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타의 월경越境 만남] 독일에 거주하며 기록 활동을 하고 있는 하리타님이 젠더와 섹슈얼리티, 출신 국가와 인종, 종교와 계층 등 사회의 경계를 넘고 해체하는 여성들과 만나 묻고 답한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지난 2월 말에 함부르크에 사는 한 연구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스스로를 <우리 자신의 언어로 – 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의 독자이자 탈북난민여성 연구자라고 밝힌 발신인은 내게 교류를 청하며 자신의 쓴 소논문을 보내왔다. 그렇게 내게 또다른 대화와 배움이 열렸다.
<‘사건’으로서의 환대와 민중메시아의 가능성 엿보기 – 2017년 탈북여성에 관한 상호문화신학적 자아문화기술지>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이 논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한국교회가 그토록 열망하는 북한선교의 일환으로서의 탈북자 선교 내용을 들여다보는 과정 속에서, 우선 탈북민들과의 만남을 가깝게 하고 현장을 이해할 목적으로 하나원에서 나온 이들의 정착을 돕는 ‘정착도우미’가 되었다. 그런데 하나센터에서 짝으로 맺어준 K모녀와 만나고 일상을 나누는 6개월간의 과정 속에서 나는 단지 도우미를 하면서, 연구의 대상으로서의 탈북민을 관찰했던 초점에서 미끄러져서, 같이 흔들리고 혼란스러워하며 변해가는 나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1차적으로는 무조건적 환대의 모색을 넘어서서 타자와의 조우와 만남을 통한 자아의 탈정체화(disidentification) 과정이었으며, 이러한 실존적 체험은 민중메시아, 즉 초월적 민중의 가능성을 고민하는 가운데 하나의 빛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어떤 주제와 목적을 가졌든, 자아를 드러내는 진솔하고 성찰적인 글쓰기가 가능하고 또한 옳다고 믿는 나는 이 논문의 첫 문단을 읽으면서부터 벌써 이끌렸다. 언어와 해석의 권력을 가졌지만, 한편으로는 편견과 무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한 사람이라는 한계를 겸허히 인정하고 들어가는데서 오는 매력이었다.
이 논문의 이론적 바탕은 신학의 최근 갈래인 상호문화신학과 민중을 메시아(구원자)와 동일시하는 민중신학이다. 상호문화신학(Intercultural Theology)은 그동안 교회의 역사에서 해온 일방향적인 ‘선교’를 성찰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새로운 신학 분과로, 복음의 ‘전수’(傳受)가 아닌 복음의 ‘상호소통’을 추구한다. 연구방법론으로는 자아문화기술지(Autoethnography)를 사용했는데, 이는 인류학적 연구방법의 하나로 연구자가 객관성의 신화 뒤에 숨어 대상을 일방적으로 분석하는 기존 리얼리즘적 문화기술지에 대한 반성에서 출현했다. 연구자가 자신의 자아를 전면에 드러내놓고 탐구하는 방법론이다.
한국에 들어와 6개월간 하나원에서 교육을 받고 막 나온 탈북여성 2인의 정착을 도와주는 자원활동을 했던 연구자가, 그 몇 달간 자기 생각과 감정을 기록하며 성찰과 깨달음, 변화의 과정을 논한다. 이 세 가지 조합은 탈북자 연구에서, 아니 사회과학연구 전반에서도 드문 접근이다. 이런 작업을 어떤 사람이 어떤 사연을 가지고 했을까, 호기심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탈북여성을 보는 새로운 눈을 찾아서
시간이 흘러 4월 말, 한반도에서 ‘종전 선언’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날, 나는 페미니스트 모임에 참석 차 독일 퀼른에 있었다. 밥 먹는 자리에서도 쉬는 시간과 토론 때에도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연신 한국 뉴스를 보며 같이 기념했다. 북한과 분단 문제는 우리 모임의 화두였던 페미니즘과 내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맞물리며 상상력을 자극했다. ‘북한 여성들은 남한 여성들과 많이 다를까?’ ‘거기서는 어떤 식으로 여성해방사상이 전개됐을까? 물론 계층과 지역, 연령, 교육 수준에 따라 인식의 차이가 있겠지’, ‘통일 전후로 젠더학에서 북한 여성과 북한의 젠더 문화에 대한 연구가 봇물처럼 쏟아지겠네…’
사실 북한을 페미니즘 관점에서 바라볼 일은 많지 않았다. 전쟁, 분단, 탈북 담론이 모두 남성중심적으로 전개되어 왔고, 국가 안보와 관련된 거대 정치담론으로서 다양하고 미시적인 분석이 들어설 자리가 좁았다. 여기서 북한 여성은 주목의 대상이 되더라도 체제의 희생자, 가녀리고 순응적인 피해자 이미지로 소비되곤 했다. 김일성 3대가 어린 소녀들을 소집해 현대판 궁녀를 만들어왔다거나, 탈북하고 중국으로 넘어간 여성들이 인신매매, 성매매, 가정폭력에 시달린다는 원색적 고발이 주를 이뤘다. 이는 북한의 불평등과 인권유린 상황을 근거로 햇볕정책을 반대했던 한국 보수 정치집단이 만들어 낸 프레임이기도 했다.
북한 담론에 안타까운 북한 여성들의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은 북한 사회를 보호와 통제의 대상인 ‘여성’으로 젠더화시키는 효과를 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실상 여성들은 다양한 성향과 동기에 의해 다양한 선택과 전략을 구사하며 강인하게 산다. 남한과 마찬가지로 남성들이 주류 기득권을 거머쥔 가부장 북한 사회에서 여성들은 살림과 육아를 떠맡는 동시에 ‘장마당’에서 소규모 자영업도 하고 중국으로 넘어가선 육아, 청소, 가사일 같은 돌봄노동에 비공식적으로 종사하며 가족의 생계를 지탱해왔다. 사회 시스템에서 ‘잘 보이지 않는 존재’인 것은 전체주의 사회에서 취약한 동시에 자유로운 보행을 가능케하는 면이 있고 월경(越境)도 조금은 유리해서, 예전부터 탈북자의 다수가 여성들이었다.
나는 종전 선언의 시대, 북한 여성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것을 우리의 과제라고 여기고, 우선 일상적 만남이 가능한 탈북여성들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졌다. 앞서 언급한 논문의 저자인 나진님에게 인터뷰를 청했다.
나진님은 현재 함부르크 대학교에서 상호문화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스스로 여러 번 경계에 서고 또 넘은 경험을 지니고 있다. 보수적인 시골 교회에서 시작해 서울의 대형 교회와 진보적 신학대학, 민중신학 평신도 교회를 거치며 신앙을 꾸려왔고, 서른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여성으로서 드물게 개신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세 번에 걸쳐 독일 국경을 넘어 들어가 살았고, 결혼이라는 제도적, 문화적 울타리에 들어갔다 나왔다.
탈북자들을 포섭하고 도구화하는 한국교회
하리타: 보내주신 박사 논문 계획서, 잘 읽어보았습니다. 독일어 제목이 ‘난민, 젠더, 선교 - 상호문화적 민중신학 관점에서’(Flucht, Gender und Mission. Perspektiven einer interkulturellen Minjung-Theologie)인데요. 먼저 남한의 탈북자 선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네요. 무엇이 문제인가요?
나진: 저는 박사논문 앞부분을 한국의 탈북자 선교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쓰려고 해요. 간단히 말하면 기존 탈북자 선교에서 한국 교회는 리더이고, 탈북자는 그저 대상화되어 왔어요.
탈북자들이 한국 개신교회에 포섭되는 것은 보통 1)(탈북루트라 부르는) 북중접경지대와 동남아시아 2)하나원 3)지역 교회 이 세 가지 장소에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탈북할 때부터 교회의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아요. 북중접경지역의 북한주민들은 배가 고프거나, 보다 효율적인 경제활동을 하기 위해 탈북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이남을 의도한 경우는 별로 없어요. 소수의 돈 있는 사람들만이 북에서부터 미리 돈을 다 준비해서 남한으로 바로 오는데, 이때는 3주 정도의 짧은 시간이 걸리지요. 중국으로 넘어간 다수의 탈북여성들은 보통 식당 같은 곳에서 비공식적으로 일하고, 결혼이주의 형태도 많아요.
아무튼 탈북 초기에 그곳에서 북한선교를 명목으로 와있는 한국 선교사들을 만나 갖은 도움을 받게 됩니다. 선교사들은 탈북자들에게는 한국이 자유의 땅이고 하나님도 마음대로 믿을 수 있다고 설득하고, 한국의 신자들에게는 남한에 오고 싶어 하는 탈북자들을 위한 후원금을 걷어요. 따라서 남한에 오는 탈북자 60-70% 이상이 중국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교회에서 의식주 등의 여러 가지 도움을 받은 경험이 있어요.
하나원에서는 여러 가지 종교 활동을 선택할 수 있는데, 이미 개신교에 익숙하고 선교사에게 ‘빚’(도움)을 졌다고 믿는 탈북자들은 개신교를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탈북자들이 하나원에서 소정의 교육을 마치면 전국에 있는 하나센터 및 임대아파트로 배정받는데, 하나원 내 교회는 지역의 일반 교회와도 네트워킹이 다 되어 있어서 일종의 신자 인계가 이루어져요. 그런데 막상 남한 사람들이 절대 다수인 일반 교회를 다니다보면 낯설고 안 맞고 힘든 점이 많죠. 그러면 어떤 교회가 탈북자들에게 어떤 후원을 하는지 정보를 서로 공유해서 이곳저곳 옮겨 다녀 보는 거예요. 이 교회가 별로였는데, 마침 저 교회가 한 달에 10만원을 지원해준다고 하면 거기로 가는, 이른바 철새 교인이 돼요. 익숙하고 마음에 드는 환경을 찾을 때까지 돌아다니는 것은 본능이니 비난할 건 아니고요. 이렇듯 개신교회는 탈북자들을 철저히 자본주의적으로 포섭하고 있고, 정치적으로는 자기들의 보수적인 이념을 위해서 탈북자들을 북한체제 비판자로 도구화해온 것도 문제입니다. 탈북자들에게 자기 정체성을 망각하고 부정하길 강요하는 것이거든요.
몇 해 전에 좀 다른 교회를 만들어보자고 지인들 몇 명이 뭉친 적이 있어요. 저를 포함한 한국 신자들은 코디네이터 역할만 맡고, 북한 전도사 출신인 할머니를 중심으로 모이게 했지요. 저는 주보를 만들고 예배 때 반주를 하며 보조하는 일을 했어요.
연구자가 박사논문을 쓸 주제에 대해서 박식한 것은 당연하지만, 나진님의 경우에는 학문적인 관심과 조사를 넘어선 여러 가지 실천과 탐색을 해왔다는 것이 금방 드러났다. 연구자, 학자를 유일한 진로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살기 위한 공부’라고 표현했다. 삶에서 만나는 혼란과 질문을 따라가는 한 방법, 자기 존재의 의미를 알아내는 숙제를 푸는 과정으로서 연구를 한다는 말이었다. 연구 주제와 대상은 그래서 다채롭고 폭넓었다.
삶에서 나온 키워드 ‘난민’ ‘젠더’ ‘탈북자’ ‘상호문화신학’
기독교가 모태신앙이어서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던 나진님은 몸이 많이 약했고 초등학교 시절 왕따를 당하기도 해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다. 그러던 중, 청소년기에 스스로의 의지로 나간 교회에서 구원 체험을 통해 큰 행복(인정, 존중, 사랑의 경험)을 느꼈다고. 그 때 목회자가 되어 다른 사람도 이렇게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이 장래희망이 변치 않아서 한신대학교 신학과로 진학했다.
그때부터 6년 간 신월동에 있는 신도 2천명의 대형교회에 다녔는데, 개인이 아무리 선해도 큰 규모의 시스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소외가 일어나는 것을 보며 작은 신앙공동체를 꾸리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오래 못가고 자주 와해되는 한국 공동체들의 사례를 보며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위한 해답을 찾아보려고 2003년 대학원 재학 중 유럽에 갔다.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있으면서 6개월 동안 유럽의 4군데 공동체를 다녔다.
나진님이 한국에 돌아와서 소규모 공동체의 꿈을 직접 실현한 것은 아니지만, 대신 기독교장로회 소속의 작은 공동체인 한백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서른 살 때 여기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1세대 민중신학을 2,3세대로 이어 보다 발전시킨 이 교회는 목회자에게 특별한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진보적인 평신도 교회였고, 나진님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가령, 민중신학이 민족주의를 넘어서야 된다는 관점은 나중에 ‘탈북’을 신자유주의 시대 지구적 디아스포라 현상으로 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민중신학의 철학적 뿌리 중 하나인 탈식민주의에도 관심을 갖게 됐고, 2009년 독일 마부르크에서 박사과정을 준비하면서 그 방향으로 연구를 해보려했는데, 그 때만 해도 탈식민 이론이 비주류였다. 지도교수를 찾기가 어려웠다.
한편, 스스로 아시아 여성 이주민으로 독일살이를 하다 보니 여성이주민이 화두로 떠올랐다. 하지만 이를 주제로 한 연구는 이미 포화상태라서 좀 더 구체적이고 고유한 시각이 필요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 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탈북자나 탈북자로 속이고 망명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조선족들과의 만나게 되었고, 이는 예전에 탈북자 어린이를 돕는 모임에서 활동했던 기억을 소환해냈다. 하지만 박사과정 입학은 뜻대로 풀리지 않고 이혼까지 하게 됐다. 2012년 결국 귀국해서 연구 주제를 발전시키는 한편, 교회에서 부목회자로 활동하기도 하고, 이혼으로 인해 지치고 다친 마음을 추스리는 시간을 가졌다.
이혼은 스스로를 여성이라는 사회적 지위, 실은 타자이고 소수자인 존재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성별은 물론 이전에도 나진의 삶에 언제나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가령 그녀는 그냥 목사가 아니라 ‘여성 목사’였다. 한국 개신교회에서 아주 소수일 뿐 아니라, 담임목회자로 청빙되는 경우도 가뭄에 콩 나듯이 하는 것이 ‘여성 목자’라는 지위였다. ‘난민’ ‘젠더’ ‘탈북자 선교’ ‘상호문화 민중신학’이라는 키워드들은 이렇듯 생생한 삶의 체험에서 튀어나와, 연구계획서 안에 꼿꼿이 자리를 잡았다.
교회 안의 타자, ‘여성 신앙인’ ‘여성 목사’
하리타: 나진님의 삶과 신앙의 역사를 들으면서, 여성으로서 보수적인 개신교 분위기가 힘들진 않았는지 궁금해졌어요. 특히 여성 목사는 아주 소수인 것으로 아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 같아요.
나진: 글쎄요. 저의 젠더감수성이 좀 더 예민해지기 시작한 이후에 저의 신학적, 신앙적 삶의 자리에서 억압이나 불편함은 크게 못 느꼈던 듯해요. 제가 더 예민해지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저는 이미 억압이 일어날 자리에는 가지 않거나, 저의 예민함을 먼저 표시하는 편이라서 상대방이 오히려 불편함을 느꼈을 수 있겠지요. 저의 가장 큰 삶의 자리였던 평신도 공동체는 여성이 꽤 오랫동안 담임목사를 해왔던 곳이기도 했고, 굉장히 성찰적이어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변화하려 노력하는 곳이었어요. 하지만 아마 대부분의 교회들은 그렇지 못할 거예요.
제가 솔직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는데, 독일에 와서 잠시나마 함께 하고 있는 지금 공동체에서는 저의 젠더와 섹슈얼리티 관념이나 결혼제도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다 오픈하지는 않아요. 그럴 수 있으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아요. 그리고 기성 신앙공동체와 제가 몸담았던 민중신학 공동체의 신앙언어 자체가 많이 달라서 재적응중이기도 합니다. 저의 견해를 곧바로 표현하지 않지만 대신 설교나 기도 때에 습관적이고 식상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하고 시도하는 중이예요. 듣는 상대방이 신앙(언어)에 대해 다시보기, 낯설게 보기를 할 수 있도록.
안 그래도 실력 낮은 독일어를 구사하다 보면, 나의 생각까지도 그렇게 낮아지는 것 같아 모어에 대한 그리움이 커졌었는데, 그중에서도 시가 많이 그리워지더라고요. 시는 가장 예리하고도 깊은, 마음의 우물에서 끌어올린 말들일 때가 많으니까요. 예배 시작할 때 어린이들이 다 제단 앞에 나오면 제일 먼저 어린이 기도를 하는데요, 어느 날은 이렇게 기도했네요.
“주님, 하루가 다르게 새싹들이 자라고 꽃망울이 터지는 이 봄, 오늘 내리는 이 단비처럼 자라나는 우리 친구들에게도 필요한 것으로 충만히 내려주시길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충만히 사랑받게 하시어서, 그 사랑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무르익어가는 생명들이 되게 해주십시오. 주님, 혹시나 어쩔 수 없이 받게 되는 상처가 옹이가 되지 않게 해주시고, 이국땅에서 조금은 다른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일이 우리 아이들에게 장점이 되게 해주십시오. 힘들었던 경험이 오히려 다른 이들을 품고 사랑할 줄 아는, 멋진 존재로 자라나게 해주십시오…”
식상하게 사용되는 언어에는 마음이 아니라 습관이 많이 담겨있어요. 성별이분법적인 단어들도 그런 습관적 언어사용 중 하나겠고요. 예를 들면, 성경의 창세기를 읽을 때 사람들은 아담은 처음 창조된 남자, 이브는 그 남자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남자를 유혹한) 여자로 익숙하게 받아들여요. 그러면 저는 아담은 남자가 아니고,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 모두를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해석을 얘기합니다. 너무도 익숙한 성경 구절에 대한 ‘다시읽기’가 되는 거죠.
하리타: 그렇군요. 시어를 끌어와서 지극히 익숙한 언어와 사고를 환기시킨다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익숙한 성경 구절의 다시보기도 그렇고요. 그동안 한국 개신교의 역사 속에서 가부장적 교리와 문화에 비판의식을 가졌던 여성들은 늘 있었겠지요?
나진: 한국의 1세대 여성운동의 리더들은 대부분 교회 여성이라고 알고 있어요. 한국에서 20세기 초반 근대화 운동을 주도했던 큰 축이 기독교인데, 기독교가 기존 유교 문화보다는 남녀평등에 가치를 두었기에 여성 기독교인들이 여성의 권리신장에도 목소리를 내게 된 거죠.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선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유교적인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지요. 남자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여성들은 헌신적이지만 거기 순응하는 한계가 나타났어요. 자의식이 강해진 여성운동가는 교회 안에 머무르기 어려웠을 거예요. 개신교든 천주교든 교회에서 자의식이 성장했지만 이내 교회를 뛰쳐나가는 여성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하리타: 기독교의 가부장성은 세계 보편적인 특징이기도 한데요. 기독교를 새로운 종교로서 비서구 문화권에 선교할 때는 ‘만인해방’이라는 가치를 매력 요소로 부각시켜 민중에게 어필했지만, 이 역시 가부장제 하에서 발달한 종교이기 때문에 보편화, 대중화되면서는 그 본질이 드러난 것 아닐까요. 핵심 교리이자 텍스트인 성경을 봐도 예수의 행적과 말씀을 전하는 신약은 그 시대 기준으로 급진성을 띄지만, 구약은 철저히 당시의 가부장적 시대정신을 담고 있어요.
나진: 그렇죠. 예수라는 인물이 생존했던 시기는 사실 기독교도, 교회도 없이 ‘예수운동’이 일어났던 것이고 아마 급진적 진보적인 성향이었을 거예요. 기성 감성과 관념으로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 수도, 사람들을 구원하고 치유하는 역할을 할 수도 없으니까요. 또, 기본적으로 예수운동은 아웃사이더들이 주도했기에 여성들의 개입도 활발했어요. 초기 기독교에까지 여성리더들이 많이 나타났어요. 그런데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고 시스템화되면서 당시 로마 사회의 가부장적 문화가 투영됐다고 봐요. 이른바 현실 정치, 세속 권력은 남성중심적인데 교회가 이와 담합하면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인터뷰 하편에서 나진님의 탈북여성 연구에 관한 상세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필자 소개] 하리타(정세연)-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여전히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앞으로 젠더, 이주, 섹슈얼리티, 지속가능성을 주제로 계속 글쓰고 행동해나가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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