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에서도 직장에서도 ‘우연히’ 살아남았다

<반다의 질병 관통기> 이토록 무방비한 산업재해 사회

반다 | 기사입력 2017/05/13 [22:12]

거리에서도 직장에서도 ‘우연히’ 살아남았다

<반다의 질병 관통기> 이토록 무방비한 산업재해 사회

반다 | 입력 : 2017/05/13 [22:12]

※ 질병을 어떻게 만나고 해석할 지 다각도로 상상하고 이야기함으로써 질병을 관통하는 지혜와 힘을 찾아가는 <반다의 질병 관통기> 연재입니다. -편집자 주

 

그는 공장에서 일했다. 대학생이었지만 ‘노동현장’을 배울 수 있다며 좋아했고, 월급으로 활동비를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안전장치가 없는 기계 앞에서 일하던 그는 감전됐다.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공장 사장은 그의 유족에게 ‘보상금을 노리고 죽은 거 아니냐?’고 했다. 나는 그의 죽음도 믿을 수 없었지만, 공장 사장의 말도 믿을 수 없었다. 내가 처음으로 본 자본주의의 맨얼굴이었다. 나를 포함한 동지들 모두 마음 한 켠에 깊이 묻어 둔 그의 죽음, 20년도 더 된 일이다.

 

▶ 안전장치가 없던 기계 앞에서 감전사한 그의 죽음은 사업주에게 은폐와 조롱의 대상이 됐다.  ⓒ이미지: 조짱

 

지난 메이데이, 크레인 사고로 죽어간 이들의 소식을 보고 다시 그의 죽음이 떠올랐다.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은 현실이 새삼스레 머릿속을 나란히 맴돌고, 비루한 먹먹함에 입이 썼다. 한국은 공식 통계로 잡힌 것만 봐도 직장에서 세 시간마다 한 명씩 사망하고, 오 분마다 한 명이 다치고 있다. 오늘도 직장에서 죽음으로 떠밀려갔을 이들, 그들의 죽음도 존중은커녕 조롱이나 은폐의 대상이 되고 있을까?

 

# 안전장치 값보다 목숨 값이 더 싼 사회

 

한국사회가 OECD 가입국가 중 산업재해사망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건 ‘안전장치 값보다 목숨 값이 더 싸기 때문’임을 대부분 알고 있다. 동일한 사업장에서 비슷한 사고가 반복적으로 발생해도 사업주는 안전장치를 하기보다 약간의 벌금을 내고 만다. 정부는 재벌 대기업 눈치를 보느라 바빠서인지 문제 기업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는다. 그리고 갑작스런 사고사가 아닌, 독성물질이나 과도한 업무 등으로 인해 질병에 걸려 서서히 죽어가는 건 산재로 인정조차 되지 않는 일이 허다하다.

 

이런 현실을 떠올릴 때면 ‘질병 문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내가 사치스럽고 무력하게 느껴진다. 이성적으로는 그런 생각이 별로 유익하지 않고 현실을 제대로 반영한 사고도 아님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따금 그런 감정에 정처 없이 휩쓸린다. 사실, 현실을 정확히 보자면 시민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안전한 직장환경을 확보하는 게 무엇보다 우선이다. 인구의 다수는 직장에 다니고, 하루 중 집에 머무는 시간보다 직장에 있는 시간이 더 긴 이들도 많다. 직장이 안전하지 않으면 질병 예방도 요원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사망과 질병을 포함한 산업재해가 삼성반도체나 현대중공업 같은 공장에서만 빈번한 게 아니다. 올해 초 세 아이를 둔 워킹맘 공무원이 과로사한 사건은 육아 현실과 정책을 돌아보게 했지만, 장시간 노동이 보편화된 현실과도 분리해서 사고할 수 없다.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LG 유플러스 콜센터의 고등학생 현장실습생 자살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10대의 현장실습 제도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지만, 콜센터노동자들의 엄청난 감정노동과 비인격적 노무관리 현실을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 반도체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피켓들  ⓒ출처: 반올림 페이스북 페이지

 

또한 사회적으로 많이 회자되진 않았지만, 재작년 메르스가 휩쓸던 당시 메르스 확진자 중 보건의료 종사자가 40명이었다. 이는 전체 확진자의 21% 해당한다. 그리고 메르스에 감염되진 않았지만, 당시 감염환자를 직접 돌본 간호사 다섯 명 중 한 명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됐다. 양측 다 업무수행 중에 질병을 갖게 된, 전형적인 산업재해에 속한다. 그들은 그 질병과 후유증을 일시적으로, 혹은 평생 갖고 살게 될 것이다. 업무환경이 안전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질병이었다.

 

그리고 영유아를 돌보는 어린이집 보육교사들의 만성적 어깨 통증과 허리 통증도 산재에 속한다. 프로젝트에 들어가면 법정 공휴일도 없는 일이 빈번한 IT업계 종사자들의 VDT증후군, 종일 서서 일하는 백화점 판매직 종사자들의 하지정맥류나 관절염, 성과와 일정 압박 에 자주 쫓기는 다양한 산업연구원들의 난임이나 불임도 산재에 속한다.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한 우울증 같은 산재 유형도 있다.

 

이렇듯 직종이나 업무 별로 겪는 질병 형태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일하느라 몸이 아프게 되는 건 흔한 현실이다. 세계적인 노동 시간과 강도를 자랑하는 한국이니, 직장을 다닐수록 몸이 더 많이 아프게 되는 건 필연이라고 봐야 한다. 살려고 직장에 다니는데 일하면서 질병에 걸리거나 사망하게 되는 현실이, 이토록 광범위한 직종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회가 또 있을까 싶다.

 

# 국민건강이 곧 노동자의 건강이다

 

그런데 일하다가 몸이 아프게 됐을 때, 산재보험을 신청하는 건 일부에 불과하다. 사고가 아닌 질병의 산재 승인율이 낮아서도 그렇겠지만, 무엇보다 직장에서 눈치가 보이기 때문일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메르스 감염으로 인한 산재 신청은 11건, 승인은 7건 불과했다고 한다.(2016년 5월 기준) 산재 인정이 되어야, 치료비 지급은 물론 후유증 발생 시 치료비 부담을 덜 수 있음에도 신청률 자체가 이토록 낮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전문직에 속하는 보건의료 종사자도 이런 상황이니, 높은 실업률과 고용 불안정 현실에서 다른 직종은 말할 것도 없을 것 같다.

 

▶ LG유플러스 고객센터 실습생 사망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가 제작한 카드뉴스 중에서

 

우리는 거리에서 우연히 살아남았듯 직장에서도 우연히 살아남았다. 일을 하면 할수록 몸이 아프게 되지만, 어쨌든 아직은 살아남아 있다. 우리가 많이 아프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일지 꼽아 보면, 그렇게 대단한 변화가 아니어도 건강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도 많다.

 

콜센터에 전화하면 나오는 ‘상담 내용은 녹음된다’는 안내 멘트에, 모욕적 발언은 처벌될 수 있다는 멘트 한 줄만 추가돼도, 백화점 판매직 노동자들이 한 시간에 단 3분만이라도 마음 편히 의자에 앉아 있을 수만 있어도, 모든 직장에서 야근하는 날이 일주일에 이틀만 넘지 않아도. 그러니까 사업주가 노동자의 건강을 해치지 않는 안전한 근무환경 제공 의무를 최소한이라도 지킨다면. 그리고 정부가 재벌대기업 눈치 보지 않고 사업장 관리감독을 제대로 한다면. 만약 그렇게 된다면 ‘국민’ 건강은 훨씬 향상될 것이다.

 

사실 ‘국민’ 건강을 염려한다면, ‘죽음과 질병으로부터 안전한 직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노동조합이 요구하기 이전에 정부가 먼저 주도적으로 제기해야 할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그런 정부를 만나본 적이 없다. 한국 사회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국민(노동자)의 건강’보다 언제나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강고한 우리 사회의 적폐다. 새로운 정부에서는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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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얀새 2017/05/16 [08:04] 수정 | 삭제
  • 매 직장을 다닐때마다 이렇게 일하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직을 여러번하고 직종도 비꿨지만 결국엔 다 거기서 거기더라구요 건강을 챙길수있는 직업이 있을까요 어쩌다 야근이 필수가 된 사회가 되었는지..
  • 15년차 2017/05/14 [01:21] 수정 | 삭제
  • 진짜 직장 오래 다니면 안 아픈곳이 없습니다. 아무리 건강 챙겨도 야근 많이 하면 안 아플 수가 없어요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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