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삶, 우리의 삶

40대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 들려주는 이야기

윤김명우 | 기사입력 2003/09/15 [00:32]

그녀의 삶, 우리의 삶

40대 커밍아웃한 레즈비언이 들려주는 이야기

윤김명우 | 입력 : 2003/09/15 [00:32]
<지난 6일 한국여성 성적소수자 인권모임 ‘끼리끼리’가 주최한 ‘여성성적소수자 자긍심 갖기 프로그램’에서 커밍아웃한 40대 레즈비언 윤김명우씨의 강연이 진행됐다. 윤김명우씨의 동의를 얻어, ‘내가 살아온 이야기,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강좌의 일부를 발췌해서 싣는다. - 편집자주>
 
안녕하세요. 레즈비언 바(bar) ‘레스보스’를 운영하는 윤김명우입니다. 일단 제 얘기에 앞서 먼저 제가 하는 말들이 극히 개인적인 제 생각이라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제 이야기를 하자니 긴장도 되고 제 개인적인 생각이 여러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조심스러워 지기도 합니다.

너무도 일반적인 삶인데 ‘동성애’라는 단어가 앞에 붙어버림으로써 매우 복잡하거나 매우 특이한 삶이 되어버린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이 복잡하면서도 특이한 삶을 윤김명우라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아웃팅’으로 삶이 변하다

사춘기 시절 동성애를 느꼈고 지금까지의 삶으로 이어진 것이 벌써 30년이 훌쩍 흘렀습니다. 제가 20대 때만 하더라도 ‘레즈비언’ 혹은 ‘동성애’라는 말이 아주 생소해서, 그저 혼자 남들과 다른 자신에 대해 속앓이하며 굉장히 비관적으로 살았지요. ‘정신병은 아닐까?’하고 수없이 많이 자살을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대 초반에는 삶, 혹은 죽음에 대한 고민에서 벗어나 본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 또래의 친구들에 비해 빨리 ‘커밍아웃(coming out)’이 돼버렸어요. 제 의사와 상관없이, ‘아웃팅(outing)’ 당한 경우인데요. 저는 세 번의 아웃팅으로 인해 집에서 ‘문제아’로 낙인 찍혀 가출까지 해야 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중학교 때쯤으로 기억되는데, 그 무렵 제가 친구에게 느끼는 감정이 일반적인 소녀들이 갖는 우정이 아니란 걸 알았지요. 두근거리는 맘을 제가 좋아했던 친구한테 고백한 것이 화근이 돼 인생의 첫 번째 아웃팅을 경험했습니다. 그 친구가 선생님께 일러 부모님께 전해졌지요. 당시는 이웃집 숟가락이 몇 개 인지까지 알던 터라 동네에 소문이 순식간에 퍼져 아주 난감한 상황이 처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합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20대 중.후반이었어요. 처음 중학교 때는 미성년으로 혼자 어떻게 할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문제가 좀 있는 아이로 살아 갈수 있었지만요. 20대 중후반의 아웃팅은 제 인생을 변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본격적으로 이반의 삶을 살았던 건 가출 이후의 삶이었던 것 같아요. 남부럽지 않은 집안의 둘째 딸로 귀여움을 받으며 생활했던 저에게 가출 이후의 생활은 180도 다른 삶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때 시대적 상황이 여자들이 직장을 갖는 게 보편적인 상황도 아니었기에 그 고통은 더 했지요.

어쩔 수 없이 ‘남장여인’으로 살았던 삶

그 당시 여자의 업무라는 것은 ‘경리직’ 정도였어요. 게다가 여자는 직장의 꽃이라고 불리던 시기였기 때문에 일명 ‘바지씨’에 속한 남장여인이었던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직장은 더욱 한계가 있었지요. 제가 속한 ‘바지씨’는 요즘 언어로 ‘부치’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당시에 이반(동성애자)은 바지씨와 치마씨로 구분했는데, 사실 바지씨는 트랜스젠더에 가까웠다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지금은 레즈비언 관계에서 그런 고정적인 역할이 많이 사라졌지만, 우리 때는 너무나 일반적인 이성애 커플모습이 익숙한 데다 다양한 커뮤니티가 없다 보니 항상 ‘남자’와 ‘여자’의 역할모델을 따라 행동했던 것 같습니다.

트렌스젠더에 가까웠던 ‘바지씨’의 삶은 더욱 어려움에 부딪혔어요. 여성은 ‘조신한’ 혹은 ‘가녀린’ 여성상과 현모양처의 모습이 아니면 주변의 시선이 곱지 않았어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차라리 남자처럼 하고 다니는 게 더 편했어요. 그렇다 보니 정말 남자 같아 보이지 않으면 생활하는데 지장이 생기니 호르몬 주사를 맞기도 했었어요. 저 또한 그때는 호르몬 주사도 맞았어요. 그렇게 남들과 다른 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히 집과도 불협화음이 생겼습니다. 남들과는 다른 생각과 외모 등 성정체성 때문에 무수한 방황을 겪으면서 결국 집을 나오게 된 것입니다.

직장을 구하려니 주민등록번호 ‘2’라는 숫자를 단 남장여인으로써 어려움이 참 많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정식으로 면접을 봐서 신분증을 확인하는 직장을 가져본 건 모회사 자재과에 들어간 것을 제외하고는 없는 것 같군요. 전문직도 아니고 승진을 보장 받는 안정적인 직업도 아니었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정말 까마득했어요.

집안의 불화로 어쩔 수 없이 독립을 선택했을 때 제 주변에는 저와 비슷한 선배들이 많았어요. 시대적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가졌던 사람들도 많았고, 아예 트랜스젠더의 인생을 걸어갔던 사람도 많았던 것 같아요. '변태' 혹은 '정신병자'로 불리면서 혼자서 이겨내야 하는 그 심정은 아마 당해 보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분명 후회된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이성애자들의 삶에 견주어 보면 너무나 힘들게 산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저는 스스로 숨으려고 했었고 드러나지 않아야 집에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식 노릇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집과 멀리하고, 다니던 대학도 1학년 한학기만 다니고 포기했던 것이 지금에 와서 너무 후회가 됩니다. 내 삶을 조금 더 일찍 계획할 수 있는 시대적 환경이었으면 보다 당당하고 멋진 삶을 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드네요. 물론 지금의 제자리에 대해 후회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가 인정해주지 않는 사랑

제 연애 이야기를 잠시 해볼까요. 저는 여자는 결혼해야 하고 항상 결혼적령기가 되면 누군가는 옆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주입 받다 보니,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저는 항상 결혼을 생각을 했었고 제 옆의 친구는 처음의 사랑을 견딜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지쳐서 떠나갔어요. 물론 지금 저의 여자친구와 평생 가고 싶은 생각이지만, 그 친구가 만약 힘들어 하면 어쩔 수 없이 보내줘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깨닫게 되었어요.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 때는 다양한 모델들이 없었어요. 그래서 이반의 커플문화가 따로 있다기 보다 일반적인 가정과 그 형식이 똑같았어요. 말 그대로 부부 생활을 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부부처럼 지내다가도 애인집안의 반대로 헤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또 여자친구들이 힘들어 하면 시집을 보내주어야 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제 인생에서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한 사람이 생각이 나는데요. 그때는 제 아내였죠. 그녀와 저는 15년 동안 함께 살았고 40대 초반의 나이에 헤어졌어요. 이반커플은 ‘헤어지면 동거일 수밖에 없다’ 는 사실이 너무나 서글퍼지더군요 “더 이상 이런 삶이 싫다”는 너무나 간단한 이유 때문에 저는 그 친구를 붙잡지 못했지요. 법적 근거도 없고, 자식도 없으니 정말 간단하더군요. 하지만 헤어짐이 쉬웠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너무나 간단히 헤어질 수 있는 우리네 현실에 정말 통곡이 나오더군요.

저도 어느새 부모 세대의 나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미 동성애를 인정하는 많은 나라들도 생겼고 미국 같은 경우에도 이반인 자식을 가진 부모님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많이 있다고들 하더라구요. 저의 암울했던 청년기를 생각한다면 지금 부모님들을 이반에 대한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빨리 만들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됩니다. 또 저 같은 사람이 그런 활동을 같이 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동성애자 인권에 대한 관심을 당부하며

마지막으로 그냥 저 개인의 욕심으로 후배들에게 몇 가지 부탁을 할까 합니다. 지금 동성애자인 친구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은 이제는 숨어서 지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사회 속의 한 사람으로써 당당히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라는 것이에요. 또 본인의 ‘여성성’을 감추어야 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다양한 곳에서 우리 이반들이 요소요소에 중요한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을 때 우리가 더욱 단단한 커뮤니티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제 짧은 생각입니다.

또한 동성애 인권에 대해서 한번쯤은 생각해 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1996년 초반 레스보스가 생겼을 때만 하더라도 ‘끼리끼리’ 정기모임이 있는 날이면 정기모임 있는 시간까지는 레스보스에 손님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어요. 그때는 동성애자 인권에 대한 엄청난 갈증을 안고 있었던 시기여서 자연스럽게 또한 적극적으로 참여했지요. 요즘은 만남 자체에 대해서는 갈증이 많이 줄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아직 많은 이반들이 부당함과 괴리감으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부당한 인식과 그로 인한 정신적 경제적 손실, 양육권 등 기본적인 행복추구권에 대한 것이 보장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불이익을 당해도 법이 우리의 손을 들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은 동성애자들의 인권에 대한 문제제기가 활발할 때 가능하겠지요. 따라서 많은 이들이 동생애자 인권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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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흑수선 2003/09/20 [15:02] 수정 | 삭제
  • 보통사람의 인생을 다른 방향으로 휘게 만들고...

    많은 사람의 인생을...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중한 기사네요.
  • 애니 2003/09/15 [16:47] 수정 | 삭제
  • 일다에선 항상 좋은 글을 볼 수 있어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 토스트 2003/09/15 [11:11] 수정 | 삭제
  • 그 날 강의를 들으면서 끼리끼리의 다른 강좌보다 뜻깊었습니다.
    선배님의 삶이 지금의 현재의 여느 여성동성애자의 삶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점에 참 안타까웠고,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로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말씀을 절실히 공감했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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