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조경희씨는 한국에서 10년째 생활하는 재일조선인 3세이고 현재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중입니다. 2000년대 이후 많은 재일동포들이 유학이나 결혼, 취직을 통해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돌아온’ 재일동포들의 삶의 역사와 일상의 이야기들을 소개합니다.
어느 조선학교 여학생의 가족 이야기
금선희씨는 1980년 도쿄에서 태어난 재일동포 3세이다. 대학 시기 미국으로 유학한 이후 일본, 미국, 동남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사진과 영상, 무용 등을 통해 작품전시와 워크샵 등을 전개해왔다. 2007년부터 한국을 거점으로 활동하면서, 현재 대학에서 동아시아 영상문화에 관한 강의을 담당하고 있다.
같은 교등학교를 다닌 후배이기도 한 그녀와는, 지인의 소개로 작년 처음 만났다. 아담한 체구에 선이 고운 선희씨는 어렸을 때부터 키가 작아 애기같은 외모를 가진 것이 컴플렉스였다고 한다.
조선학교를 다니면서 조선무용을 배웠다. 춤추는 것을 무척 좋아했지만 서열을 중시하는 선생님과 안 맞았고, 북한 사상과 지도자를 숭배하는 춤을 춰야 한다는 것에 큰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사춘기에 겪은 가족과의 크고 작은 갈등 또한 그녀를 더욱 예민하게 만들었다.
“어렸을때 오빠가 우울증에 걸렸거든요. 아버지가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약칭, 친북한계 재일동포단체) 일군이셨고 집안 사정이 어려웠어요. 저는 공부라도 잘 했으니까 좋았지만 오빠는 공부도 못했어요. 그래서 집이 항상 난리였어요. 힘들었는데 친구한테도 말 못했죠."
선희씨의 오빠와 아버지와의 갈등은 어느 사회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부자간 갈등과는 조금 차원을 달리한다. 일본학교를 다니고 싶어 했던 오빠와 총련활동가 아버지 사이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인’ 마찰이었다. 자식을 일본학교에 보내면, 아버지는 총련 일을 그만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학여행으로 ‘우리나라’ 북한을 방문하고서
한편 선희씨의 어머니는 딸이 치마저고리를 입고 학교에 등교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선희씨는 집을 나갈 때는 일본식 교복을 입고, 학교에 도착하기 전에 치마저고리로 갈아입는 이중생활을 해야 했다.
“엄마는 왜 남자들은 안입는 한복을 여자들한테만 입히냐고. 위험하다고.(일본에서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조선학교 여학생의 옷을 찢는 등 폭력, 협박, 조롱을 비롯한 혐오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저는 그냥 귀찮아서 입겠다고 했는데, 치마저고리 입고 전철 타는 것이 위험한 것도 사실이었어요. 대부분 친구들은 학교 근처에 사니까 괜찮았는데, 저는 집이 좀 멀었으니까요. 이것도 저것도 안되는, 사방이 꽉 막힌 상황 있죠.”
조선고등학교로 진학한 후, 더욱 통제된 분위기 속에서 선희씨는 결국 치마저고리를 다시 입게 된다. 그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수학여행을 통해 처음으로 ‘우리나라’ 북한을 방문하였다. 1990년대 후반의 경제적 고난 속의 북한 방문은 17살의 조선학교 학생들에게 많은 충격을 안겨줬다.
“마을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는데 우리에게는 세끼 충분한 밥이 나오는 거에요. 너무 마음이 그래서 같은 반 친구들도 그냥 아무말 없이 방에서 누워있었어요. 친구들도 아마 비슷한 심경이었을 텐데, 너무 어려서 그것을 표현할 줄도 모르고…. 우리는 바로 일본으로 돌아가고 일본에서는 음식이 남아도는데, 이것을 나누지도 못한다는 것이 너무 충격이었어요. 그러다가 이 조직에 불신이 생겼어요. 북한이 유토피아라고 하면서도 그렇게 못 사는 것도 그렇고, 또 학교에서는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총련)일군 집안보다 부자집 아이들을 챙기는 경향도 있었어요.”
당시 스트레스로 심각한 눈병이 생겼다고 한다.
“편두통이 난 후, 갑자기 눈이 안보이게 되는 것이에요. 눈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검사도 많이 했는데, 아마 스트레스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 상황에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어요. 제일 힘들었던 것은 역시 가족이었어요. 다들 집안이 화목하고 엄마하고도 사이가 좋은데, 왜 나만 이럴까 생각했죠. 그런 속에서 가정폭력을 경험했는데 아무한테도 말못한 상황이 계속 되면서 병으로 나타났던 것 같아요.”
그래서 오랫동안 가족하고는 멀리해서 살았지만 최근 화해를 했다고 한다. 그녀는 가족 내에서 폭력을 경험했던 것도 ‘상황’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재일조선인, 총련 일군, 북조선(북한)하고의 관계. 조선학교에서의 경험과 가족 갈등은 그녀에게 작품을 만들게 하는 원인이자 원동력이다.
예술과 자연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하다
졸업 후 선희씨는 일본대학에 입학하지만, 대학 생활은 기대한 것과 많이 달랐다. 국제학과 수업은 별로 재미가 없었고 인간 관계는 얄팍했다. 큰 결심을 하고 대학교 3학년 때 미국 캘리포니아로 유학을 떠났다. 어렸을 때 무용을 포기한 대신에 다른 표현을 해보고자 영화과 수업을 많이 들었다.
“일본에서는 우울하니까 세계에 못 사는 사람들만 눈에 들어오는 거에요. 유니세프에 대해 알아보기도 했는데 취직이 어렵더라구요. 국제정치 세미나도 가봤지만 별로 희망을 느끼지 못했어요. 그럼 내가 뭔가 만드는 쪽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전달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영화 매체가 유효할 것 같다고, 방법으로서 영화를 택했어요.”
그러다 미술 쪽으로 방향을 잡게 되는 계기가 생겼다.
“미술학과에서 제작 수업이 있었는데, 사진과 영상으로 작업하다 보니까 교수님이 전공자가 아닌데 잘한다고 칭찬해주셨어요. 전시관에서 전공학생들과 같이 전시도 시켜주시고. 그 때 막연하게 재능이 있는가 보다 생각했죠.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작품 만드는 과정이 정말 좋았어요. 그리고 도쿄에서 자라서 그런지 캘리포니아의 자연에 많이 치유를 받았어요.”
선희씨는 미국 유학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선을 찾게 된다. 이민국가 미국에서의 인종 차별과 재일동포들이 일본에서 겪었던 차별의 구조가 비슷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도, 한편에서 재일동포들의 상황이 세계적으로 봐도 아주 특이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미국이라는 제3국에 몸을 두는 것으로, 자신이 놓여진 국제적 위치를 처음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금선희 “예술, 순례의 길” <한국예술연구>4, 2011년 12월. 참조)
캘리포니아 예술대학 석사 과정에 들어가 교육을 받은 후, 그녀는 자서전적 작품인 “Foreign sky”와 조선학교 시절의 차별 경험을 다언어로 표현한 “Beast of me”를 제작한다. 이 작품들을 가지고 일본에 돌아간 후, 선희씨는 어느 한국인 선생님과의 결정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그 선생님과 영적인 교감을 통해 본격적으로 자신의 활동 영역을 펼쳐나가게 되었다고.
재일동포 작가들과 오키나와 작가들이 함께한 식민주의와 전쟁, 분단의 폭력으로 고통받는 영혼들을 위한 ‘잔상의 소리’[残傷の音] 프로젝트에 참여하였고, 이 시도들은 후에 일본에서 출판되기도 했다.
한국에 오다- 나를 단련시킨 서울생활
2007년 서울대학교에 1년 유학한 것을 계기로, 선희씨는 한국을 자신의 필드로 포함하기 시작한다. 그 후 한국과 일본, 아시아 각지를 오고가면서 작품 전시도 하고 여행도 많이 다녔다. 한국 생활은 여러면에서 힘들긴 했지만, 정신적으로 배우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에 와서 제일 느낀 것은 우리는 재일동포라는 점을 너무 핑계로 삼고 살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었어요. 저는 운이 좋게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제 작품은 재일동포의 특별한 면보다는 민족이 공통으로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관심을 가져줬던 것 같아요.”
최근 몇년은 서울문화재단 성북예술창작센터에 입주하면서 ‘고통받는 자들의 치유를 위한 워크샵’을 진행해왔다. 필리핀 페미니스트 작가를 초대하고,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이혼한 동남아 결혼이주여성들과 연속 워크샵을 진행했다. 패치워크를 하면서 자신들의 꿈이나 희망을 담은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치유 프로그램이었다.
이주여성들에 이어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한 워크샵도 기획하였다. 북한에서 활약한 유명한 무용수와 함께 한 기획에 각별한 의지와 기대를 품고 준비했지만, 한국 예술계의 보수적인 분위기 때문인지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 경험은 현재도 선희씨에게 하나의 과제로 남아있다.
“정말 힘든 과정이었어요. 제가 탈북자 분들을 부르고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입장인데, 솔직히 말해서 (한국 사회에서) 조금 더 주목을 받을 줄 알았어요. 탈북자들의 정신적인 치유나 소통 문제가 정말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해서 활성화되기를 바랬는데, 거꾸로 소외되는 느낌을 받았죠.”
그 후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서 작품에 힘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정당한 평가와 관심을 못받은 것도 있지만, 저 자신의 문제도 발견했어요. 자신의 생활이나 내 문제도 버거운데 사람들을 그저 돕고자 했죠. 그녀들은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았을지 모르는데 일방적으로 도와주겠다고 접근했어요. 지금은 좀 쉬면서 나 자신의 컨디션을 지켜보고 있어요. 내가 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하니까요. 가르치는 것도 좋아하지만 작품 활동을 통해서 내가 그저 옆에서 빛이 되는 사람이 되려고 해요.”
진혼, 그리고 순환하는 삶
오키나와, 이주여성, 탈북자와 같은 사회적 주변에 대한 시선과 함께 선희씨의 작품의 밑바탕에 있는 것은 바로 ‘죽음’이다. 어렸을 때부터 수없이 가위에 눌려왔다. 죽음을 눈앞에 둔 과거의 영혼을 목격한 적도 있다. 이러한 영적인 경험들이 그녀에게 작품을 운명적으로 만들게 한다.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국가의 잘못으로 죽음에 몰린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4.3사건이나 한국전쟁도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이 겪었죠. 작품은 그들에 대한 진혼을 담은 것이 많아요. 아무도 애도해주지 않는 헤메는 영혼들이 많기 때문에.”
무명의 사자들을 애도하고 진혼하면서 이들을 새로운 생명력으로 전환시킨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과 기운을 중요하게 여기는 삶의 방식을, 그녀는 아시아 각지에 순례를 다니면서 배웠다. 몸과 마음이 지칠 때가 되면 성지에 가서 자신을 치유한다. 기가 세고 맑은 곳을 찾아다니면서 그냥 놀고 쉬고 땅의 기운을 느낀다. 낯선 곳에 가더라도 신기하게도 자신을 안내해주는 사람들이 꼭 생긴다. 간 순간에 인연에 있는 사람들과 만나게 되어 있다고 한다.
“처음으로 필리핀에 갔을 때 어떤 샤먼(shaman,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만났어요. 그때 뭔가 깨어나는 경험을 했어요.. 그 때부터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다른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생각하게 되었어요. 지금은 집중적으로 발리에 다니고 있는데, 언젠가 정착하고 싶어요. 발리 사람들은 삶 자체가 의례를 통해 이뤄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존중하고 경청해요. 정말 지혜로워요. 사고방식이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죠.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살고 싶다고 느낀 곳이에요. 모두가 자신에게 맞는 땅이, 장소가 있는 것 같아요.”
기가 맑은 장소, 그리고 사람들과의 교감을 통해 선희씨는 자신이 깨어나고 온 몸이 통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그것이 재일동포로서의 특수한 삶의 경험과 고민의 주박에서 그녀를 조금씩 벗어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적인 경험을 통해 자신을 바꾸고 또 이것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것. 그녀의 삶은 이렇게 순환한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왜 이런 환경에서 태어났을까, 라는 고민을 해왔는데 어느 영적인 경험 속에서 깨달은 것이 있어요. 나는 피해자가 아니다. 그 어떤 배움을 경험하기 위해 이런 환경에 태어났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처음으로 피해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어요. 모두가 어떤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고 물론 처음엔 고통을 겪지만 점점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되죠.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이라 생각해요.”
“제가 추구하는 것은 Transformation(변환), 죽음이나 사자들을 연결시켜 새로운 생명력으로 바꾸게 하는 것, 사자를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 네가티브한 것을 끊임없이 제거하는 것이 현대생활이고 도시생활이지만, 부정적인 것도 순환해야 새로운 생명력이 나옵니다. 삶과 죽음을 연결시키는 것이 삶의 테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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