 지 함께 대안을 모색할 계획이다. 두 번째 기사의 필자 이정필님은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상임연구원이다. –편집자 주

 
북극곰과 투발루에 대한 관심만으론 부족해
 
2006년까지만 해도 ‘기후변화’를 비롯한 생태 문제는 내게 익숙하지 않은 다른 세상의 일이었다. 그러나 2007년부터 이와 관련된 일을 하게 되고 공부를 시작하면서, 기후를 통해 세상을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데 ‘북극곰’과 ‘빙하’로 기후변화를 이미지화하는 것은 마뜩잖았다. 미디어를 통해 접하게 되는 다큐멘터리와 광고들 태반이 그런 식이다. ‘투발루’와 ‘몰디브’ 등 해수면 상승으로 인해 가라앉고 있는 섬들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기후변화에 대해 피상적이고 다소 낭만적인 관점을 극복하는 데 뭔가 부족해 보였다.
 
반면 기후변화의 과학적 논쟁의 경우는 흥미로웠지만, 게임이 사실상 끝났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김이 샜다. 기후변화의 원인과 전망을 둘러싼 과학적 논의들의 간극은 넓은 편이다. 지금은 수세에 몰렸지만 ‘기후변화 회의론’(인간의 활동이 기후변화의 원인이라고 믿지 않는 입장)을 지지하는 전문가와 기업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들의 견해도 단일하지 않다. 기후변화가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며 그 자체를 부인하는 주장에서부터, 기후변화의 원인이 인간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지구 사이클에 따라 발생한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래로 나뉜다.
 
기후변화의 전망에 대해서도 파국적인 시나리오를 제시하는 비관론이 있는가 하면, 그렇게까지 지나치게 공포감을 주는 것은 일종의 충격요법일 뿐이고, 기후변화는 인간과 기술의 능력으로 충분히 대응할만한 수준일 것이라는 낙관론도 있다. 기후변화의 전망은 문제 해결의 태도와 직결되기도 한다.
 
나는 기후변화의 원인에 대한 과학적 접근에 내장되어 있는 불확실성을 고려하면서, 기후변화를 인정하는 입장에 선다. 또한 ‘기후과학’도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거나, 혹은 그런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관찰을 적극 수용한다. 순수 기후과학은 존재할 수는 있어도, 처방뿐만 아니라 문제의 진단에 있어서도 과학 외적인 과정을 통과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기후변화는 ‘생태적 변화’뿐 아니라 ‘세상의 변화’
 
 지난 4년간 열린 유엔기후변화총회의 탁상공론을 조롱하는 이미지 
그렇다면 ‘기후정치’는 어떠할까. 기후과학 이상으로 더 복잡한 맥락에 위치해 있다. 인도네시아,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태국, 버마 국경, 코펜하겐, 멕시코, 남아프리카공화국. 이 국가들은 착한 에너지 여행사라 할 수 있는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생활을 하며 내가 돌아다닌 곳이다. 이곳에서 본 것은 기후나 기후변화라기 보다는 ‘세상의 변화’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기후정치로 인한 변화’였다.

 
이때 만난 것은 ‘기후정의’라는 시각과 기후정의운동이었다. 그러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나의 고민은 조금씩 정리가 되어갔다.
 
기후는 우리가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기후변화에 관한 전문서적이나 교양서적에서 제시하는 평균 온도와 온실가스 배출량의 변화 도표를 통해서, 그 변화상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정작 우리 눈은 기후나 기후변화 자체를 포착할 수 없다. 과거 패턴과 다른 날씨나 기상이변 그리고 지구 생태공간의 변화를 통해, 즉 기후변화의 징후나 현상을 통해 직간접적으로 체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생태적 변화’로는 기후변화를 둘러싼 세상의 변화의 절반만 설명할 수 있다. 어떤 곳에서는 화석에너지 자원을 둘러싸고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고, 다른 곳에서는 태풍과 홍수와 가뭄 앞에서 서로 죽이거나 생활공간을 떠나고 있다. 또 다른 곳에서는 기후변화 완화와 적응 문제를 놓고 누구의 책임이니, 어떤 방식을 택하니 하며 탁상공론으로 세월을 보낸다. 즉 ‘인간 사회의 변화’ 속에서 나머지 절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의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 왜 해법 못찾나
 
지난 30,40년간 기후과학이 발전했고, 국제적, 국가적, 지방적으로 적잖은 기후보호의 공감대가 형성됐는데도, 여전히 기후변화에 뚜렷한 해법을 찾아내지 못한, 아니 해법에 합의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원인을 찾아볼 있겠으나, 기후변화의 본질적 특성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기후변화 자체에 해결하기 복잡하고 어려운 여러 문제들이 실타래처럼 꼬여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가 장기 지속적이고, 지구적이며, 구조적인 속성 탓에, 피해를 보는 이와 이를 유발한 이, 그리고 해결해야 하는 이가 일치하지 않는 경향이 크다.
 
먼저, 시간적 측면에서 불일치를 살펴보자. 산업혁명부터 배출된 온실가스가 서서히 누적되다가 예기치 않게 폭발하는 지점(Tipping Point)에 도달하면, 그 이후에는 점차 기후변화를 완화하기도 어렵고 그 변화에 적응하기도 힘들어진다. 이미 그 지점을 넘어섰다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일차적으로 과거 세대의 책임이지만,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로 부담이 전가되면서 상황은 악화된다. 서둘러 제때 기후 대응에 나서더라도, 가시적인 성과는 먼 훗날에 나타나기 때문에 정치인들에게서 인기를 얻기도 힘들다.
 
▲  2012년 기후변화 취약성 지수. 기후변화에 대한 책임이 낮은 국가일수록 위험도가 높다.  © 출처: Maplecroft
또한 기후변화에 대한 선진국의 역사적 책임이 막중함에도, 최근 경제성장으로 배출량이 급증하는 중국과 인도 등 개발도상국의 현재적 역할도 주목해야만 하는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다.

 
또 다른 문제는, 여타의 환경문제의 공간적 범위를 뛰어넘어 전 지구적으로 기후변화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비록 제어할 수 없는 수준에 도달하면 생태계 전체와 인간 사회의 운명이 암담해진다는 비관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온도 상승 정도에 따라 국가별로 차이가 발생하게 된다.
 
세계적으로도 국가 간의 온실가스 배출 책임이 다르고, 한 국가 안에서 계급 간의 배출 책임도 다르다. 반면, 그 피해는 부당하게도 배출 책임이 거의 없지만 대응 능력이 취약한 가난한 국가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몰릴 수밖에 없다. 녹색기후펀드(GCF)를 조성해 개발도상국과 가난한 나라에 지원하기로 한 국제사회의 약속이 지켜질지도 의문이다.
 
화석에너지, 성장중심 시스템을 바꾸지 않는다면…
 
기후변화의 해법을 찾기 어려운 이유의 또 한가지는, 구조적 전환을 통해 과거 체제와 단절하지 못하고 임시방편의 처방만 해서는 기후변화를 제어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앞서 이야기한 기후변화의 시공간적 속성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다.
 
지구 평균기온을 산업화 이전 시기보다 2도 상승한 정도로 제한하려면, 대대적인 온실가스 배출 제한이 실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화석에너지 중심의, 경제성장 일변도의 자본주의 체제를 새로운 체제로 전환하지 못한다면, 온실가스 배출을 실효적으로 감축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부국과 부자의 ‘사치형 온실가스 배출’과 구별되는, 빈국과 빈자의 ‘생존형 온실가스 배출’을 어떻게 보장하거나 보상해야 하는가 하는 윤리적이면서 경제적인 쟁점이 튀어나온다. 게다가 국제사회에는 금융, 전쟁, 기아, 질병 등 시급히 해결해야 할 현안들이 쌓여 있어, 기후변화에만 올인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기후변화 문제를 해결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까닭은 이처럼 시간적, 공간적, 구조적 측면에서 부정의(不正義)가 내재해있기 때문이다. ‘기후 부정의’는 기후변화의 정치적인 규정이며, 동시에 기후변화의 본질을 잘 드러내주는 호소이다.
 
그런데 국제사회에서 공인된 기후변화의 1원칙 ‘공통적이되 차별화된 책임’이 관철될 수 없는 현실의 권력구조 탓에, 이런 호소는 외면 받고 있다. 시장 권력과 국가 권력이 맞물려서, 기후변화가 평등하지 않고 민주적이지도 않다는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기후변화의 해결책은 ‘부정의’에 저항하는 것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활동가들이  덴마크 코펜하겐의 인어동상 앞에서 가진 '기후정의' 퍼포먼스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서는 이런 ‘부정의’를 해결하는 ‘세상의 변화’가 필요하다. 우리가 싸울 대상은 기후변화라는 결과가 아니라, 그것의 원인인 세상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먼저 ‘국제기후정치’를 변혁하는 것을 방안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것도 쉽지 않다. 유엔기후변화협약과 교토의정서의 국제규약, 그리고 유엔기후변화총회라는 국제기구는 다국적기업으로 대표되는 시장 권력과 미국과 유럽으로 대표되는 국가 권력에 봉사하거나 그것에 포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기후변화의 먹이사슬’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 해결자로서의 역할을 할 이는 누구인가? 약 처방으로 치유가 불가능한 기후변화의 ‘부정의’를 제거하는 과업은 누가 달성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다음 연재기사들에서 해보도록 할 것이다.
 
기후정의. 사실 주제만 바뀌었을 뿐, ‘사회정의’나 ‘환경정의’와 같은 내용에 비춘다면 특별히 새롭거나 어려울 것은 없다. 1999년 세계무역기구(WTO) 각료회의가 열린 시애틀에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반세계화 운동인 ‘시애틀 투쟁’이나, 최근 금융기관의 부도덕성과 빈부 격차에 항의하며 미국의 경제수도인 월가를 점령한 사람들의 시위를 떠올려보자. 이와 같은 시대적 흐름 속에 읽을 수 있는 것은, ‘인정’과 ‘분배’ 나아가 ‘전환’의 정치를 요구하는 새로운 주체들의 만남이다.
 
‘기후정의’는 생태주의, 생태여성주의, 생태사회주의, 급진민주주의 등 다양한 이념적 지향을 가진 주체들이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결합한 공동의 언어이자 운동이다. ‘정의’가 단지 시혜나 자비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주체들의 요구로부터 실현되는 것이라면, ‘기후정의’는 기후 부정의에 맞서 저항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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