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노인 구술사 기록하는 ‘요양보호사’

<나의 페미니즘> 진보정치 활동가 최현숙(2)

최현숙 | 기사입력 2013/02/22 [08:28]

여성노인 구술사 기록하는 ‘요양보호사’

<나의 페미니즘> 진보정치 활동가 최현숙(2)

최현숙 | 입력 : 2013/02/22 [08:28]
<일다> 창간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현재를 살아가는 다양한 개인들이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와 사회적 영향을 독자들과 공유하며 대안담론을 만듭니다. “나의 페미니즘”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의 지원을 받습니다. -편집자 주
 
50대중반에 ‘요양보호사’ 일을 선택한 이유
 
2009년에 요양보호사로 돌봄노동을 시작한 것은 여러 면에서 전략적 선택이었다. 2008년에 성소수자임을 커밍아웃하고 출마한 서울 종로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양한 ‘성 정치’ 의제와 함께 우리 선본이 공약한 주요 의제는 “가난한 사람들, 소외 받는 사람들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 진보신당 부대표 선거에 출마하여 제시한 주요 공약 중 하나가 “사회서비스 노동자 등 미조직 여성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지역센터를 통해 진보정치의 지역 거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둘 다 낙선한 선거였고 다른 사람들은 잊었거나 주목하지 않았을 테지만, 후보로서 끊임없이 외쳤던 내 소리들은 여전히 내 마음에 깊게 남아 있었다. 공약이어서가 아니라, 그 길이 올바른 진보정치의 길이라는 확신이었다. 남들을 설득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내가 확신하는 그 길을 나는 여전히 가기로 했다.
 
‘돌봄노동의 사회화’는 대체로 가정 안에서 여성(딸, 며느리, 아내, 어머니)들에게 무급으로 요구된 노동이 사회적 노동으로 전환되었다는 면에서 상당히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회적 일자리는 가장 싼 노동이어서(대체로 최저임금이다) 여전히 가난한 여성들의 노동이다. 또 일방적인 감정노동이라는 측면에서도 한계가 있다.
 
반면, 활동가인 나에게는 다양한 유형의 ‘가난한 사람들’(노인, 병자, 장애인 등)을 “돌보는” 노동이다. 그들과의 관계를 만드는 노동이고, 그 노동을 하는 다른 가난한 사람들(대부분 50~60대 여성 미조직 노동자들)과의 관계를 키우는 현장이다.
 
가장 싸고 불안정한 일자리라서, 대체로 자기 동네에서 비슷한 종류의 노동들(청소, 식당, 간병, 각종 바우처사업 돌봄노동) 사이를 드나든다는 ‘여성노동자의 지역중심성’은 현재의 폐색된 노동운동이나 진보정치의 주요한 돌파구 중 하나이다.
 
자본주의와 자본가를 강화시키거나 생태를 파괴하면서 내 밥을 버는 노동이 아니어서, ‘활동가’의 밥벌이로도 더없이 정당하다. 일방적인 감정노동이자 조직화하기 어려운 중고령 여성노동 부문이라는 문제점들은, 오히려 내가 그 노동을 나의 밥벌이이자 내 운동의 현장으로 선택한 전략적 이유들이다.
 
따라서 ‘요양보호사’는 이미 50대 중반에 들어선 여성주의/진보정치 활동가인 내가 전략적으로 선택하기에 최선의 노동이었다.
 
현장에서 요양보호사로 근무하면서 전국요양보호사협회와 공공노조 의료연대 ‘간병요양 전략조직화 사업’을 1년반 정도 반상근과 상근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작년 10월 공공노조 의료연대 돌봄지부(간병 요양 장애활동보조 노동자들의 노동조합)가 결성되었다. 현재의 노동조합이 갖는 한계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중고령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조합에 대해 각별한 애정과 기대를 가지고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노동조합 건설 준비단계부터 의사결정권을 가진 몇 명의 여성간부들에 의해 나는 의사결정 단위에서 배제되기 시작했다. 몇 번의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배제의 이유가 설명되거나 소통되지 않았다. ‘뿌리를 뽑아’ 옮긴 현장이자 여성들의 조직에서, 수긍할 수 없었던 배제는 내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
 
진한 울음을 제대로 울고 나면 마음이 털어진다. 2012년 연말로 노조 조직 활동을 접고 마포로 이사하여 중고령 여성노동자들과 함께하는 지역활동을 준비 중이다. 그리고 마포의 요양보호사로 취업하였다.
 
“똥걸레 빠는 노동”을 하는 사람이 받는 대우
 
이 노동을 하면서 내가 부닥친 한계는 싼 임금과 육체노동, 그리고 ‘취급’이다.
 
요양보호사 임금은 기본시급을 최저임금 4,860원에 맞추고 각종 수당(주휴수당 연차수당 등)을 포함해 시급 6,500원 선으로 거의 균일화되어 있다. 나는 하루 4시간, 주 5~6일만 일하고 있어 월 50만원 남짓 벌어 생활한다. 지역활동이나 글쓰기 등 다른 활동을 하려고, 밥벌이를 위해 더 많은 시간 내는 것을 포기하고 있다. 부족한 생활비를 어떻게 만들지는 계속되는 과제이고, 다른 모색들이 전혀 없지는 않아 불안하지만 다행이다.
 
육체노동을 통해 밥을 번 것은 요양보호사가 처음이다. 이용자나 보호자에 따라 그 노동의 내용과 강도는 많이 다르지만, 대체로 상당한 육체노동을 감수해야 한다. 나는 다행히 하루 4시간밖에 일할 수 없어, 그런대로 할만하다. 노동과 운동(sports)은 다르다고들 하지만, 운동 삼아 노동을 한다고 자위한다. 물론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돌봄노동을 해왔지만 그 노동을 즐기지 못했던 나로서는, 이 돌봄노동에 적합한 노동자가 되는 것이 매일의 성찰이고 노력이다.
 
스스로를 늘 깨뜨려야 하는 성찰의 지점은 또 있다. “똥걸레를 빠는 노동”을 선택했지만, “똥걸레나 빠는 여자”로 대하는 이용자나 보호자, 혹은 사회의 ‘취급’에 몇 번을 통곡하곤 했다. 일단 터져 나오는 통곡을 다 울고 나서 그 통곡의 이유를 차갑게 응시하며 따져보았다. 우선적 이유는 ‘취급’에 대한 자존감의 훼손이고, 이는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의 외피의 문제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식모’, ‘파출부’ 등의 이름으로 비슷한 노동을 해온 수많은 선배여성들과, ‘도우미’, ‘요양보호사’라는 다소 세련된 용어로 불리지만 노동의 내용은 별반 다르지 않은 동료여성 노동자들이 남몰래 울어야 했던 그 울음을 나도 우는 것이니, ‘나는 잘 살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사회적으로 해결할 문제는 별도의 과제이다.
 
여성주의 구술사: 선배여성들의 삶을 풀다
 
가난한 중고령 여성노동자들을 만나러 들어온 이 현장에서 문득 마주치게 된 것은, 선배 여성들인 할머니들이었다. 대부분 인생에서 한 번도 권력을 쥐어본 적 없이 한 많은 구구절절의 삶을 살아온 서비스이용자인 여성노인들이다.
 
그분들은 인생의 마지막에 만난 ‘요양보호사’인 나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권력자임을 직감하시고 때로 무리한 업무를 요구하거나 무례한 언행으로 권력을 남용하곤 하신다. 그 할머니들과 ‘관계’를 만들고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기 위해, 견딜 만하면 마음에 쿠션을 깔고 감정에 거리를 둔다. 일단은 그 유일하고 마지막인 권력을 인정해드리고 때로는 당하기도 하며, 또 때로는 함부로 하시지 못하게 할 다른 전략들을 쓴다.
 
그렇게 만들어진 관계와 신뢰를 바탕으로 내가 가장 궁금해하는 가난한 선배여성들의 삶의 이야기를 끌어내고, 이를 후배 여성주의자인 나와 함께 풀고 재해석하는 구술사 작업을 몇 분들과 진행하고 있다. “역사 없는 집단들의 말라버린 혀를 휘저어” 역사를 다시 쓰고, 개인사를 재해석하는 좌파적이고 여성주의적인 작업이다.
 
또한 내가 늘 만나는 동료인 “베이비부머 여성”들과의 여성주의 구술사 작업도 진행 중이다. ‘베이비부머 세대’라는 사회적 용어로 불리는 50~ 60대 남성들과 동일한 연령대로, 그들의 아내를 비롯해 주변에서 그들과 함께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주목을 받거나 발언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특히 베이비부머 남성들이 물러나고 난 사회 노동현장에 가난한 가계를 채우기 위해 나온 “늦어서 이제야 자유로워진”(육아 끝, 상당히 기가 꺾인 가부장, 사별 혹은 이혼 등) 여성들이다. 그 여성들 속에 잠재되고 억압된 에너지가 임금노동을 통한 사회활동과 만나면서 확인되는 욕망과 열정에 주목하고 있다.
 
그 가난한 여성들의 최우선의 동질적 아픔은 ‘가난’이 아니라 ‘여성임’이다. 그 “베이비부머 여성“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여성주의적 시선으로 함께 나누고 재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일은, 개인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더없이 소중한 작업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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