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20대는 가장 아름답고 생기 있는 인생의 찬란한 시절이라 일컬어진다. 인생의 황금기와 같은 청춘. 과연 그럴까? 신이 나에게 20대로 되돌아가게 해주신다면 나는 단호하게 거절할 것이다. 만일 지금 30대의 정신으로 20대를 살아간다면 조금은 달라질 수 있겠지만, 20대의 불안정한 정신으로 20대의 몸을 가지고 다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다시는 그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 자율보다는 억압과 통제에 익숙했던 시절,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서 성찰하지 못하고 성적순으로 미래가 결정되어버리고, 성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는 시대를 살아간 나에게는 20대는 기억하기도 싫은 가장 힘든 시기였다. 몸은 어른이었으나 정신은 아직 성숙하지도 못했고, 사회라는 곳에 적응하기에 너무도 나약했다. 무엇보다도 수동적인 여성성을 강요 받고 자란 세대이기에 나의 가치관하고는 상관없이 항상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것은 분열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끝없이 순결할 것을 요구당하였으나 순결할 수 없는 세상을, 나는 적응하지도 거부하지도 못한 채 부유하듯 떠돌았다.
첫 성적 제안을 받았던 기억. 대학을 입학하자마자 같은 과 동기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일식집에서 서빙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친구의 아버지가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동네에 어떤 아저씨가 있는데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면서, 상가의 주인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에게 집을 한 채 사줄 테니 살림을 차려볼 생각이 없냐고 했다. 학교 다니면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을 보니 형편이 넉넉지 않은 것 같은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또한 그 사람에겐 부인이 있으니 가끔 만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 날로 일을 그만두었다. 이제 스무 살짜리 자기 딸의 동기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정상이 아닐 거라고 여겼다. 동기에게 차마 말을 하진 못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동기도 나를 멀리하는 듯 했다. 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여겼던 그런 어른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버스정류장에서도, 때로는 택시 안에서도 데이트를 하자는 남자들은 너무도 흔했다. 그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런 제안이 있을 때마다 마치 내가 상품이 되어버린 듯해서 불쾌했다. 매번 자리를 피하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상한 기분을 회복 받을 수는 없었다. 특히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에서는 고용관계에 있었고 위계가 있었으므로, 너무도 쉽게 희롱을 당해야 했다. 방학 때가 되면 나는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새벽 4시에는 공장으로, 열 시에는 커피숍으로, 오후에는 학원으로. 이런 일상이 나에게 힘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단순하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거래만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공장에서 일을 할 때는 그 회사 과장으로부터 집요한 스토킹을 감당해야 했다. 공장에서의 일은 새벽일이라 당시 시급이 삼천 원이었다.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던 나는 그 일이 절실했다. 다른 일보다 보수도 많았고, 개강을 해도 새벽에 하는 일이기 때문에 계속할 수 있었다. 다른 아르바이트를 그만 두고 그 일만 해도 난 학교 다니는 데 지장이 없을 것이라 여겼다. 나는 누구보다 성실했고 단 한번의 지각하는 일도 없었다. 아주머니들과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손이 빠른 편이어서 일하시는 분들은 물론 회사 직원들의 믿음을 얻었다. 담당자는 내가 시간이 날 때는 아무 때나 저녁에도 일을 할 수 있게 배려해주었고, 아주머니들은 나에게 일부러 편한 일을 하게끔 배려해주셨다. 그 모든 상황이 바뀐 것은 회사 과장이 나에게 따로 만나자고 요청하고부터였다. 나는 만나자는 제안을 거절했으나, 그 사람은 새벽에 나와 출근길의 나를 붙잡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만나달라는 것이었다. 불쑥불쑥 퇴근길에 나타난 그는 화를 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자신의 이야기만을 반복하였다. 나는 나대로 화를 내어 보기도 하고 농담으로 웃어넘기기도 하였으나 그 사람의 집요한 요구를 단념하게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 사람은 나를 해고할 능력도, 여유시간에 일을 할 수 있게 배려해 줄 능력도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여자의 거절이 거절로 받아들여지는 사회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나의 이야기와 나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스토킹은 내가 어떻게 행동을 한다고 해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차 한잔 마시면 된다는 그의 요구가 받아들여지는 순간, 다음에는 데이트의 과정을, 그 다음에는 잠자리를 요구 받게 되었다. 일방적인 관계는 그 형태가 폭력을 동반하든지 아니면 집요한 요구의 형태이든지, 혹은 꽃다발을 동반한 낭만적인 고백인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 사람과의 이별은 처음 만나 차를 마시게 되었던 시간보다 더 지난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가능했다. 그 사람의 요구가 극으로 치달을수록 나는 그 사람이 더 싫어지고 미워졌다. 함께 일하는 아주머니들이 말씀하시는 시골총각의 순진하고 곡진한 애정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렇게 비추어질지라도 집착과 폭력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헤어지자는 나의 요구에 그 사람은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욕설로, 때로는 죽겠다는 협박으로, 때로는 죽이겠다는 말들로 시간을 할퀴고 있었다. 내가 나의 시간, 나 자신의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끌려 다니게 만든 것은 사랑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핸드폰을 바꾸고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나서도, 그 사람이 나타날 것 같은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대학로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엔 방송국 피디라는 사람에게 드라마 캐스팅 제안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연예인이 될 생각도 없었고, 연예인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외모도 재능도 안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알았다. 어릴 적부터 못생겼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기에, 그리고 아동성폭력의 경험이 다른 사람 앞에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했다. 그러니 내가 그런 제안을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집요하게 카메라 테스트라도 하자며, 일을 하던 나를 기다리던 그 사람은 내가 일을 마치는 시간이 되자 카메라 테스트를 핑계로 스킨십을 해왔다. 나는 화를 내고 경찰에 신고했지만, 그 사람은 처벌받을 만한 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뿐이다. 그는 피디도 아니었지만, 내가 손해 본 것이 없다는 것이다. 돈을 뺏기지도 않았고, 강간을 당하지도 않았으니. 내가 만일 연예인을 희망하는 사람이었다면 그의 제안을 쉽게 거절할 수 있었을까? 모르는 일이다. 20대의 직장 생활도 나에게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회식자리에서 술을 따르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여겨졌고, 어깨를 주무르라는 요청은 웃어넘길 수 있었다. 회사의 중요한 거래에서 거래처의 남자를 잘 모셔야 하는 일까지 부과되는 것이 현실이었다. 나에게 있어 20대는 내가 끊임없이 성적으로 대상화되는 존재, 그것을 거부하는 순간에는 쉽게 나의 위치가 흔들릴 수 있는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시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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