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불명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반다의 질병 관통기> 만성통증 환자가 늘고 있다

반다 | 기사입력 2016/12/23 [11:21]

‘원인불명 통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반다의 질병 관통기> 만성통증 환자가 늘고 있다

반다 | 입력 : 2016/12/23 [11:21]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편집자 주

 

삶 전체를 엉망으로 만든 ‘원인불명 통증’

 

“원인 못 찾는 통증은 어떻게 해야 하죠?”
“네? 글쎄요…”

 

내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다. 상대도 그걸 모르지 않을 것 같다. 어쩌면, 말할 곳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통증을 의심 받지 않고, 그로 인한 어려움을 잠시라도 말하고 싶은 걸까. 그래서 질병권(疾病權) 강의를 끝내고 인근 지하철역에서 이어폰을 꽂고 열차를 기다리는 나에게, 몹시 조심스러워 하면서도 굳이 말을 걸어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얼굴을 잠시 응시한다. 강의 때, 유난히 열심히 메모하던 참여자다. 진지한 눈빛이다. 나는 강의 후 피로감이 한 가득이었고, 피로감이 짙어지면서 왼쪽 등의 통증도 서서히 날개를 펴는 중이다. 통증이 있을 때 내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구겨진다는 걸 알기 때문에, 어설피 미소를 지어본다. 그에게 통증과 지내는 건 어떠냐고 묻는다. 그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 최근 원인 불명의 만성통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이미지: 조짱

 

그는 2년 전부터 몸에 이상증세가 왔단다. 처음엔 방광염, 식도염으로 병원을 들락거렸다. 방광염은 숙면을 방해했고 식도염은 소화를 방해했다. 치료를 해도 재발이 잦았는데, 그렇게 반년쯤 지났을 때부터 목, 어깨, 종아리 통증이 시작됐다. 이따금씩 목이나 어깨가 빠져 나갈 듯 아팠고, 종아리는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내과부터 정형외과까지 가봤지만 ‘이상 없다’고 했고, 통증클리닉은 갈 때 잠깐 효과를 볼뿐이었다.

 

그의 통증은 시간이 흐를수록 빈도가 잦아졌고 강도도 세졌다. 통증 때문에 잠을 이루기 어려운 날이 많아졌다. 잠을 제대로 못자니까, 일상생활이 힘들었다. 업무시간에도 집중하기 어려웠고 실수가 잦아졌다. 출퇴근 지하철에서 통증이 시작되면, 죽을 것 같았다. 만원 지하철이라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을 수 없는데, 옆 사람과 살짝만 부딪쳐도 너무 아팠다. 옆 사람이 잘못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났다. 그는 그런 자신이 너무 낯설고, 싫었다고 한다.

 

그는 종합병원의 내과와 정형외과에서 상담을 받고, 피검사부터 MRI까지 정밀 검사를 했다. 결과를 듣기 위해 진료실에 들어가면서, 메모지에 칸을 나눠 ‘원인, 치료법, 일상관리’라고 적었다. 셋 중 하나라도 속 시원한 답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의사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텅 빈 메모지만 들고 나왔다. 그는 불안했다. 신문 건강 칼럼에서, 통증은 몸이 보내는 신호이니 반드시 원인을 찾아서 치료해야 한다는 글을 본적 있다고 했다. 그리고 TV에서 의사들조차, 암처럼 큰 질병은 최소 두 군데 이상의 병원을 가라고 조언한다고 했다. 자신의 질병이 암은 아니지만, 병원에서 진단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무섭다고 했다. 불안과 답답함이 엉킨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처음엔 그를 걱정하던 지인들도 종합병원 결과 이후, 한마디씩 했다고 한다. 원인불명 통증 환자들이 으레 듣는 그런 말이다. 건강염려증이다(혼자 백 살까지 살아라!), 예민해서 그렇다(성격 고쳐라!), 다들 조금씩 아프면서 산다(그 정도도 못 참냐!). 그는 최근 인간관계가 삐그덕거리는 건 물론이고, 직장도 그만뒀다고 했다. 삶 전체가 엉망이 된 기분이라고 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자신에게 인생 계획이 있었고 열정이 있었는데, 지금은 통증과 절망만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가 내게 묻는다,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만성통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는 견디기 힘든 통증으로 잠도 잘 수 없고, 일상생활도 어렵다. 출근해서 일하는 것도 힘들어서 실직자가 됐다. 그런데 병원에서 치료법은커녕 이상이 없다고 한다. 통증은 그의 인생을 헤집어 벼랑 근처에 몰아놨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 통증에 의구심을 표하거나 무시한다. 내가 오히려 그에게 묻고 싶어졌다. ‘지금까지 어떻게 견디셨어요?’

 

그는 한때 자살을 생각한 적 있다고 했다. 지긋지긋한 통증 그리고 그 통증이 망가트린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자살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애인, 엄마, 고양이를 떠올리며, 자살충동을 견뎌냈다고 한다. 자신의 자살이 그들에게 안길 ‘통증’을 떠올렸더니, 죽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명확해졌다고.

 

삶을 헤집은 만성통증으로 인해 자살충동까지 느꼈다는 그가 유난할 걸까?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그처럼 심각하진 않았지만, 만성통증으로 3,4년 정도 고생한 적이 있다. 지금은 건강이 호전되면서 통증도 가벼워졌지만, 통증을 겪을 당시는 내 삶에 질병과 통증만 가득찬 것 같아서 숨이 막혔다. 특히 그처럼 원인이 불명확한 만성통증은 기댈 곳이 없다. 고통스러운데 아무대도 기댈 곳이 없는 사람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실제 대한통증학회 따르면 성인의 10% 정도가 만성통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중 35%가 자살충동을 느낀다(복수응답)고 한다.

 

▶ 한국통증학회가 2011년 통증환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복수응답 설문)  ⓒ이미지: 조짱

 

그에게 무엇이든 도움 되는 말을 해주고 싶은데, 건넬 말이 없다. 나의 통증도 현대의학에서 명확한 원인을 밝히지 못했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시기적으로 다른 질병과 함께 왔고, 질병 치료 과정에서 통증도 가벼워진 상태라, 내 사례가 그에게 도움이 될 수 없다. 내가 그나마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는 한창 통증에 시달릴 당시 읽었던 자료의 내용이나, 고민했던 게 전부다. 그는 그 얘기라도 듣고 싶다고 한다.

 

통증을 이해하고 해소하기 위한 노력

 

나는 몇 가지 질병이 오면서, 몸 곳곳에 통증이 많아졌었다. 죽고 싶을 만큼은 아니었다. 다만 통증은 자려고 누울 때 함께 누웠고, 책상에도 함께 앉아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늘 얼굴은 반쯤 찌푸려진 상태였고, 기분도 저조했다. 1년, 2년 통증이 몸에 머무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통증 없는 몸에 대한 기억을 잊어갔다. 통증이 몸의 일부가 아니라, 몸이 곧 통증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두려웠다. 그래서 통증을 내 몸에서 분리해서 사고하기 위해, 통증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다. 통증을 규명하거나 원인을 찾는 게 아니라, 통증 자체를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었다.

 

우선 통증은 몸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임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이를테면 통증이 없다면, 뜨거운 물이 손에 닿았을 때 살이 녹아내리는 걸 눈으로 확인한 뒤에야 손을 꺼내게 된다. 통증 덕분에 화상 위험이 줄어든다. 그러니까 통증은 내 몸을 살리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는 것임을 상기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져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통증이 몸의 이상 증세를 알려주는데, 그에 관한 적절한 조치를 못하고 계속 뜨거운 물 속에서 화상을 입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불안이 밀려왔다.

 

그래서 통증의 발생 기전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다. 대한통증학회에 따르면, 급성통증은 몸의 이상을 알려주는 경고 신호다. 이는 3개월 이내에 사라지고, 자극을 줄때만 통증이 증가된다. 건강한 통증이라는 의미다. 반면, 만성통증은 통증 원인 사라져도 지속되는 것으로, 자극이 없어도 통증이 계속된다. 이 과정에서 뇌와 척수에 병리적 변화를 일으키기도 한다. 통증전달 체계가 병에 걸렸다는 의미다. 이를 한 의학칼럼에서는 화재경보기에 비유했다. 화재경보기가 올리면 경보기를 끄는 게 아니라, 화재가 발생한 부분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화재가 해결된 뒤에도 경보기가 계속 울려대면, 경보기에 대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이 자료를 읽고 나니까 다소 안심이 됐다. 내 몸의 경보기가 오작동 중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찾아지지도 않는 원인에 대한 불안이 안정됐다. 일단 당장 받고 있는 질병 치료에 충분히 집중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통증이 2,3년 정도 되자, 통증에 대해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종교가 없고 질병에 대한 여러 은유에 반대하는 편이지만, 어쨌든 그 당시엔 그 통증을 의미화할 무엇이 필요했다. 통증으로 인한 고통을 어떤 식으로든 ‘쓸모 있게’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때쯤 한 여성주의 타로마스터를 우연한 자리에서 만났는데, 그는 나의 통증을 ‘차크라’로 설명했다. 그러면서 내가 풀어야 할 심리적 과제가 몸을 통해 나타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등의 통증은 통합되지 못하고 소외된 마음, 현기증과 두통은 낡은 것을 버리고 재탄생이 필요한 것을 의미한다고 했던 것 같다. 흥미롭긴 했지만, 신비주의적인 것 같아서 거부감도 들었다.

 

결국 통증을 계기 삼아, 몸을 좀 더 잘 보살피는 습관을 배우자고 생각을 바꿨다. MBSR(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 program)을 배우러 다녔다. MBSR은 미국 메사추세츠 대학병원의 카바진 박사가, 불교 명상법을 이용해 개발한 스트레스 감소 프로그램이다. 환자들의 통증 관리에도 많이 활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적용하는 게 매우 어려웠지만, 마음과 몸을 쉬게 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됐다.

 

내 얘기를 듣던 그는 이제 병원치료는 기대할 수 없으니, 자신도 MBSR같은 걸 배워보겠다고 한다. 나는 염려가 됐다. 그에게 말했다. 내가 그 정도의 극심한 통증과 함께 산다면, 먼저 통증전문클리닉이 있는 3차 의료기관에서 다시 한 번 검사와 상담을 해볼 것 같다고. 그가 갔다는 종합병원 내과와 정형외과에서 왜 통증클리닉을 권하지 않았는지 의아했다. 심인성(心因性) 환자라고 생각해서 ‘이상이 없다’는 말로 진료를 끝내 버린 걸까, 알 수 없다. 나는 그가 의료적 치료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랐다. 여러 보조 요법이 있을 수 있을 수 있지만, 치료는 1차적으로 의료에 의존하는 게 당연히 안전하다.

 

나는 그에게 환우회 카페 등에서 본 내용을 전했다. 병원에서 적절한 치료법을 찾지 못한 이들, 특히 그처럼 우울이나 자살충동을 느낀 이들이 여러 대체요법을 찾아 헤매다가 사기를 당했다는 이야기. 혹은 이상한 종교에 유입된 사례 등에 대해 말이다. 아마 그들은 도무지 세상에 설명할 길 없는 자신의 통증으로 인한 고립감과 두려움에서 간절히 벗어나고 싶었을 테다. 그래서 열심히 길을 찾았던 것 일 텐데, 더 어려운 일을 겪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을 그들을 비난할 수가 없다.

 

그는 나에게 적극적 통증 치료를 하지 않은 이유를 묻는다. 당시 나는 이미 내분비내과와 혈액과 등에서 받고 있는 치료가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통증은 그처럼 죽고 싶은 만큼은 아니었다. 물론 나의 또 다른 의료 가치관도 작용했을 테다. 하지만 나는 극심한 통증은 그 자체로 질병일 수 있고, 의료적 치료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고 강조했다.

 

▶ 아픈 이의 삶의 통증을 줄이는 데에는 사회적 역할도 필요하다.  ⓒ이미지: 조짱

 

고통을 ‘말할 수 있으면’ 삶의 통증은 줄어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통증은 사람의 본질을 어지럽히고 파괴한다고 했다. 이는 고문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면 명확해 진다. 고문이라는 게 잠을 못 자게 하거나, 몸에 인위적 통증을 가해 정신을 약탈하고 지배하는 행위다. 그런데 통증 환자들은 일상에서 잠을 못자고, 종일 통증을 느끼는 그런 ‘고문’을 겪고 있다.

 

최근 수많은 사람들이 원인불명의 만성통증에 시달리며 산다. 통증의 정도는 천차만별이겠지만, 어쨌거나 만성통증을 호소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환경호르몬이나 미세먼지 등 여러 요소가 작용한 것 같다.

 

또한 사회적 폭력이 개인의 몸에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이를테면 데이트 폭력으로 인한 정서적 외상(트라우마)을 가진 이들이 더 많은 만성통증을 호소한다는 보고가 있다. 또한 아동성폭력 피해자는 성인이 되었을 때, 만성 골반 통증을 느낄 확률이 높다고 한다. 정서적 외상으로 인해 골반 감각을 처리하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 삶이 사회와의 상호작용에서 존재하듯 우리 몸도 마찬가지다. 질병을 개인의 책임만으로 돌리지 않는 게 필요하듯, 그 질병을 경험하는 자의 고통을 함께 들어줄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고통 받는 이는 자신의 고통을 말하고 싶어 한다. 사회가 아픈 이의 고통을 함부로 재단하지만 않아도, 그 고통을 온전히 귀 기울여 주는 단 사람만 있어도, 아픈 이의 삶의 통증이 줄어들 수 있다.

 

[참고문헌] 멜라니 선스트럼 <통증연대기> 스티브 헤인스 <뇌과학으로 읽는 트라우마와 통증>

 

※ 이 칼럼의 필자 반다님과 함께하는 워크숍 <질병과 함께 춤을!>이 2017년 1월 11일부터 4회에 걸쳐 진행됩니다. 참여를 원하는 분은 “하늘을 나는 교실” 공지를 확인하세요! http://classeciel.tistory.com/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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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elly 2020/05/31 [11:22] 수정 | 삭제
  • 글 고마워요. 저도 만성통증을 겪고 있는 환자입니다. 가끔은 긍정적이다 가끔은 너무 괴로워요. 언젠가는 이 고통이 떠나가길 간절히 빕니다.
  • aaa 2017/01/27 [07:06] 수정 | 삭제
  • 흥미 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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