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과 성관계, 불안한 경계

<꽃을 던지고 싶다> 17. 원치 않는 성행위

너울 | 기사입력 2012/09/21 [18:50]

성폭력과 성관계, 불안한 경계

<꽃을 던지고 싶다> 17. 원치 않는 성행위

너울 | 입력 : 2012/09/21 [18:50]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사회적 설명이 필요한 문제는 왜 어떤 여성들의 경우 강간을 참아주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몇몇 여성들이 용케도 그것을 반발하느냐이다." -  캐서린 맥키넌 <강간: 강요와 동의에 대하여>
 
사람은 살아가면서 힘든 일을 견뎌내게 하는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삶을 지탱해주고 자신을 믿게 하는 그런 기억. 그런 기억이 많을수록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되고, 그 자존감이 자신을 보호하는 힘을 만들어 준다. 나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다. 짧지만 반짝 빛났던 기억.

 
어느 작가의 말처럼 사춘기는 인생의 소나기와 같다. 짧지만 강렬한 시간.
 
‘너를 믿는다’ 라는 말
 
가끔씩 찾아오는 두통에 진통제를 자주 복용했지만 나의 십대는 보통의 여학생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사람을 믿지 못했고, 친구들과 나누지 못하는 비밀을 간직하였고, 공부에 흥미 따위는 없었지만,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거나 흔히 말하는 일탈행위들을 하지 않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 성폭행을 경험하는 나는 창녀가 되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부에 당연히 흥미가 없었다. 수업시간에도 항상 멍하니 창 밖을 내려다보고 시를 쓰는 일에 몰두하였다. 나는 창녀가 될 운명이기에 희망이 없었다. 몸이 약하게 태어났던 나는 ‘아프다’는 한 마디면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됐고, 시험을 치지 않아도 되었다.
 
나는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못했다. 그 사건들은 나의 학창시절마저 온통 우울하게 만들었다.
 
절망적이기만 할 것 같던 나의 삶이 짧지만 반짝이던 생기를 찾았던 건 아주 작은 관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입시지옥이라는 한국에서 고3을 보낸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힘든 기억일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반짝 생기가 있었다.
 
고 3이 되고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고2때부터 나를 지켜보셨다며,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공부를 안 하는 것 같다고 실망이 크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어오셨다. 나는 창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못하고, 모르겠다고 하였다. 선생님은 사춘기는 인생의 소나기와 같다는 말씀을 하시며 지금 시기를 잘 지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너를 믿는다’고 하셨다.
 
처음이었다. 나를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믿는다고 말하는 어른을 만난 것이. 살아가면서 온전히 나를 믿어 주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커다란 힘이 되는 것이다. 이상하리만큼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애정을 주셨다. 나는 그 믿음에 보답을 하고 싶었다.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성적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다. 다음 달 시험에서 나는 일등이라는 성적표를 받았고, 담임선생님은 교무실에서 다른 선생님들에게 자랑을 하셨다. 우리 반 일등이라고, 너무도 성실하고 똑똑한 아이라고. 그런 칭찬을 받은 기억이 없었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공부를 못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공부를 잘하는 오빠와 항상 비교당했고, 상장을 타 가도 누구 하나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 성적이 바닥을 쳐도 혼내는 사람조차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관심이었는지도 모른다.
 
난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내 뜻대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터득하였다. 살아오면서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부족함을 느낄 때, 무언가 시작하기 두려울 때, 나는 ‘너를 믿는다’는 그 말을 떠올리곤 한다.
 
모든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이런 식일까?
 
벼락치기 공부를 한 탓에 좋은 대학에 가지 못했지만 서울에 있는 4년제에 입학하게 된 나는 잠시나마 창녀가 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꿈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1994년 X세대 논쟁이 있었고, 기존의 대학생들보다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자유롭고 생기 있는 대학생이 되었다. 쌀 수입 반대투쟁이 전국을 강타하였고 그 여름은 뜨거웠지만, 나는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과외를 하고 연애를 하며 성실하게 대학생활을 만끽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다른 삶이 가능할 것 같았다. 늦게 공부를 시작한 나는 다른 친구들처럼 공부가 지겹거나 힘들지 않았고,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처음으로 친구들도 사귀고, 미팅에서 내가 마음에 드는 남자를 선택하고, 모든 동기들이 부러워하는 연애를 하기도 하였다. 꽃을 들고 여대 앞에 서 있는 일명 ‘꽃돌이’라 불리는 남성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젊고 생기 있고 매력적인 청춘을 보내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지 내 생애 가장 찬란한 젊은 시절은 아름다웠다. 아무도 나의 과거를 몰랐고, 나는 새로운 삶을 만들어갈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찬란한 청춘도 얼마 가지 못할 운명이었나 보다.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선배가 일하던 비디오방에서 대타로 일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비디오 방이 처음 생기기 시작했고,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좋았다. 선배가 교회 수련회에 가야 해서 며칠만 내가 대신해주기로 했는데, 선배에게 다른 일이 생겨, 나는 방학 동안 계속 그곳에서 일하기로 했다. 최저임금이 1천700원 하던 시절 등록금 20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 방학 내내 일을 해야 했다. 저녁에는 과외를 하고 낮에는 비디오방에서 일했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 어느 날, 아르바이트를 한 지 보름 정도 지났을 때인 것 같다. 아침 10시에 가게의 문을 열고 청소를 하던 중 사장님이 가게로 들어오셨다. 사무실로 나를 부르셨다. 가게를 여러 개 운영하는 사장님은 가게에 없을 때가 더 많았다. 일하기 어떠냐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셨다.
 
30대였던 사장님은 어제 늦게까지 친구들하고 모임이 있었다며, 피곤해서 잠시 사무실에서 쉬어야겠다고 했다. 내가 사무실을 나오려는 순간 나의 팔은 잡아 채였고, 힘없이 소파로 넘어졌다. 사장님은 넘어진 내 위에 올라타서 거칠게 치마를 걷어 올렸다. 허우적대던 나의 팔은 이내 다른 손에 의해 제압당했고, 무릎에 눌린 가슴은 갑갑했다. 눈물이 났지만 이내 그 사람은 자신의 욕구를 쏟아냈다.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데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저항하거나 굴복하거나. 나는 굴복하는데 익숙해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다. 당황스러웠다. 무엇보다 죽기로 저항하지 못했다는 것이 스스로를 비난하게 했다. 내가 경험한 일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 지 몰랐다. 그 당시 그 사건을 나는 성폭력이나 강간이라고 부르지 못했다. 내가 아는 강간은 어린 아이가 저항하지 못하거나 영화에서나 드라마에서처럼 칼을 가지고 협박을 당하거나 폭력이 있거나 죽기 직전까지 여성이 저항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그것을 성관계나 섹스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분명한 것은 나는 그런 식의 관계를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사건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당황스러웠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다. 다만 다음에는 저항하리라, 이런 식의 관계는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씻지도 못하고 일을 마치고 나는 절망스러웠다.
 
성관계인지 성폭력인지 모를 정도로 성폭력에 대해 무지했고, 어디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나는 다음에는 그런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고, 다음 날에도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아르바이트를 갔다.
 
그러나 처음 자신의 뜻을 채웠던 그 사람은 이후에 더욱 집요하게 나를 강간하려고 했다. 사장의 어머니가 그 상황을 목격하게 되고, 그날 나는 가게에서 뛰쳐나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반복해서 일어나는지 원망했다.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아내와 이혼하고 나랑 결혼을 하겠다는 그 사람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며느리가 임신을 해서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너를 진짜 사랑하는 것 같다’고 말하는 그 사람의 어머니도 정상은 아니었다. 이 기막힌 상황에 화조차 내지 못하는 나도 정상이 아니었으리라.
 
모든 남자와 여자의 관계가 이런 것인지, 내 인생이 저주받은 삶인지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부끄러운 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더운 여름이 지나고 나는 매몰차게 제대로 된 이유를 설명하지도 못한 채 나의 첫사랑과 이별을 했다. 그리고 학교를 휴학했다. 나는 사랑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듯했다. 나의 반짝 빛나고 생기가 있던 시절은 그렇게 짧게 끝이 났다. 성관계와 성폭력, 제대로 된 명명도 하지 못한 채 깊은 생채기만 남긴 그 사건은 ‘내 몸은 나의 것이다’라는, 그리 거창하지 않은 명제를 알게 된 지금에 와서 ‘성폭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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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감 2012/09/29 [11:01] 수정 | 삭제
  • 여성들 자신이 주체성을 회복해야 하는데
    인류 역사 중 어느때에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살아 본적이 있어서
    '회복' 할 수 있는지...?
    이제라도 여성들이 주체성을 갖고 여성의 삶과 경험과 역사를 여성들이 이루어 나가는 때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주체의식을 가지려 안간힘을 쓰는 한 여성으로서 정말 지금 세상은 적응하기가 힘듭니다.
    모든 언어들, 이미지들, 주위의 구조나 사람들도 모두
    성적 이분할과 이중으로 구분된 성적 역할을
    암암리에 또는 공공연히 요구하고 있기때문입니다.
    난 그저 '사람'대접 받고 싶은데 '여성' 으로 대접합니다.
    보호하면서 무시하는 뭐 그런...... 여자가 뭘 알아, 뭘 해 뭐 그런.......
    정말 속세를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 하이드라이트 2012/09/27 [05:47] 수정 | 삭제
  • 성관계 따위, 수천 번 혹은 수만 번 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성적 자기 결정권>일 터.

    우리는 자유의사라고 착각하지만, 알고 보면 타인의 생각에 좌지우지되어 의사결정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 정신차리고 살지 않으면 이리저리 휘둘리는 삶을 살 확률이 높죠. 성적인 문제도 마찬가지.

    많은 여성들이 헷갈려 하며 성관계를 맺고 있을 겁니다. 성관계는 여성과 남성 모두 즐기는 행위라는 생각보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일환으로 여기는 남성들이 상당수. 남성에게 통제되는 걸 즐기는 여성들도 상당수. 그렇게 장단이 맞으니, 성폭력적 성관계가 시정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너울 님이 겪은 일은 그야말로 성폭력이라고 생각하구요.

    연애를 할 때도 여성이 남성에게 구애를 하는 걸 어색하게 여기는 사회분위기도 문제. 남성의 여성을 향한 스토킹이 빈번한 것도 마찬가지. 그런 스토킹은, 남성이 여성에게 들이대는 걸 폭력으로 보기보다 자신에 대한 호감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은 결과. 여성들이 주체성을 회복해야 할 문제이면서, 사회구조적으로도 모순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들과 멋진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 발칙한양 2012/09/25 [18:37] 수정 | 삭제
  • 누군가가 나를 믿어준다는 것은 참 큰 힘이지요. 저도 누군가의 믿음으로 지금 현재가 있고, 그 누군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너울님의 글이 성폭력피해생존자가 자신의 언어로 말하고, 그것이 뭔지 몰랐던 사람들에게 많이 읽히고 그들에게 힘이 될 것을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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