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 오렛 님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연구원입니다. [편집자 주]
아동성폭력 피해자이기도 한 저자, 패멀라 슐츠가 가해자의 말을 들어보자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머릿속으로는 누구나 수긍하듯,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 범죄자를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 같은 범행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이 과정의 동력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하는 것은 범죄의 예방책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아동성폭력 가해자의 이야기를 궁금해 하지도, 듣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심각한 정신병이 있거나, 조절할 수 없는 충동과 잔인함으로 무장한 괴물이라고만 여겨져 왔다. 그래서 아동성폭력을 불행한 비극으로 두려워하며 가해자를 공동체에서 분리시키기 급급했다. 아동성폭력 가해자의 목소리는 사회가 들어봄직한 말이 아니며, 그 뻔한 이야기는 이해할 가치가 없는 변명들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그들이 괴물이 아니라는 증거가 드러난 후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아동성폭력의 80% 이상이 주변의 아는 사람들, 가족과 친척, 동네이웃에 의해 발생한다는 뉴스가 반복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가해자의 이야기를 들으려하지 않는다. 그들이 사회 밖의 타자가 아니라 나의 일상 속에 들어와 함께 살아간다는 진실은 오히려 회피되고 있는 듯하다.
성폭력 가해자를 이해한다는 것
아동성폭력을 숙고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에게 떠오르는 아동성폭력의 장면들은 폭력과 공포로 가득 차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감정을 이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해자에게 분노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해 보인다. 가해자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그에게 범죄행위를 변호할 기회를 주는 것만 같은 생각도 든다.
이제까지 우리가 들어온 가해자의 말은 대개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말이거나(그것은 놀이였다, 피해자도 좋아했다), 뻔뻔하게 인정에 호소하는 말(나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 처음 한 실수였다) 따위다. 그리고 이것들은 납득할 수 없는 방식으로 실제 형량 감량의 사유가 됐고, 성폭력 생존자와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을 좌절시키고는 했다. 그래서 누군가 가해자의 말을 들어보자고 할 때 반감부터 생기는 것은 정당한 반응일 수 있다.
그러나 저자가 아동성폭력 가해자를 만나기 위해 교도소로 향할 때는, 작고 답답한 방에서 녹음기를 두고 수많은 시간 질문을 주고받을 때는, 그들의 변명을 듣고자 함이 아니었다.
<괴물이 된 사람들-아홉 명의 아동 성범죄자를 만나다>(원제: Not Monsters, 패멀라 D.슐츠 저. 권인숙 외 역. 이후. 2014)에 담긴 아홉 개의 인터뷰는 어떤 환경과 이유에서 아동성폭력이 발생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오랜 시간 가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분석한 결과물이다.
그들의 삶은 서로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성폭력 가해를 둘러싼 공통된 패턴이 발견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폭력을 허용하거나 묵인하는 논리가 사회에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아동성폭력에 대응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할지 그 단서들을 발견할 것이다.
따라서 가해자의 말을 듣자는 것은 가해자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자는 것이 아니다. 더불어 가해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이 강조하는 생애의 ‘불우함’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말한다. “(가해자가) 나에게 한 짓은, 변명은 불가능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는 있다.”
우리가 가해자를 이해하고자 함은 바로 그 ‘이유’를 대면하는 것이다. 가해자들이 ‘이유’라고 말하는 아동성폭력에 대한 호기심과 충동, 쾌락이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구성되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왜 아동성폭력이 발생하는가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범죄는 가해자가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더라도 끔찍하고 추악하다. 그러나 그들의 개별적 성격과 삶의 경험들을 쫓아가다 보면 그런 비정상적인 행동에 이르게 되는 경과가 어떤 측면에서는 이해할 수 있다고 느낄지 모른다. 그것은 아동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우리 문화 안에서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떠올리는 아동성폭력 이미지 속 가해자는 어떤 피해자도 맞서 싸울 수 없는 힘을 가진 권력자다. 그들은 상황을 주도하고, 쾌락을 즐기고. 폭력의 힘을 누린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들에게 이런 힘을 주었을까.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한 존중을 포기하고, 뒤틀린 가치관에 의지를 맡긴 이 나약한 인간이 어떻게 이런 권력을 갖게 되는가.
미국의 임상심리학자 니콜라스 그로스의 아동성범죄자 유형화에 따르면, 아동성범죄자의 다수가 ‘고착적’이라기보다 ‘퇴행적’인 특성을 갖는다. 즉 아동성폭력 가해자는 평생 아이들에게 성적으로 끌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남자로서의 자신감을 훼손당했다는 상황적 판단에서, 어른보다 위협적이지 않은 아이를 추행함으로써 자신의 남성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더불어 여기에는 아동에게 ‘순수’와 ‘타락’으로 과장된 성적 판타지를 씌우는 성문화도 작동하고 있다.
결국 이들은 아동성폭력 이미지에서 만들어진 남성성, 그 권력의 힘과 쾌락을 즐기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아동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구성이 아동성폭력의 현존과 효과에 합법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우리의 이러한 ‘인식’이야 말로 아동 성학대에 억압적 권위를 부여하는 원천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속적으로 아동성폭력 가해자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 가해자를 괴물로 그리는 자극적인 언론 보도와 가해자를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것을 중심으로 한 아동보호법. 그리고 우리 안에 증폭되는 아동성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진실에 대한 회피, 이 모든 것에 제동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가해와 피해, 혼동은 없다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어린 시절 나를 성추행한 가해자에 대해 궁금한 적이 없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것을 직면할 용기가 없다기보다 선뜻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그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무엇이 그런 범죄의 원동력이 되었을지, 자신의 행동을 뭐라고 설명할지…. ‘그럴 듯한 말들을 하겠지’ 라고 냉소적으로 넘기고는 했다.
이 책을 읽고 이런 나의 태도를 심각하게 반성하게 된 것은, 가해자에 대한 냉소가 피해자에 향해서도 유사하게 작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였다.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보려는 의지는 생략한 채, 그것을 ‘알고 있다’며 고개 돌리는 사람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피해와 가해의 말이 비교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을 때는 사회적으로 의심받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그들을 지지하고 응원하겠다는 의지가 생긴다. 그것은 공동체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는 책임이다. 그리고 가해자의 이야기를 들을 때도 같은 맥락의 ‘다른 책임’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인터뷰가 보여주듯 성범죄는 개인에게서 아무런 역사와 맥락 없이 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많은 가해자들은 자신이 성장 배경의 ‘불우함’을 호소한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성폭력 가해에 대한 ‘변명’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다수가 어린 시절 가정폭력에 노출되어 있었던 것, 한 명의 아이로서 안정적인 유대 관계를 필요로 했다는 것은 분명 공동체적 책임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저자가 가해자의 말을 들어보려 한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어린 시절 자신을 성추행한 가해자와 친밀한 관계였고, 그에 대한 애정과 사후의 죄책감을 밖으로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가해자 연구를 진행하면서, 그가 한 행동의 맥락과 이유를 이해하면서, 저자는 평화로 이르는 길을 찾았다고 밝힌다. 피해자가 특히 침묵하고 자책하는 (아동성폭력을 포함한) 친밀한 관계의 성폭력에 대응하는 데 가해자 연구가 보다 긴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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