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할린 한인, 아직도 받지 못한 임금

[기록되지 않은 역사] 식민지 조선인, 동토의 땅에 발 딛다

최상구 | 기사입력 2012/12/01 [02:34]

사할린 한인, 아직도 받지 못한 임금

[기록되지 않은 역사] 식민지 조선인, 동토의 땅에 발 딛다

최상구 | 입력 : 2012/12/01 [02:34]
[75년전, 일제에 의해 강제이주 당하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할린 한인의 역사와 삶, 그리고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를 짚어보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기사를 연재합니다. 필자 최상구님은 지구촌동포연대(KIN) 회원으로 사할린 한인 묘지조사 후속작업, 영주귀국자 인터뷰 등 ‘사할린 희망캠페인단’ 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식민지의 상처, 동북아 재외동포의 역사
 
지난 11월 18일 서울 카르마전용관(구세군아트홀)에서는 재한조선족, 고려인, 사할린 동포 등 7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재외동포의 자유왕래와 국내 체류 동포들의 처우 개선을 기원하는 문화제가 열렸다.

중국 조선족의 출입국 문제와 ‘조선적’(朝鮮籍: 일본에 거주하면서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을 갖지 않고, 일본에 귀화하지도 않은 이들이 갖는 행정상의 적) 재일동포들의 입국문제 등 중국, 구소련, 조선적 재일동포의 모국과의 자유왕래 염원을 이루어내고자 문화행사를 개최한 것이다.
 
재외동포, 특히 동북아 지역의 재외동포 역사는 100년 전 국권을 상실하여 국외로 표류하고 강제 징용되어 체류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역사의 아픈 상처이다. 사할린 동포의 문제들 역시 이러한 일제 강점기 식민지 역사로부터 기인한다.
 
사할린, 제국주의의 각축장이 되다
 
‘사할린’(Сахалин, Sakhalin, 樺太-가라후토)은 러시아 연해주 동쪽, 그리고 일본 북해도 북쪽에 위치한 현재는 러시아의 영토에 속하는 섬이다. 사할린주(州)는 사할린섬과 쿠릴열도, 그 외 섬을 포함하고, 유즈노사할린스크시(市)가 주도이다. 면적은 87,100㎢으로 남한보다 조금 적다.
 
인구는 2005년 현재 약 58만명이다. 100여개 민족이 거주하며 주민의 약 80%가 러시아인이고, 한인은 5.4%로 그 비중이 두 번째이다. 석유, 석탄, 천연가스, 금속, 수산물, 임산물 등 천연자원이 풍부하다. 섬의 60%가 숲이기 때문에 목재 가공과 펄프 제조가 주요공업이며, 수산업도 활발하다.
 
청나라 때까지 중국의 미약한 영향력에 있던 사할린은 1800년대에 들어와 일본과 러시아의 경쟁이 심화되었다. 1800년대 중반에는 양국이 사할린을 공동 통치하다,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러시아가 쿠릴 열도를 일본에 주는 대신 사할린 전체를 얻었다.
 
그 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포츠머스조약으로 북위 50도 이남의 사할린(남사할린)을 식민통치하였다. 러시아 혁명기에는 1918년~1925년까지 일본군이 사할린 섬 북부 전역을 점령하기도 했고,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전하면서 남사할린도 소련 영토로 귀속되었다.
 
당시 동북아에서는 연해주로 동남진하는 러시아와, 제국주의로 거듭난 일본의 대륙으로의 팽창은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러-일전쟁을 통해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더니, 1910년 8월 일본은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했고 그 해 9월부터 토지조사사업에 착수한다. 1918년까지 계속된 토지조사사업으로 동양척식주식회사는 최대 지주로 등장하였으며, 조상대대로 농사짓고 살아온 땅에서 조선인들은 쫓겨나기 시작했다.
 
이렇듯 식민지 지주-소작제의 성립과정 속에서 소작도 얻지 못한 농민들은 고향을 떠나 화전을 일구기도 하고, 도시로 가서 노동자가 되거나 거지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만주, 연해주, 시베리아, 중국, 일본 등 동북아에서 재외동포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북사할린의 한인들: 연해주, 사할린, 중앙아시아까지
 
제정 러시아는 사할린 섬을 유형지로 사용하였다. 즉 죄수들을 유배 보냈던 곳이다.(1893년에 조선인이 살인은닉죄로 사할린으로 보내진 기록이 있다.) 이러한 동토의 땅에 조선인이 이주한 것은 1870년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1897년 러시아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조선인이 67명이었다.
 
초기 북사할린으로 이주했던 조선인들은 주로 두만강을 건너 연해주에 살다가 사할린에 이르게 된 사람들이었다.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까지는 북사할린에 더 많이 이주했는데, 블라디보스톡 등 러시아 원동은 물론이고 만주 지역의 조선인들도 겨울에 바다가 얼면 사할린으로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한인문화센터에 있는 1905년 부터 1945년 사이 한인들의 사할린 이주경로 지도. 붉은선이 강제동원 경로. 녹색선은 자유이주로.

러시아 혁명기의 혼란을 틈타 일본군은 1918~1925년까지 북사할린도 점령했다. 북사할린에 있는 일본기업의 탄광과 유전에서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모집했기 때문에, 북사할린으로 조선인들의 꾸준한 이주가 이어졌다. 이후 1930년대 북사할린은 소비에트 사회주의화가 시작되었는데, 이 시기에는 조선인 어업조합과 집단농장들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들어서면 소련은 조선인들에 대한 탄압을 공공연히 시작한다. 조선인을 일본을 위한 스파이, 반혁명 활동의 조직자, 소련시민의 적이라는 혐의로 체포하여 고문하고 죽였다.(극동지역 전체에서 약 2천5백여명이 총살당했다.)
 
만주사변(1931년), 중일전쟁(1937년) 등 일제의 팽창주의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소련은 국경 지대에 일제의 식민지에서 건너온 조선인들에 대해 신뢰할 수 없는 집단으로 판단한 것이다. 결국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다.(여기에는 집단농장에서 그동안 탁월한 능력을 보인 조선인들 통해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땅을 개간한다는 고려도 포함되어 있다.)
 
북사할린에서는 1937년 10월 블라디보스톡에 1천155명이 도착하여 중앙아시아로 이주하였다. 극동 지역 전체적으로 약 17만명이 열차를 타고 멀게는 6천Km떨어진 우즈베키스탄까지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이동하였다. 우리가 까레이스키라 부르는 ‘고려인’들의 탄생인 것이다.
 
이로 인하여 1945년 소련이 사할린 전체를 점령할 때까지 북사할린에는 조선인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을 못 견디고 고향을 뒤로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운명이 이처럼 가혹한 것일 줄 누가 상상을 하였을까?
 
남사할린의 한인들: 감시와 통제 속 노동력 착취
 
1910년대 중반 사할린 개발이 본격화 되자, 가라후토청은 동절기에도 노동을 계속할 수 있는 정주노동자를 고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일본인 노동자들은 교통, 사할린의 기후, ‘감옥노동’ 등의 조건들로 인하여 사할린으로의 이주를 기피하자 조선인을 유입하기로 하였다. 즉, 가라후토청의 적극적인 조선인 유입 정책이 1930년대 말 전시 강제동원체제 이전에 이미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가족동반 이주자의 경우 정주율이 높아 치안관리에 용이하다는 점을 들어, 가라후토 경찰 당국은 독신 노동자의 가족을 불러오기나 같은 마을의 친지들을 불러들이는 ‘연고 모집’을 적극 장려하였다. 이는 정주율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는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 5월 “국가총동원법을 조선, 대만 및 카라후토(사할린)에 시행하는 건” 등을 제정하면서, ‘필요한 때에는 모든 인적 물적 자원을 자의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법 형식을 갖추어 놓았다. 이를 통해 1939년 7월 <조선노무자모집요강>을 제정하여 1942년 2월까지 모집에 의한 강제동원이 시작된다.
 
1942년 2월에는 ‘선인내지이입알선요강’(鮮人內地移入斡旋要綱)을 제정하여, 1944년 9월까지 “관알선”에 의한 강제동원을 실시했다. 직업소개소와 각 사업장에서 개별적으로 하던 모집방식을 ‘조선노무협회’로 일원화하여 조선인을 강제 동원한 것이다.
 
이후 1943년 4월 “조선인노동자 활용에 관한 명령”을 통하여 강제적으로 근로기간을 연장하게 된다. 모집이전 사할린으로 건너갔던 이들도 현지징용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윽고 1944년 9월 ‘징용령’을 시행하였다.
 
강제동원된 한인들은 남사할린의 30여개 탄광과 벌목장, 그리고 비행장, 도로 등 여러 토목공사장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한인들은 일본인에 비하여 작업배치에 있어 위험성이 높은 현장에 배치되거나, 일본인에 비해 임금도 적었으며, 노동시간과 강도 역시 일본인보다 더하였다.
 
또한 강제동원 될 때부터 군대식 편제로 이들을 관리하였고, 숙소도 ‘나가야’, ‘함바’라는 군대 막사 형태의 시설에 감시와 통제 속에서 생활하였으며, 식사는 그 양이 절대 부족한 상태였다. 탄광지역의 한 증언에 따르면, 조선인은 한번에 50명씩 목욕탕에 들어가야 했고, 피부병이 많았지만 변변한 병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약을 구할 수도 없었다.
 
숫자가 적힌 통장만 받은 조선인들
 
게다가 임금을 지불하면 도주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서, 용돈 수준의 푼돈만 현금으로 지급하였고 나머지는 강제로 저축하게 하였다. 대표적인 것이 우편저금이다. 일제는 전쟁수행 비용으로 쓰기 위해 저금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동원 노무자들의 임금 중 30% 정도를 강제로 차감했다. 노무자들은 숫자가 적힌 통장만 받은 것이다.
 
현재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된 노무자들의 우편저금은 1만6천여명분 1억8700만엔(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4조4천506억원)이라고 일본 정부가 밝혔다. 사할린 우편저금은 공탁금과 달리 양국 모두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소멸되지 않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본은 “가입자들의 통장 원본이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사할린 우편저금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영주 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은 이제 한국 국적이므로 한일협정을 소급 적용하여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었다고 주장한다. 
▲ 우편저금 통장 사진, 국가기록원 사할린 한인 관련 해외기록물 전시회에서(2012.8)    

이와 관련하여 최근 영주 귀국한 사할린 동포들이 국가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사할린동포 영주귀국자회를 중심으로 약 2천5백여명의 사할린 동포들이 사할린으로 강제동원 된 이후 임금 및 적립금 등 미수금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일본과의 교섭을 하지 않는 것은 ‘기본권 침해’라는 것이다.
 
최근 헌법재판소에서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방치하는 것을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고, 대법원에서도 일제 징용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에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다는 판결이 있었던 만큼 그 결과가 주목된다.
 
사할린의 한인 문제는 좁게는 전시 강제동원에 의한 피해뿐만 아니라, 일제의 남사할린의 개발을 위해 식민지 한인에게 정책적으로 이주노동자가 되기를 강요했던 책임도 있다 하겠다. 따라서 강제동원 이전 돈을 벌기 위해 개인이 자유 의사로 간 경우도 있기 때문에 꼭 강제만은 아니라는 견해들은, 그 행위가 이루어진 식민지 지배라는 구조를 간과하고 있다.
 
또한 강제동원 이전에 이주했던 한인들도 현지 징용이 이루어지면서 사할린의 한인들을 동토의 땅에 억류된 것이다. 이 기사를 쓰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한 블로그에서 흐르던 바이올린 선율이 귓가에 맴돈다.
 
“울 밑에서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 참고문헌

국립민속박물관 편 <러시아 사할린.연해주 한인동포의 생활문화> 2001.
법무부 <사할린 교포의 현황과 법적 지위> 1986
이토 다카시, 김문규 옮김 <사할린 아리랑-카레이스키의 증언> 눈빛, 1997.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검은 대륙으로 끌려간 조선인들> 2006.
조원준, <일본 강점기하의 조선인 노동력 강제동원에 관한 실태연구: 일제말기 노동력 동원을 중심으로> 부경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지구촌 동포연대 <사할린, 사할린 한인> 2010.
지구촌 동포연대 <제 8회 재외동포 NGO대회 in 사할린 자료집> 2012.
최길성 <사할린 유형과 기민의 땅> 민속원, 2003.
한명숙 <사할린동포 영주귀국과 정착지원방안 모색을 위한 정책자료집> 2005.
한혜인 <사할린 한인 귀환을 둘러싼 배제와 포섭의 정치> 한국사학회,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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