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새들이 가니 풀이 오는구나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스물세 번째 이야기

자야 | 기사입력 2012/07/15 [14:35]

아, 새들이 가니 풀이 오는구나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스물세 번째 이야기

자야 | 입력 : 2012/07/15 [14:35]
새벽녘까지 내리긋던 빗줄기가 멈추고 잠시 하늘이 고요해진 시간. 물기 흥건한 길을 자박자박 걸어 산 아래 밭으로 향하자니, 세상 모든 것이 한층 선명하고 깊어진 걸 느끼겠다. 가까운 풍경은 물론이고, 멀리 너울대는 몇 겹의 산 능선들과 어디선가 깃을 치며 날아오르는 이름 모를 새들의 울음까지.
 
며칠 전 가뭄이 심했을 때와 지금이 다른 것처럼, 얼마 후 장마가 끝나고 나면 또 어딘가 달라져 있겠지. 더 무성해지고 짙어진 자연이, 8월의 햇볕 아래서는 어쩌면 숨 막히게 답답하고 조금은 잔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리라. 이렇게 생각해서인가, 이미 반이나 흘러가 버린 7월이 아쉽기만 하다.
 
새와의 전쟁, 남 일이 아니야         
 
유월부터 지금까지 달포 이상 되는 기간 내내 밭에 들러붙어 이랑 정리하고 콩 심은 기억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지나간 시간이 더더욱 아쉽게 느껴지는 걸 어쩔 수 없다. 밭일을 내가 싫어하지 않는데도, 그것 말고 딱히 뭔가 하길 원했거나 해야만 한다고 여긴 것이 없는데도 그렇다.
 
이는 내가 아직 도시에서 길든 습성 -매일같이 누군가를 만나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고,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차도녀’의 품위를 유지한다는 명목 아래 끊임없이 뭔가를 소비하고, 뭔가 분명한 목적과 계획 아래 움직이기 위해 애쓰는- 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이며 그들과 나누는 이야기가 단조로워지고 소비와는 현저히 거리가 멀어진 이 생활에 대해, 목적과 계획보다는 그날그날 필요하거나 마음이 가는 일을 하며 사는 현재의 삶에 대해 주기적으로 회의하고 지루해하는지도.
 
하지만 이와 별개로, 지난 한 달 반 사이에 과거에는 알지 못했던 하나의 사건을 경험하면서 내가 좀 지친 것도 사실이다. 그 사건은 다름 아닌 새들과의 전쟁이라 하겠다. 전쟁이라는, 지극히 폭력적인 단어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그들과 사생결단이라도 내리고 싶은 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콩을 심는 족족 빼먹는 건 물론이고 가까스로 땅을 뚫고 나온 여린 떡잎마저 싹둑 잘라먹는 '짓'을 계속해서 해대니,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 아닌 다음에야 누구라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는가.

▲  처음 콩을 심을 때만 해도 몰랐다. 새들과 전쟁 아닌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것을.   © 자야

콩 농사의 적은 새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도, 나와 K는 크게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작년에 동네 아주머니 밭을 빌려 세 이랑가량 심은 콩이 무사했고, 올해도 콩 중에 가장 먼저 심은 청태(겉은 검고 속은 푸른 콩)는 별 탈 없이 잘 자랐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청태 다음으로 여섯 이랑에 나누어 심은 노란 메주콩이 흔적도 없이 다 사라지면서, 우리는 그제야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늘 하던 대로 콩 심은 이랑 위에 풀을 넉넉하게 덮어 위장을 하고 내려왔는데, 새들이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모조리 먹어 치우고 만 것. 그나마 이랑을 덜 만든 상태에서 콩을 심었기에 우리가 가진 종자를 다 잃진 않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 할까.
 
우리가 새를 쫓은 건지, 새들이 우리를 봐준 건지      
 
그 일을 겪은 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새로 인한 피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토로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그만큼 새를 성토하는 열기도 뜨거웠다. 나 역시 같은 피해자로서 공감되는 부분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들이 쓴 글을 읽으며 처음엔 "맞아, 이건 장난이 아니라 전쟁이야!" 라고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들 중 다수가 주변에 약을 놓거나 새총을 쏴서 죽이는 방법을 스스로 택하고 남에게도 적극 권장하고 있는 것에, 나는 좀 충격을 받았다. 내가 아무리 '새'라 쓰고 '조폭鳥暴'이라 부른다 해도, 또 그들을 내 밭에서 죄다 몰아내고 싶은 심정이라 해도, 단지 콩을 빼먹는다는 이유로(사실 새는 콩을 좋아하니 빼먹는 건 당연하다) 죽이는 건 아니다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예전처럼 안일하게 대처했다가는 같은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하므로, 나와 K는 어디선가 주워들은 정보를 참고해 물로 희석한 목초액에 콩을 담갔다가 심는 방법을 택했다. 목초액 특유의 냄새를 새들이 싫어한다니 이번엔 괜찮을 거라 내심 기대를 걸어본 것이다. 그러나 새들이 콩을 빼먹은 바로 그 자리에 다시 메주콩을 심고 난 지 며칠 후. 그저 한 번 둘러볼 요량으로 밭에 갔을 때 산까치 몇 마리가 매화나무 위로 후드득 날아오르는 걸 보며 찜찜함을 느꼈는데,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내 예감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맞아떨어졌다.
 
그날 이후 나와 K는 얼마 남지 않은 메주콩과 아직 심지 않은 쥐눈이콩(약콩)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새들을 죽일 것도 아니고 괜히 콩만 낭비하느니 우리가 먹는 게 낫다고 내가 주장한 데 반해, K는 마지막으로 대책을 마련해 한 번 더 실험을 해보자고 했다. 나는 내심 콩국수나 해서 먹었으면 했지만 어쩌랴. 산 아래 밭을 온전히 책임지기로 한 그의 의견을 따르는 수밖에.
 
▲  반짝이를 쳐둔 콩밭을 보며, 피곤하지만 눈부신 일상에 대해 생각해 본다.   © 자야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 주말이 되어 밭에 오른 우리는 K가 전날 준비해 둔, 목초액 원액에 담갔다가 말려 흡사 간장에 나무를 졸인 듯한 강한 냄새를 폴폴 풍기는 콩을 심었다. 그러고 나서 K는 또한 콩 심은 이랑에 여러 개 지지대를 설치한 후 며칠 전 퇴근길에 사온 반짝이를 겹겹이 두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 눈이 부시어 새가 덜 온다는 거였다. 처음엔 그 말이 좀 미심쩍게 들렸으나, 멀리서 보니 햇살 아래 놓인 사금파리처럼 날카롭게 반짝거리는 게, 내가 새라면 절대 가까이 하지 않을 것도 같았다.
 
승부는 삼세판으로 판가름이 난다던가. K가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시도한 방법은 다행히 성공적이어서 새들은 콩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것이 원액 그대로 쓴 목초액 덕분인지, 눈을 파고들 듯 아프게 반짝거리는 끈 덕분인지, 아니면 둘이 합쳐져 효력을 본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이제 배가 부를 대로 부른 새들이 우리를 봐준 것일 수도 있고.
 
나로 말하면 새들이 우리를 봐주었다고 믿고 싶은 쪽인데, 만약 새들에게 그런 아량이 있다고 믿는다면 굳이 전쟁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들을 몰살시킬 방법을 고안해내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를 일이다. 옛 어른들 말씀대로 사람과 땅 속 곤충과 새를 배려해 콩 세 알을 심었는데 새가 그 모두를 파먹는다면, 내가 그 배은망덕한 행위에 또 어떻게 돌변할지.
 
피곤해도 괜찮아      
 
어쨌거나 이제 새 피해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기분이 날아갈 듯 상쾌해야 정상일 텐데, 솔직히 말하면 그 정도는 아니다. 반짝이 안에서 싹을 틔운 콩들은 평화롭고, 그걸 보는 내 마음도 한없이 고요하긴 하지만, 왠지 진을 다 뺀 듯 나른하고 피곤하다 할까.
 
그래서인지 요즘 나는 밭에 가도 호미를 드는 대신 매화나무 아래 앉아 미수가루를 훌훌 마시거나, 아니면 입 안에 든 초콜릿을 천천히 녹여 먹으며 멍하니 산만 바라보다 올 때가 많다. 혹은 장맛비로 진흙이 된 고랑 사이에 앉아서 꼬물거리는 개미들을 관찰하든지.
 
그러다 어디선가 물기를 가득 품은 바람이라도 불어오면, 과거 어느 시절, 꼭 그와 같은 바람 속에 있었던 순간들을 떠올리곤 한다. 새벽마다 갠지스 강가에 앉아 푸른 숨을 토해내던 인도 리시케쉬와, 발로 노를 젓는 어린 사공들이 있는 미얀마의 드넓은 인레 호수와, 해질녘 해먹에 누워 듣는 메콩 강 소리가 꿈결 같았던 라오스 어느 작은 섬마을에서 보낸 순간들을.
 
몸은 밭에 있지만 마음은 그리로 달려가려는 찰나. 내 머리 위로 제법 넓어진 옥수수 잎사귀들이 서걱대는 소리가 들리고, 그에 고개를 쳐들면 떼로 몰려다니며 춤을 추는 잠자리들이, 그리고 그 너머로 잠자리 날개보다 더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콩밭이 보인다. 어지러워 눈을 감으니 조근조근 어떤 속삭임이 들리는 것도 같다. 피곤해도 여기가 내 자리라고. 내가 언제 어디로 도망갈지언정 일상의 피곤함이 배어 있는 이 자리가 나를 다시 끌어들일 거라고. 그래서 참 다행이라고.
 
다시 눈을 뜬 내게 세상은 온통 풀밭이다. 아, 새들이 떠난 자리에 풀이 빛의 속도로 우수수 일어나고 있구나. 나는 또 한 번 짙은 피로감을 느낀다. 그러나 뭐 어떤가. 잠시 나무 아래 앉아 미숫가루를 마시거나 초콜릿을 녹여 먹으면 되는 것을. 먼 산 바라보다가 마음 내킬 때 다시 호미를 들면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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