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술과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방지 캠페인 <#그건_강간입니다>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캠페인의 기획단이 그동안 논의한 내용과 변화를 위한 질문과 제안을 담은 이야기를 5회에 걸쳐 싣습니다. -편집자 주
설 연휴 고향집에서 남동생에게 들은 충고
설을 맞아 고향에 내려간 날 막내동생이 반겼다. 둘째에 비해 막내와 시간을 보낸 적이 별로 없는 난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차였다. 때문에 둘이서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시간이 내심 반가웠다. 한적한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갑자기 동생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말했다.
“이 말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데, 언젠가 한 번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누나, 메갈하는 애들이랑 어울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물었다. “왜?”
메갈(메갈리아.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사이트)로 인한 긍정적인 변화는 인정하지만 자신은 불편한 글이 너무 많다는 게 그 이유였다. 동생은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인터넷을 많이 하는 남자애다. 자주 가는 인터넷 커뮤니티의 글을 보며 어느 정도 가치관이 형성됐을 것이고, 누나가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누른 게시물을 보며 심란해하다 말을 꺼낸 게 분명했다.
나는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 지 생각하다가, 일단 내게 얘길 꺼내줘서 고맙다는 말로 시작했다.
여성혐오: 거리를 지나다 뺨맞아도 이상할 게 없는
꼴페미. 여성우월주의자. 남자들의 적.
고등학생 때 난 몇몇 남자애들의 주도 아래 몇 개의 단어로 규정됐다. 이유는 단지 ‘이런 일은 여자가 해야지’ 또는 ‘여자는 이런 거 하면 안 돼’ 따위의 말에 대해 내가 ‘왜 남자는 안 하는데?’ 혹은 ‘여자는 왜 하면 안 되는데?’ 식의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난 정말 의문이 들어서 물었던 것인데 그들 눈엔 기존 체계를 부수려는 위험한 반란자로 보인 모양이다.
개인에게 수식어를 붙이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남자애들은 날 피하기 시작했다. 가끔은 여자애들마저 ‘여성스럽지 못한’ 날 타박하곤 했다. 친했던 남자애마저 나를 외면하자 괴로워졌다. 여자니까, 남자니까 식의 이중적인 규정에 대한 나의 물음은 정당한 반응이 아니었던 건지, 그렇다면 지금 내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한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만약 지금의 나라면 왜곡된 정의를 가진 단어들에 대해 따지고, 내가 먼저 그들과의 관계를 거절했겠지만, 그때의 난 그저 견뎌냈다. 내 앞에서 내 외모를 비웃는 입들을, 도움이 필요한 나의 시선을 외면하는 눈동자들을.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오면서 그들과의 인연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하지만 난 여전히 꼬리표가 많았다. 서울에서도 난 여성이었고, 지방 출신이었으며, 게다가 이대생이었다. 나의 모든 게 약점이었다. 지나가다 일베충에게 뺨을 맞아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두려웠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수그러들었다. 안으로, 안으로….
대학에서 강의 시간에 여성주의를 배우고 동아리 사람들, 친구들, 선후배들과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안전한’ 학교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난 웬만하면 학교 안에서만 머물렀다. 남성들과 만날 일을 되도록 만들지 않았다. 한 달을 남성과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지낸 적도 있다. 어쩌다 만난 사람들이 불합리한 말을 하더라도 나는 그저 수긍하고 넘겼다. 집에 와서 그렇게 반응해선 안됐는데 하고 후회하는 건 그 이후의 일이었다.
메갈리아: 자기검열에서 벗어나 당당해져라
그러던 중 메르스(MERS, 중동발 호흡기 증후군) 사태가 터졌다. 그리고 메르스 갤러리(당시 메르스를 최초로 국내에 들여온 감염인이 여자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여성 전체에 대한 비하와 욕설이 난무했다. 그러나 그 소문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며, 메르스 갤러리의 여성유저들이 온라인 공간의 여성혐오에 대해 본격적으로 대항하고 나섰다)가 탄생했다.
지금까지 어떻게 여혐을 참았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메르스 갤러리에 몰려들었다. 갤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여성혐오에 반대하는 ‘메갈리아’라는 새로운 사이트가 생겨났으며, 끝없는 미러링(거울처럼 상대방의 언행을 똑같이 따라 하여 비추는 것)이 진행됐다. 그리고 단 며칠 만에 수많은 남성들을 적으로 두게 됐다.
그들은 일베(일간베스트저장소. 정치, 유머를 다루는 인터넷 커뮤니티로 민주화운동 비하, 성차별, 지역차별 등 극우 성향을 띰)의 언어를, 폭력적인 언어 권력을 뺏어왔고, 여성을 옥죄는 코르셋인 줄도 모르고 사용된 문장들을 끄집어내 그 억압성을 인지시켰다. 나는 이러한 사실들을 다른 커뮤니티와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되었다. 우리는 흥분했다. 메갈을 언급할 때면 목소리가 높아졌다. 미러링을 이렇게 훌륭하게 해내는 걸 보니 분명 똑똑한 사람들일 거라고, 멋있다는 말을 연발했다.
난 아직 고등학생들의 언어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종종 스스로의 몸을 재단하고 행동을 검열했다. 그러나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줬다. 어딘가에서 누군가도 나처럼 스트레스 받아가며 치열하게 싸우고 있을 터였다. 나는 상대방에게 내 몸을 품평하지 말라고, 친구 몸을 훑으며 섹시하다고 말하는 식당종업원에게 사과하라고, 남성과 여성의 임금 차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남성에게 그건 잘못된 거라고 말할 줄 알게 됐다.
소개팅에서 내게 무례하게 구는 사람이나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를 만나도 욕먹을까 두려워 방긋방긋 웃으며 이야기를 들어주고, 밥값보다 더 비싼 커피를 사주던 나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일베충은 컴퓨터 앞에서 키보드나 두드리는 하찮은 찌질이가 되었다.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페미니즘이 주제가 되는 빈도수가 높아졌으나, 어느 누구도 똑같은 주제가 반복된다며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활동을 한다는 건, 나에게 덤벼들 상대방의 존재가 무서웠기 때문에 망설여졌다. 전선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며 활동하고 있는 익명의 사람들에게 부채감이 생겼지만, 난 이 정도에서 만족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어’
메갈의 존재가 익숙해질 때쯤 나는 유럽여행을 떠났다. 프랑스 리옹에 도착했을 즈음엔 여행의 피로감에 지쳐있을 때였다. 프랑스인 호스트와 함께 집 근처 바에 가서 간단하게 한잔하는데, 이야기 주제는 어느새 페미니즘이 되어 있었다. 게스트하우스 주인은 프랑스가 아직 멀었다고 얘기했지만, 내가 한국 현실에 대해 얘기해주자 프랑스는 괜찮은 편이라며 바로 말을 바꾸었다.
‘한남충’(된장녀, 김치녀 등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한국남성들을 벌레에 비유한 미러링 용어)같은 사람들이 프랑스에도 존재하긴 하지만, 이들은 극소수인데다 스스로 숨어들기 때문에 현실에서 마주칠 확률은 적다고 했다. 거기에 덧붙인 말이 “그러나 나는 우리나라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믿어”였다. 정말 문자 그대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다음날 여행은 이 말에 대해 생각하느라 제대로 다니지도 못했다. 프랑스인조차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싸우고 있는데 난 겨우 여기서 만족하려 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
며칠 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신정동 연쇄살인사건’(2005년~2006년 사이에 벌어진 두 건의 납치강간살해 미제 사건)을 다룬 “엽기토끼와 신발장” 편을 방영했다. 인터넷 커뮤니티는 프로그램 관련한 얘기, 성폭력에 대한 개인적 경험과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로 뜨거웠다. 그날 밤엔 꽤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밤거리는 물론 낮에도 조심해야 하는 현실이 분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재적 범죄자를 두려워하기보단 그들이 나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싶었다. 물론 메갈이 등장하기 이전이었다면 가해자들을 무서워하며 구석으로 쭈그러들었겠지만, 이미 내 사고방식은 바뀌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내가 활동할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았다. 여행 중에도 온라인에서 페미니즘 활동을 시도해보았지만, 악플에 한 번 시달리고 나니 역시 여긴 내 분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연결이 원활하지 못해 SNS에 들어가지 못한 지 3일 만에 인신공격이 진행되고 있었다. 상대방이 접속하지 않았는데도 3일이나 거기에 매달리다니, 정말 할 일 없는 사람들이다.) 눈앞에 가시화된 상대가 있어야 핏대 세우며 싸우는 내 성격상, 모니터 뒤의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보단 현실에서 움직이며 발로 뛰는 것이 더 적절했다.
때마침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술과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방지 캠페인’에 참여할 자원활동가를 모집하고 있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지원서를 보낸 후 며칠 뒤에 전화가 왔다. 첫 회의 장소와 시간을 알리는 연락이었다.
#그건_강간입니다 캠페인 활동은 즐겁다. 가위를 들고 여차하면 “CUT!”이라 외치며 길거리를 걷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과거와는 반대로 내가 가해자들을 위협하러 다니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 홍대 길거리에서, 발렌타인데이 신촌에서, 평일 저녁의 술집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 건물에서 캠페인을 벌이며 사실 나의 기대치는 낮았다. 간담회나 길거리 캠페인, 행진을 기획하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상처받지 말자’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움직이고 있었다. 간담회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의자가 부족했다. 우리의 행진 관련한 기사 댓글창에는 부끄러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똥을 쌌지만, 그만큼 세간의 관심사가 되었다. 전국구 어그로(공공의 주목을 받기 위한 튀는 행위)를 끌자던 캠페인 기획단의 목표는 4개월간의 여정 끝에 현실이 되어있었다.
#그건_강간입니다: 세상을 흔들기 위하여
남동생과의 대화는 결론을 맺지 못했다.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대화 속에서 서로 스트레스만 받았을 뿐이다. 동생은 떨떠름하게 ‘서로의 가치관이 다를 수 있다’고 얘기했고, 난 ‘네가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라면 페미니스트’라고 대답하며 이야기는 끝났다.
답답하지만 여기서 둘이 더 대화를 나눈다 해도 무언가 바뀔 것 같진 않았다. 대신 난 동생에게 <이갈리아의 딸들>(노르웨이 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소설. 남녀 성역할 체계가 바뀐 이갈리아라는 가상공간이 소설의 무대이다)을 사주었다. 이게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순 없겠지만, 적어도 다음번의 대화는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최근 한 모임에서 ‘김치녀’가 언급됐을 때 나 외에 어느 누구도 그 단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나와 친구들은 페이스북 페이지 <메갈리아4>의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면서도, 이로 인해 끊길 누군가와의 인연을 무서워한다. (그런 지인은 필요없다는 걸 머리로 아는 것과 한 사람과의 인연이 끊겼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SNS에서 메갈을 욕하는 지인과 다투고 나면,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뭐라고 나에 대해 욕을 할지 두렵다.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날 차단했을 거라 생각하면 인간관계가 정리됐다는 사실에 마음이 후련한 한편 불편하기도 하다.
그러나 작년 한 해 동안 나 자신과 주변의 변화는 놀라울 정도다. 숨어있던 내가 밖으로 나섰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네가 너무 예민한 거야’ 라고 말하던 주변 사람들이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라고, ‘너의 활동을 지지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이 늘어날수록 우리의 판은 점점 커지고 우리의 주장은 당연시될 것이다.
여성을 비하하고 차별하고 추행하는 자신의 행동이, 사고방식이, 사용하는 용어가 부끄러운 것이란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당당한 사람들에게 잘못을 찔러주고 꼬집어주며 알려주다 보면, 언젠가는 세상이 바뀔 거라 믿는다. 작년에 한 번 흔들어보았고 어느 정도의 쾌감을 맛보았으니, 두 번 세 번 흔드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을 거다. 또 다시 세상을 흔들기 위해 나는 준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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