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공간분리’ 정책은 여성혐오범죄 예방 못해

강남역 사건 1주기, 정부의 여성안전 대책은 어디로…

나랑 | 기사입력 2017/05/16 [16:58]

‘남녀 공간분리’ 정책은 여성혐오범죄 예방 못해

강남역 사건 1주기, 정부의 여성안전 대책은 어디로…

나랑 | 입력 : 2017/05/16 [16:58]

1년 전 오늘 “여성혐오가 죽였다”는 외침들

 

“저도 23살이고, 엊그제 강남에 있었습니다. 죽을 수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단지 여성이기에 칼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조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계단을 올라갈 때도, 술을 마실 때도, 집에 들어가는 밤길에서도… 일상생활을 할 때마저 최소 몰래카메라부터 크게는 살인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안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여성들은 계속 스스로를 검열하게 됩니다. 앞으로도 ‘집에는 더 빨리 들어가야지’, ‘강남역에는 가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2016년 5월 19일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에서 열린 첫 번째 추모제에 참가한 한 여성의 발언>

 

▶ 서울여성플라자 성평등도서관 ‘여기’에 마련된 <기억ZONE 강남역 10번출구> ⓒ일다

 

작년 5월 17일 서초구 한 상가의 남녀공용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낯선 남성에게 수차례 칼로 찔려 살해당했다. 살인범은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그랬다”고 진술했다. 사건 이후 수많은 여성들이 강남역 앞에 모여 피해자를 추모하며 한국사회를 향해 ‘여성혐오’ 범죄를 멈추라고 호소했다.

 

8일간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서 열린 자유발언대에서 여성들은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여성혐오와 폭력, 이로 인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토로하고 공감했다.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붙은 3만5천여 장의 포스트잇에는 “여성혐오가 죽였다”, “나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라는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와 경찰은 이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가 아닌 조현병 환자의 ‘묻지마 살인’으로 진단해, 정신질환자에 대한 관리감독 강화 방안을 예방책으로 내놨다. 또한 6월 1일 박근혜 정부가 발표한 ‘여성대상 강력범죄 및 동기없는 범죄 종합대책’은 CCTV 설치 확대, 남녀 화장실 분리 사용, 강력범죄에 대한 무관용 원칙 등 감시와 분리, 처벌 강화를 주요 골자로 했다.

 

‘남녀 공간 분리’는 여성들의 두려움 강화할 뿐

 

▶서울여성플라자 성평등도서관 ‘여기’ <기억ZONE 강남역 10번출구>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1주기를 앞두고, 지난 5월 13일에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집담회 <강남역 이후, 다시 만난 세계>(페미니스트 그룹 ‘강남역 10번 출구’ 주최)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장임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강남역 사건 이후, 정부가 내놓은 여성안전 대책은 여성들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감소시킬 수 없으며 오히려 증가시킨다”고 일갈했다.

 

장임다혜 부연구위원은 “여성들이 강남역 사건을 ‘혐오 범죄’로 규정한 것은 그 범죄를 혐오 범죄로 ‘처벌’하라는 요구가 아니었다.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사회에서 폭력에 대한 두려움 또한 ‘성별화되어 있다’는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정부와 수사당국은 처벌에 대한 요구로 받아들여 ‘여성혐오’ 범죄로 처벌할 수는 없다고 했다. 여성들의 요구를 단지 ‘처벌’과 ‘보호’로 해석하고 해법을 내놓는다면 한계는 반복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정부가 강남역 사건 직후 요란스럽게 내놓은 대책들은 강남역 사건 이전에 정부나 지자체 등이 시행해온 안전 정책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여성안심귀가서비스, 여성안심택배, 여성안심주택, 범죄 취약 지역에 CCTV 설치 등.

 

장임다혜 부연구위원에 따르면 이러한 정책들의 핵심은 ‘여성이 안전한 공간을 만들기 위해 공간을 구분하고 분리하는 것’이다.

 

정부는 강남역 사건 이후 조사를 통해 ‘여성대상 강력범죄 취약 지역’을 파악하고, 이 지역의 순찰을 강화하고 경찰이 거점 근무를 하게 하거나 CCTV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2017년까지 총 5천493개 지역에 CCTV를 추가 설치하기 위해 604억원의 예산을 마련하겠다고 한 바 있다.

 

이처럼 정부의 여성안전 대책은 범죄 취약 지역을 정하고 여기에 잠재적인 범죄자들인 남성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감시의 눈을 확대하는 방식이다.

 

장임다혜씨는 “공간이 분리되어야만 안전하다는 설정은 여성들에게 오히려 ‘이 사회가 안전하지 않다’는 인식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의 두려움을 더욱 확대하고 재생산할 뿐”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안전하지 않은 공간의 목록을 만드는 것은 범죄를 예방한다기보다 범죄가 일어난 이후 사후적으로 취하는 조치에 불과하다.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이후에 ‘남녀공용화장실’이 안전하지 않은 공간의 목록에 추가되고, ‘섬마을 교사 성폭력 사건’ 이후에 ‘섬마을 교사 관사’가 안전하지 않은 공간에 추가되는 식인 것. 이런 식의 사후적 예방조치는 범죄 예방에 늘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 집담회 <강남역 이후, 다시 만난 세계>에서 발표하는 장임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왼쪽) ⓒ일다

 

안전한 공간 ‘구획’…공적 공간에서 여성들 더 배제시켜

 

장임다혜 부연구위원은 “정부의 여성안전 대책의 더 큰 문제는 여성들의 두려움을 재생산함으로써 공적 공간의 성별불평등한 구조를 강화한다는 점에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여성안전 대책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범죄는 낯선 남자인 외부인에 의한 범죄이다. 또 범죄가 일어나는 환경은 공공의 공간, 또는 여성들이 혼자 있거나 혼자 사는 공간이다.

 

모든 사람이 이용하는 공공 공간이 안전하지 않다는 메시지는 공공의 공간에서 여성들의 이동을 위축시키고, 여성의 사회경제적 활동에 제약을 가한다. 그리고 혼자 있는/사는 여성이 위험하다는 인식은 ‘여성은 가족 내에서 남성에 의해 보호받아야 한다’는 암시를 만들어 낸다.

 

결국, 여성은 사적인 공간과 남성의 보호에 속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공사 이분법-공적인 일은 남성이 해야 하며 여성은 사적 공간에 머물러야 한다-을 강화한다. 또한 더욱 빈번하게 일어나는 ‘아는 사람’에 의한 폭력이나 가정 내 폭력에는 대응할 수 없는 정책이라는 것이 장임다혜 부연구위원의 설명이다.

 

▶ 서울여성플라자 성평등도서관 ‘여기’에 마련된 <기억ZONE 강남역 10번출구> ⓒ일다

 

‘평등’한 사회만이 여성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장임다혜씨는 “이렇게 성차별을 강화하는 기존의 여성범죄 안전대책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안전’의 개념에 ‘평등’의 인식을 심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스코틀랜드의 사례를 소개했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2014년부터 여성폭력을 예방하고 근절하기 위한 전략으로 ‘평등한 안전’(Equally Safe) 기조를 채택하고 있다. 여성폭력은 성차별적 사회구조의 결과라는 것. 때문에 여성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을 무조건 보호하거나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개인이 평등하게 안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만들어진 정책이다.

 

스코틀랜드 정부는 여성폭력 근절을 위해 합의되어야 할 네 가지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 스코틀랜드 사회는 평등과 상호존중을 받아들이며, 모든 형태의 여성들과 소녀들에 대한 폭력을 거부한다.
2. 여성들과 소녀들은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평등한 시민으로 존중받는다.
3. 여성폭력에 대한 개입은 조기에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며, 폭력을 예방하며, 여성들과 소녀들의 안전과 복지를 최대화한다.
4. 남성들은 여성들과 소녀들에 대한 폭력을 중단하고, 여성폭력 가해자들은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응답을 받게 된다.

<여성과 소녀들에 대한 폭력을 막기 위한 스코틀랜드의 계획>(the Convention of Scottish Local Authorities. Equally Safe: Scotland's Strategy for Preventing Violence against Women and Girls. The Scotish Government, 2014)

 

장임다혜 부연구위원은 “여성을 보호의 관점으로만 보는 여성안전 정책은 중단되어야 하며, 정책의 대상과 방향을 성차별적이고 여성혐오적인 사회와 공간에 집중해서 ‘평등하게 안전한 사회’를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평등만이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강남역 사건 이후 페미니스트들과 사회단체들이 소리 높여 외쳤던 대책도, 다름 아닌 ‘차별금지법’ 제정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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