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다>는 <여성노동자글쓰기모임>과 공동 기획으로, 지금까지 기록되지 않은 여성들의 ‘일’을 이야기하는 인터뷰를 싣습니다. 안미선 작가는 <내 날개옷은 어디 갔지?> <여성, 목소리들> <모퉁이 책 읽기> <똑똑똑, 아기와 엄마는 잘 있나요?> 등의 저자이며, 이 글은 <삶이 보이는 창> 119호에도 수록됐습니다. -편집자 주
일, 내 눈물이 떨어진 소리
장순애 씨(76세)는 1944년에 태어났다. 전라북도 부안에서 다섯 남매 중 막내로.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고 겨우겨우 굶주리지 않을 정도로 살림을 꾸렸다. 위로 아들 둘만 학교에 보냈고 막내딸은 학교에 갈 수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그때가 좋았던 걸까. 순애가 열다섯 살 때 어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해 갑작스레 세상을 떴다. 아버지라도 남아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아버지도 3개월 후 병으로 죽었다.
남매는 뿔뿔이 흩어졌고 어린 순애에게 바람막이가 돼줄 어른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래서 순애는 “남의 집에서 컸다.” ‘식모’ 일을 하면서 아기를 봐주고,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을 짓고, 남의 집에서 주인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군소리 없이 커야 했다.
그땐 그랬다. 여자가 할 일이 없었다. 순애가 세상에 혼자 남겨진 1959년에, ‘미망인’ 여성과 고아 여성들은 50만 명이 넘었고 그중 생계유지가 어려워 구호를 받아야 할 이들은 13만 명 이상이었다. 부모와 사별하거나 실제적인 가장이 된 10대 여성이 많았다. 그때 가사 서비스는 산업화 초기 여성의 주요 취업 직종이었다. 어린 농촌 소녀들의 상당수가 ‘식모’라는 직업을 통해 도시로 들어오던 때였고, 이들의 90% 이상이 빈농 출신이었다.(『일·가족·젠더』 강이수 엮음, 한울아카데미, 2009, 95쪽)
처음 남의 집에 가게 되었을 때 순애는 소리 내어 울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다 안 계시는데 집에 돌아가고 싶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몰라 큰 소리로 울고 또 울었다. 일하는 순애는 그 울음소리와 함께 아프게 태어났다.
일하면서 순애는 자기 집을 갖고 싶었다. 자기 삶을 갖고 싶었다. 주변에서도 그랬다. 얼른 시집이나 가는 게 낫겠다고. 시집을 가면 이보단 나을 것 같았다. 결혼을 하면 남의집살이를 끝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무 살 언저리에서, 아는 사람의 소개로 결혼을 했다. 남편은 수도 기술자였다. 곡괭이와 삽을 가지고 언 땅을 파며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하는 고된 직업이었다. 남편은 술을 마셨다. 결혼은 생각과 달랐다. 더 나빠지는 삶도 있었다.
순애는 딸 둘, 아들 둘을 낳고 길렀다. 남편이 술을 먹고 술값으로 돈을 탕진하는 사이, 순애는 아이들을 굶겨 죽이지 않으려면 자신이 다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막내아들이 네 살 때였다. “내가 다라이를 들고 나가 강냉이도 팔고 새벽에 생선도 사다 팔고, 떡을 팔고, 옷을 팔고….” 행상을 한다고 파출소에 잡혀 들어가기도 했다. 덜덜 떨다 밤에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은 굶주린 채 방치되어 있고 남편은 술에 취해 아무 데나 고꾸라져 자고 있었다.
남편은 마흔두 살의 나이로 혈압으로 죽었다. 그때 순애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살아야 한다, 애들을 살려야 한다. 순애의 머릿속에는 비상등이 밤낮으로 돌아가듯 이제 그 생각밖에 없었다. 그 주문이 녹초가 된 순애를 벌떡 일으켜 세우고 종일 거리를 헤매고 다니게 했다. 밥을 먹은 날보다 종일 굶은 날이 더 많았다. 돈을 아껴야 했으니까.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거라도 아껴야 했으니까. 배를 곯으니 “사세요, 사세요.” 소리가 기어들어가며 저녁에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장사한다고 점심도 못 사 먹고 집에 와 밥 하나 김치 하나 놓고 먹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툭툭툭툭 바닥에 막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요. 그렇게 정말 많이 울었어요.”
새벽에 팔 물건을 사러 도매시장에 갈 때 아침 식사는 어린 딸이 준비했다. 나가서 어두울 때 들어오니 자식들이 크는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런 여자들이 많았다. 기혼의, 배우지 못한, 빈곤한, 아이들을 키워내야 하는 엄마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면서 양육까지 해내야 했다.
사회학자 신경아는 이렇게 지적한다. “직업을 찾아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동시에 양육 등 살림을 해야하는 이들의 상황은 일·가족 문제’의 가장 심각한 극단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식 담론의 지평에서 이들의 문제는 드러나지 않는다. 신문이나 잡지 같은 활자화된 매체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적어도 중산층 이상의 일정한 지식소유자, 또한 남성이라는 사실은 매우 한국적인, 그리고 시대적인 삶의 전형을 살아가는 빈곤층 기혼여성들의 경험을 담론적 지평의 경계 밖으로 몰아냈다. ‘일—가족 문제’는 여성과 가족이 견디어가야 하는 개인적 고통으로 사회적 의식의 표면 아래로 더욱 가라앉았다.”(『일·가족·젠더』 99~100쪽)
기댈 데 없이 세상에 남겨진 장순애 씨의 분투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내가 파는 옥수수 한 자루를 애들 못 갖다 먹였어요. 돈을 만들어야 하니까. 막 100원이라도 돈을 해야 애를 가르치고 먹이고 하니까 당시는 어쩔 수 없어 그랬는데 그걸 하나 못 갖다 먹였다는 게 걸리는 거예요. 부모가 돼서. 그래도 그때는 어떻게든 다 떨고 팔고 와야 그게 돈이 되니까….” 아이들에게 못 먹인 옥수수 한 자루가 지금도 눈에 밟힌다.
“애들 굶기지 않고 가르치는 거, 그것밖에 머릿속에 없었어요. 주머니에 주민등록증을 늘 갖고 다녔어요. 내가 힘이 딸리니까 장사할 때 내가 어느 순간에 어디서 쓰러질지 모른다, 그 생각에. 그 정도로 애들은 바글바글하고 내가 그만두면 애들이 다 흐트러질 것 같아서 끌어안고 살았어요.”
가족을 살리기 위한 일, 일이 갈라놓은 가족
“보따리 장사를 그만두고” 시작한 일이 지하철 차체 청소 일이었다. 2호선이 개통되기 전인 1980년대 초반, 한 달 월급이 8만 원이었다. 입사하고 3일 치 일에 대해서는 임금을 쳐주지 않았다. 차량이 기지창으로 들어오면 내부와 외부를 청소했다. 격일제로 일했지만, 사회보험은 없었다.
1980년에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42.8%였다. 산업별 취업 구조가 재편되고 여성의 임금노동자화가 진행될 때였다. 다양한 계층의 여성이 경제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할 때였지만 성차별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전통적인 성역할이 여성에게 부과되었고, 이를 사회적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도 미비했다. 국가정책도 여성들의 갈등과 부담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일·가족·젠더』 64~69쪽) 일을 해야 하는데, 노동자로서 온전히 대우받지도 못하고 양육의 부담은 그대로 짐 지워진 상태에서 여성들은 억척스레 자리를 버티어내어야 했다.
“2호선을 개통하면서 저를 역으로 보내 차 안에서 일하라고 해요. 젊고 예쁜 사람만 뽑아서 그리 보낸다면서. 나는 안 간다고 하는데 굳이 보내서 일하는데… 창피한 얘기지만 거기 기사가 나를 찝적거리더라고. 그리고 일하는 한 아줌마한테 ‘역장 보고 직함을 잘못 불렀다’고 역장이 마구 야단을 쳐요. 나는 그런 꼴을 못 봐. 경우에 어긋난 건 못 봐요. 내가 그랬어요. 당신들이 우리 주부들을 데려다 일 시킬 때 제대로 가르쳐야지 무턱대고 일을 시키고 사람들을 당하게 하냐. 또 3일을 공짜로 시키고 임금도 안 주고.”
“나는 말을 않고 살았어요. 입을 딱 붙이고 살았는데 자꾸 그런 일이 생기니까요. 우리는 을이고 저쪽은 갑이고. 소장이 우리 편을 안 들어줬어요. 밤일 하면 기지 직원들이 우리 아줌마들 데리고 가 술도 먹고 그런 짓을 하는 거야. 나는 그걸 다 기록을 해놓는 거지. 소장이 뭐라 하는데 내가 책상을 치고 같이 싸웠어. 당신은 누구 편이냐, 왜 이런 식으로 하냐. 왜 일하는 우리 편이 아니냐고, 사람이 경우라는 게 있지 않냐고. 그리고 내가 사표를 딱 썼어요.”
7년 동안 한 청소 일을 그만둔 건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 성희롱, 시키는 일에 기준이 없고 관리자들이 자기 마음에 따라 노동자들을 편가르기 해 일을 나누어주는 습속 때문이었다. 그땐 그런 일이 ‘흔했다.’ 흩어져서 일하면서 노동조합 같은 건 생각도 못 했다. 노동자 소리도 낯설었다. ‘경우에 어긋나는 건 안 된다’는 인간적인 도리를 앞세워 싸우고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너무 힘들어서 동사무소 찾아가 영세민 해달라고 하니 동직원이 ‘없는 사람이 뭐하러 자식을 가르치냐’고 하더라구요. 제가 거기서 울고 나왔어요. 애들이 고등학교, 중학교를 다니는데 뭐라 할 수가 없어. 아무리 생각해도 애들을 가르칠 수가 없는 거야, 내가 혼자 몸에 벌이도 없고. 10원 하나 없고. 저도 모르게 큰아들 중학교 서무과 가서 부탁을 했어요. 그랬더니 잘 오셨다고, 영세민 하나가 마침 졸업해 자리가 하나 비어 등록금 1년치를 면제해드릴 수 있다고 했어요. 큰아들이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했어요. 지금도 고마워요, 잊히지 않아. 큰아들이 고등학교 가서 학원을 청소해주면서 학교 다녔어요. 나 엄청 애들 힘들게 가르쳤어요.”
졸업식 때 앨범비를 못 내 ‘남들 다 받는’ 앨범을 받지 못한 아들이었다. 아들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고 했다. 큰아들이 대학교에 가고 싶다고 했지만 도저히 입학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입학금만 있으면 나머지 학비는 벌어 다니겠다던 아들은 대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결혼한 큰딸은 연락을 끊었다. 왜 끊었는지 지금도 이유를 알 수 없다. 혼자 산 엄마의 삶을 지켜보았고 마음을 의지한 큰딸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자식만 바라보며 온몸으로 버틴 세월이건만 순애 씨는 자식들에게 아픈 것도 많고 걸리는 것도 많았다. 평생 일하고 살았지만, 머릿속에 자신은 가정을 지킨 ‘주부’였다. 그리고 형편이 나은 다른 ‘주부’보다 어쩔 수 없이 다 해줄 수 없는 엄마였다. “어떻게 해야 해요?” 간절하게 물어온다.
“애들하고 내가 정이 드는 기간이 없었어요. 나는 새벽에 나가 밤에 와야 해서, 애들을 보듬어주질 못했어요. 아무것도. 엄마한테 정이 없는 거 같아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어쩔 수 없이 나는 그 생활 했는데. 먹이고 가르쳐야 하니 애들하고 접할 게 없었어.”
일은 불안정했는데, 일과 가족을 유지하기 위한 노동은 삐걱대며 어긋났고, 말 없는 자리에서 곪아온 것은 마음의 옹이로 남았다. 보육과 교육, 모성에 대한 보호와 공적 지원이 없는 시대를 헤쳐 나온 시간은 “내 탓”, “나의 복”이라는 자탄과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평생 한 달에 100만원을 벌어본 적이 없어요”
50대 중반에 공사판 일을 시작했다.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전기 설비를 하는 일이었고, 일하는 사람들 중 유일한 여자였다.
“십 년 동안 일했는데 나 혼자 여자였어요. 아파트에 들어가는 전기 작업을 다 한 거예요. 뽁쓰라고 하는데, 2구 3구 4구짜리 전기 구멍 뚫어 뺀찌로 뜯고 파이프 들어갈 구멍을 채워야 해요. 현장에서 그리로 전기선을 넣는데 그거를 전부 다 내가 해줘야 해요. 아파트 한 칸에 전기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요. 계량기 들어가지, 인터폰 들어가지, 방마다… 전부 내 손을 거쳐 가야 남자들이 일을 해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들이 일한다고 ‘전공’이라 불리는 그들 틈에서 순애 씨는 그들이 일할 수 있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밑작업을 다해주어야 하는 유일한 여자 일꾼이었다.
“몸이 약하게 태어났어요. 그래서 힘이 무진장 들어. 현장 들어가 보면 도로 돌아서고 싶은 거예요. 들어가서 작업복 갈아입고 커피 먹고 겨우 생기 돌면 하루일 시작하고. 사람들이 그랬어요. ‘저 아줌마 들어올 때 예뻤는데 나갈 때 완전히 파김치가 돼서 나오네.’ 전기 일을 뺀찌와 도라이버로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하거든요. 손이 밤만 되면 저리고 아팠어요. 저녁에 잠을 못 자는 거야. 그리고 그 손을 가지고 담날 일하러 가는 거야.”
공사장 정문에 도착하면 몸을 돌려 나오고 싶었고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 여기에서 물러서면 안 된다고 ‘독하게’ 마음먹었다. 새벽에 첫차를 타고 가면 해가 채 뜨기도 전인 아침 여섯 시나 일곱 시에 일이 시작되었지만 퇴근 시간은 정해지지 않았다. 일하는 손이 안 보일 때까지 컴컴해지도록 일해야 했다.
“한겨울에 노동판에 일 나갔는데, 야간 일할 사람 남으라 해서 나하고 남편이 없는 또 한 친구 둘이 남은 적이 있어요. 밤새도록 지게에 물을 길어 시멘트를 긁어냈어요. 물에 염산을 타서 시멘트를 긁어낸 거예요. 우리는 뭔지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하고 돌아와 보니 옷이 성한 데가 하나도 없어요. 다 타서 뚫어져 구멍이 나 있더라구요. 그렇게 일하고 올 때도 ‘새벽에 여자들이 어디 갔다 오냐?’고 택시 기사들은 이상한 말을 하더라고요.
남자들 일하기 전에 전기 준비작업을 하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어요. 슬라브 타는 날(지붕 덮는 작업)에도 나를 불러 올라오라고 해요. 한 층 올라가 철근 세우면 전기선을 거기다 철근에다 같이 묶어요. 그렇게 몸 안 아끼고 억척스럽게 했어요. 남자들이 선을 주면 선 잡아주다 묶어주다 잡아주다 묶어주다 하면서 우리도 슬라브를 타는 거야. 남자들 하는 동안 나 혼자서 묶었어요. 남자들이 선을 다 넣으면 난 파이프를 세워둔 걸 테이프를 찢어 다 덮어야지. 공구리(콘크리트)를 칠 때 그리로 들어가면 큰일이니까 옹벽에 다 세우고 묶어놓는 거야. 테이프로 다 붙이고 나와야 끝나.
내가 할 일만 하면 되는데 슬라브 올라갈 때 나를 데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나 혼자 하는 일도 하고 남자들 하는 일도 다 하고 일이 더 많은 거죠. ‘나는 저이들보다 일을 많이 하는데 왜 돈은 조금 주냐?’ 물으면 ‘당신이 여자이기 때문에 그런다.’ 그래요. 할 말이 없어. 여자라서 그렇다고.”
일을 남자 못지않게 해도, 심지어 일을 더 해도 손에 쥐어지는 돈은 더 적었다. 1999년부터 십 년간 받은 월급은 한 달에 60만 원이었다. 나라가 발전했다는데, 여자들 할 일이 전보다 더 많아졌다는데 이상하게 노동은 대가를 받지 못했다.
1990년대 이후 취업 여성의 임금노동자 비율은 거의 70%에 이르렀다. 불안정한 취업이 확대되었고 또한 여성 노동시장의 상황은 변했지만, 남성의 임금은 남성 생계부양자 이데올로기와 규범 때문에 더 높았다. 실질적으로 가장이자 더 많은 일을 해도 장순애 씨가 맞닥뜨린 노동현장에서 성차별의 벽은 높았다. 그나마 남편이 없다는 것이 또 다른 편견으로 되돌아올까 입을 꾹 다물고 일만 했다. 공사 현장에서 일하면서 다치기도 많이 다쳤지만 아무도 쉬란 소리를 하지 않았다. 아프면 안 되었다.
“최고로 받아도 돈 60만 원이야. 내 차비는 따로 들이면서. 나는 평생 일하면서 100만 원을 못 벌어봤어요. 정말로 못 배운 설움, 가난한 설움, 가난한 게 제일로 큰 죄라고 생각해요.”
아픈 노동, 아픈 차별
65세가 되니 ‘나이가 많다고 공사판에서 쫓겨났다.’ 아픈 손 때문에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물끄러미 손을 쳐다보며 물었다. “아줌마, 무슨 일을 했어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었다. 손목의 신경이 붙어 떼어주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산재 처리 같은 건 꿈도 못 꿨다. 아픈 건 다 자기 돈을 들여야 했다. 뇌출혈과 뇌경색이 겹쳐 그사이 뇌수술도 두 번이나 받아야 했다. 의사들이 모두 ‘죽는다’ 했는데 살아났다.
목숨이 붙어 있으니 어떻게든 일을 더 해야 했다. 구청의 공공근로 일도 하고 빌딩 청소도 했다. 아파트를 청소하러 갔더니 네 동을 혼자 다 하라고 했다. “힘들어 죽어도 못하는 일”이었다. 일흔에 가까워지는데 여전히 임금은 적었고, 인력은 줄어서 해야 할 일은 더 많아졌다. 보조출연자 일도 했다. 명동에서 옷을 파는 일도 했다. 새벽 여섯 시에 집을 나서 오후 세 시까지 외국 사람들한테 옷을 팔고 한 달에 60만 원을 받았다.
깜깜한 거리에 집을 나서면 남자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지분거렸다. 늙고 아픈 노인이건만 그런 일은 여전히 거리에서, 일터에서 있었다. 출근하다 오토바이 날치기에 얄팍한 가방마저 빼앗기기도 했다. 집 밖에 나와 돈 버는 여자, 꼭두새벽에 나서서 밤까지 일하는 여자는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양 세상과 남자들은 노동에 지친 육신을 하대하고 만만하게 취급하면서 위협했다. 단지 여자이기 때문에. 그건 여전히 상처였다. 수치였다.
세상을 향해 싸우고 문제를 제기하는 방법을 그녀는 모른다. 상처가 자기 탓이 아니라고 언어화할 줄도 모른다.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현실을 죽을힘을 다해 살아내었을 뿐인데, 배신하고 앙갚음하는 세상 때문에 그녀는 위축되었다. 무엇이 문제이고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모두 자기 탓이라고 자책하는 게 되레 분노를 누그러뜨려 주었다. 아무도 말 걸어주지 않는 세상에서 혼자 마음을 달래기 위해 이제 그녀는 모든 걸 자신의 탓으로 돌린다. 골방에서 자책하는 사이 우울과 슬픔이 몰려든다.
가진 이들만 존중받고 더 가지기 위해 달려가느라 바쁜 세상에서 그녀는 잊힌 사람이다. 차별은 일터나 거리에서만 있는 게 아니었다. 성역할 규범, 모성 규범, 정상가족 규범, 가부장적 가족. 사회적 배제는 다차원적으로 일어났고 그 배제 속에서 가난은 다시 만들어졌다.(<숨겨진 빈곤> 정재원, 푸른사상, 2010) 여성이 가난한 것은 삶의 과정에서 작동된 그 차별들이 쌓여온 결과이기도 했다.
“정말 눈물이 나와서 말을 못 하는데, 내가 애들 데리고 혼자 산다고 친척들도 무시하고 동네 사람들도 무시하고. 동네에서 뭐 먹고 할 때 나는 사탕 하나 못 얻어먹어. 관에서도 내 사정을 알면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니까 일단 누구하고도 말하기가 싫어. 인제 전부 싫어진 거야. 내가 세상 태어난 것도 싫고, 하루하루 사는 것도 싫고 그래서 내 사진 내 손으로 다 태워버렸어. 주민등록증에 있는 이 사진을 크게 만들어서 영정사진으로 그날 하루 딱 쓰고 바로 태워버리라고 큰아들한테도 그랬어요. 난 태어난 게 싫어. 항상 외로움을 타고 난 거야.”
이웃에 한 번 돈을 꾸러 갔다가 ‘돈은 있는데 당신이 못 갚을 테니 못 꾸어준다’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었다. 쌀이 떨어졌는데 애들을 굶길 수 없어 쌀가게에서 한번 외상을 한 적이 있었다. 일 년을 넘게 그 쌀값을 못 갚아 애를 태우는데, 한번은 가게 주인이 자신을 은근하게 불렀다. 부르는 그 소리 한마디에 “예, 알아요. 제가 돈 되면 얼른 갚아드릴게요” 하고 고개 숙였다.
“딱 남편이 죽고 나니까 친정도 없어지고 시댁도 없어지더라고. 큰집 환갑잔치에 갔는데, 우리가 들어서니 시집 식구들이 방에서 싹 나와요. ‘나 왔는데 벌써 나가요?’ 물었는데 누구 하나 어서 오라는 말을 안 해요. 앉을 데가 없어서 주방으로 들어가서 손님들 먹고 나온 상에 밥을 한 공기 달라 해서 먹는데 조카가 ‘어, 작은엄마, 불고기가 없네’ 하면서 상 차려놓은 데서 불고기 한 접시를 가져왔어요. 난 불고기라는 걸 그때 첨 봤어요. 그 집 식구들이 도로 갖다 놓으라고 막 뭐라고 해요. 우리 애들이 먹고 싶은 걸 못 먹어서 나한테 졸라요. ‘엄마, 딴 사람들이 가방에 떡도 다 싸가’ 이러면서. 그렇지만 우린 그 떡 한 쪼가리를 못 얻어먹고 서 있었던 거예요.”
가난해서 말 못 하고 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 그것뿐이었을까.
‘저 냇물이 엄마가 산 역사다’
장순애 씨는 71세 때부터 시작한 노인 일자리 일을 지금까지 5년째 하고 있다. 이웃의 아픈 독거노인들을 돌보고 간병하는 일이다. 노인 일자리에서 받는 27만 원과 기초연금 25만 원이 유일한 수입이다. 사람들은 모른다. 큰딸과 막내아들이 인연을 끊고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걸. 기초생활수급자로 등록된 이웃들이 순애 씨는 되레 부럽다. 엄혹한 사실은 지금도 계속 일을 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방 한 칸과 부엌 한 칸의 좁은 무허가 집은 시유지였던 공터에 오십여년 전 지어 살아온 곳이다. 이제 구의 소유가 된 땅에 일 년에 60만 원의 연세를 내며 산다. 방에는 텔레비전과 옷장, 냉장고가 나란히 놓여 있고 몸 누일 여분의 공간이 있다. 벽에는 죽은 남편의 흑백사진이 걸려 있고 최근에 종교를 가졌다며 성화상(聖畵像)이 걸려 있었다.
그이가 지켜낸 집이다. 자식들에게 버림은 받았을지언정 자식을 품어 지켜낸 곳이다. 냉정한 타인들 속에서, 혼자 아이를 기르며 일하는 어미에게 어떤 배려도 하지 않은 사회 속에서 휩쓸리지 않은 한 뼘 자리다. 착취당했을지언정 그 누구의 것도 빼앗아본 적 없는 사람의 자리다. 세상의 학대를 당했지만 지키고 기르고 베푸는 마음을 끝끝내 잃지 않은, 온기가 남아 있는 자리다. 세상을 탓하지 못해 자신을 탓할지언정, 삶의 끈을 놓지 않은 용감한 자리다.
반듯하게 놓여 있는 기도하는 자리, 일찍 간 것이 불쌍하다는 남편의 사진, 손님에게 과일을 주겠다며 뒤적이는 냉장고, 좁고 어둑하지만 정갈한 부엌, 커피에 설탕을 타 먹는다는 습관, 아침저녁으로 돌보는 독거노인에 대한 염려, 선물하는 법을 모른다면서 남에게 슬몃 주는 작은 선물, 죽고 싶다면서도 남을 따라 웃고 마는 그 붉게 짓무른 눈가, 그 모든 것에 그이가 지켜낸 삶의 자취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더 외롭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이때까지 단 한 번도 권리를 가져본 적 없는, 오래 노동을 해온 이 나이든 여성에게 돌려줄, 응당 그의 몫이었어야 할 자리를 우리는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난 꿈이 없어요. 꿈도 배워야 꾸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다른 사람의 집을 구경하지도, 다른 걸 구경하지도 않았어요. 그냥 앉아 있었어요. 내가 구경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나하고 거리가 먼 거잖아요. 이루어질 아무 타당성이 없고 필요 없는 거잖아요. 난 꿈을 꾼 적이 없어요.”
공식적인 노동자로 집계되지 않은 채 여성노동자로서, 빈곤한 여성으로서, 그림자 노동을 하면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아이들을 지켜내며 평생 폭풍 속을 걸어온 사람. 그녀가 꾸어야 했던 꿈은 누구에게 도둑맞은 것일까? 또 다를 수 있었던 삶을 지금 다시 기억하고 꿈꾼다면 너무 늦은 것일까?
“시대를 잘못 만났지요. 내가 해방되기 전해에 태어나 6.25동란 겪고 우리나라 변하는 모습 다 보고…. 예전에 청계천 거리를 차박차박 걸어가다가 막내아들에게 말했어요. ‘저 냇물이 엄마가 산 역사다.’ 처음에 흘러가게 놔뒀다가 다시 막아놓고 또다시 뜯어서 흘러가는 냇물, 내 삶도 그랬다고… 난 가난한 엄마였지만 정말 최선을 다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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