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항상 ‘남성의 것’이었다. 전쟁의 모습은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고 전쟁의 역사는 그들의 목소리로 기록되었다. 전쟁의 기억은 남성의 몫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전쟁이 ‘남성들만 아는’ 일, 남성들의 기억인 걸까?
베트남 전쟁 당시 파병된 한국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 피해생존자 이야기를 담은 영화 <기억의 전쟁>의 이길보라 감독은 “전쟁 그런 거 난 몰라, 그건 남자들이 알지.”라는 할머니의 말에 의문을 가지면서 영화를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베트남전 참전으로 부재중이던 당시 집안을 먹여 살린 건 할머니인데, ‘정말 전쟁과 상관없는 사람이었던 걸까?’라는 질문을 가지고서 말이다.
이길보라 감독은 할아버지가 참전군인이었지만 민간인 학살에 대해선 전혀 들은 바 없고, 할머니는 그 전쟁에 자신의 삶이 연관되어있었음에도 전쟁은 모른다고 말했다. 이 전쟁에 대한 기억이 누군가를 중심으로 기록되었고, 또 누군가는 배제했기 때문이다. 감독은 그렇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전쟁의 기억을 좇기로 한다. 이 전쟁의 역사에서 담아내지 않으려고 하는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이 전쟁에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는 ‘여성’의 시선으로.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 하나 뺄 수 없을 만큼 흥미로웠지만, 특히 제작 과정에서 피해생존자를 마주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자 한 세심한 노력의 과정은 단연 돋보였다. 목소리를 듣고, 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또 내일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한 제작진의 이야기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타인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어떤 존재는 쉽게 지워버리는 삭막한 코로나19 사회에 시사점을 주는 것이었다.
당장 극장에 찾아가기 어려운 관객들은 이후에라도 꼭 <기억의 전쟁>과 만나길 바라며, 이길보라 감독, 곽소진 촬영감독, 서새롬 프로듀서, 조소나 프로듀서와의 만남의 현장을 전한다.
-네 분이 각자 <기억의 전쟁>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듣고 싶어요.
서새롬 PD 2014년에 이길보라 감독, 곽소진 촬영감독이랑 글쓰기 모임을 같이 하고 있었어요. 일주일에 한 번 자기가 쓴 글을 가지고 와서 서로 꼼꼼하게 읽어주고, 비평해 주는 자리였어요. 한번 이길보라 감독이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베트남에 대한 전쟁’에 대한 글을 써왔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야기에 대해 알게 되었죠. 그러다 언젠가 보라 감독이 “두 번째 장편을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야기로 하려고 해. 같이 하지 않을래?” 묻더라고요. 전 당시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려고 학교에 가려고 준비하다 학교에 가지 않기로 한 타이밍이었고요. 결국 그다음 해인 2015년 1월에 보라, 소진, 제가 베트남에 가게 되었죠.
곽소진 촬영감독 제가 탈학교생인데, 보라 감독도 탈학교생이잖아요.(이길보라 감독의 첫 연출작 중편 다큐멘터리 <로드스쿨러>는 탈학교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탈학교생들이 많지 않다 보니 서로 안면이 있었어요. 여러 행사에서 보라 감독을 봤고요. 그러다 글쓰기 모임을 같이하게 되었죠. 그때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화과에 재학 중이었었는데, 보라 감독이 촬영을 맡아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전 사실 촬영 전문이 아니었거든요. 사진만 찍을 줄 알았지 영상은 몰랐는데(다 같이 웃음).
저한텐 <기억의 전쟁>이 <로드스쿨러>(2008), <반짝이는 박수 소리>(2015)에 이어 세 번째 영화인데, ‘지속 가능한 작업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계속 고민이었어요. <반짝이는 박수 소리>는 장편이었음에도 혼자 만들다시피 했거든요. 혼자서 개봉을 하고 혼자서 관객과의 대화를 하고, 계속 혼자서 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계속 혼자서 영화를 만들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어떻게 하면 같이 영화를 잘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이어서 동료가 필요했어요. 특히 이 영화는 여성의 시선이 굉장히 중요한 영화라 여성 제작진으로 꾸리고 싶었어요. 꼭 여성만 참여해야 한다는 건 아니었지만 여성들이랑 일하는 게 너무 편하고 좋거든요. 마침 주변에 작업하는 여성들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여성 제작진을 꾸리게 되었죠.
조소나 PD 저는 2017년 세 분이 어느 정도 작업을 한 후, 첫 감독컷이 나왔을 때 ‘같이 일하자’고 제안받았어요. 한동안 고민했는데, 망설였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세 분이 마무리해야 하는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했다 떨어진 걸 듣고, 개인적으로 조금 화가 났던 거 같아요. 이 영화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뭔가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마침 그즈음에 영화의 주요 인물인 탄 아주머니께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2018년 4월 개최)에 참여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시민평화법정이 이 영화에 담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합류하게 되었죠.
-‘여성 시선’이라는 말을 종종 쓰면서도 대체 그게 뭘까? 의문이 들 때도 있어요. 영화 <미스에듀케이션 오브 카메론 포스트>(2018)의 촬영감독인 얘슐리 코너는 “남성 시선은 탐닉적이고 통제적이지만 여성 시선은 마음의 틀에 가깝다. 우리는 대상에 대해 좀 더 감정과 존중을 가지고 접근한다”고 말했죠. 네 분은 어떤 시선으로 영화를 만들고자 했는지 궁금합니다.
곽소진 촬영감독 ‘여성이어서 이 작품을 한다’는 생각으로 임하진 않았었어요. 근데 실제로 작업하면서 재미있는 부분들이 있었죠. 여성이라서 유리한 부분이 있더라고요.
-그건 굉장히 드문 일 아닌가요?(웃음)
그렇죠, 근데 사람의 성별, 신체의 크기나 형태 같은 것들이 영화의 내용에 기술적으로 영향을 준다는 걸 알게 된 몇 가지 지점이 있어요. 베트남은 사회주의 국가라서 촬영하려면 항상 공안(경찰)과 함께 다녀야 했는데, 제 생김새 때문에 아무도 절 촬영감독이라고 여기지 않는 거예요. 그 점이 굉장히 유용했어요. 제가 카메라를 들고 뭔가를 찍어도 어떤 사건이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거라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찍고 싶으면 찍을 수 있었고, 빨리 찍고 빠질 수 있었어요.(웃음)
요즘 제가 ‘여성 촬영감독’이라는 이유로 선택을 많이 받고 있는데요. 특히 남성중심 체제에서 밀려난 인물이나 소수자,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많이 선택되더라고요. 촬영에서 카메라가 어떤 인물이나 상황을 담아내기만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카메라 뒤에 있는 인물이 어떠한 성별이고, 어떠한 형태를 가진 어떠한 몸인지가 카메라 앞의 대상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죠. 카메라를 든 사람의 몸이 기능적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종류의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거죠. 카메라를 둘러싸고 형성되는 관계가 결국 내용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기억의 전쟁>이 제 첫 장편 영화여서 당시엔 그 부분에 대해 잘 인지하지 못했거든요. 근데 이후 다른 작업들을 하면서 점점 명확하게 인지가 되더라고요.
<기억의 전쟁> 경우엔 이 안의 사람들이 트라우마 상태에 있고, 특히 탄 아주머니의 경우엔 한국 남성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어요. 한국 남성의 신체가 주는 중압감에 굉장한 공포심을 가지고 계셨던 거죠. 만약에 제가 굉장히 몸집이 큰 ‘남성 촬영감독’이었다면 그 곁에 친밀하게 다가갈 수 있었을까요? 탄의 얼굴에서 다양한 표정이 나올 수 있었을까요? 그런 부분이 달랐어요. ‘여성 시선’이라는 건 ‘여성이 어떤 시선을 갖고 있다’기보다, 카메라 앞에 있는 대상과 그 뒤에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관계의 결이 다른 것 같아요.
우리가 그냥 촬영하는 사람, 혹은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온 사람에만 그치지 않았던 점이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했어요. 카메라로 담지 않아도 될 부분에선 카메라를 내려놓고, 카메라 안의 인물들과 관계 맺었거든요. 말이 통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듣고, 뭔가 먹어야 하면 같이 먹고, 그런 게 다 쌓여서 카메라 앞으로 연결된 거죠. 카메라 안과 밖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영화가 만들어졌어요. 영화가 어느 정도 만들어졌을 때 ‘우리 넷의 시선을 여성의 시선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조소나 PD 영화, 특히 다큐멘터리 영화는 어떤 사실을 재현해내고 어떤 사람을 조명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걸 할 수 있는 방식은 여러 가지인데, 이 이야기도 정말 잔인한 피해 사실을 담은 사진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만들 수도 있었겠죠. 그치만 우린 전쟁을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피해자가 살고 있는 세상을 재현하자는 생각을 훨씬 더 많이 했어요. 피해자들 혹은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를 확장시키는 방식을 선택한 거죠.
생물학적으로 딱 나누긴 어렵지만, 신기하게도 연령대가 조금 있고 남성인 분들은 영화를 보고 ‘그래서 팩트가 뭐냐? 증거가 있냐’고 하시더라고요. 그들에겐 그게 중요한 문제인 거죠. 그래야 처벌을 하고 보상도 한다는 생각을 하니까요. 그런 것보다는 등장 인물들에게 공감하고 그들의 세계를 감각하고 나의 삶과 이어지는 것들에 집중하는 사람들은 확실히 여성이 많더라고요.
이길보라 감독 관객분들 중에 시민평화법정 장면을 두고, ‘그런 법정 장면이 나오는 거면 진실 공방하고 그래서 누가 이겼는지를 보여줘야지, 왜 이렇게 편집했냐?’고 묻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근데 전 거기서 제일 중요한 건 탄 아주머니가 한국에 온 이유라고 생각해요. 법정에서 정말 떨리는 마음으로 이야기하잖아요. 탄 아주머니가 용기를 내서 ‘참전군인에게 사과를 받고 싶다, 내 손을 잡아달라’고 한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진실 공방이 오갔고, 그래서 남아있는 팩트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이 영화가 비춰야 하는 건 탄 아주머니가 한국까지 와서 이틀간의 공방을 다 듣고 나서 한 최종진술이었어요. <기억의 전쟁>은 그런 것들을 중심으로 담아낸 영화고요.
곽소진 촬영감독 서사적으로도 마음 가는 지점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이미 구조를 짜놓고 진행하는 극영화와는 다르게, 다큐멘터리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 와중에 ‘감독과 카메라가 어딜 선택해서 보는지’에 달렸잖아요. 결국 그 시선은 카메라를 든 사람의 시선과 마음의 형태와 닿아있겠죠. 감독이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냐, 촬영하는 사람도 어디에 시선이 가는 사람이냐에 따라서 결국 영화의 방향이 달라지죠. 또 감독이 무엇을 믿어 주냐도 영화의 큰 틀을 다르게 만드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청각장애인의 말을, 혹은 그냥 한동네에서 자라면서 평생 노동을 한 아주머니의 말을 믿어 줄 것인가? 그런 선택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역사와 젠더, 이런 것과 닿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청각장애인 껌 아저씨가 처음 등장해서 이야기할 때, 청인들의 편의를 위한 자막을 넣지 않은 것도 눈에 띄는 부분이었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처리한 것 같더라고요.
이길보라 감독 편집본에선 껌 아저씨 나오는 부분에 아예 자막이 하나도 없었어요. 전 영화라는 시청각 매체를 통해서 이 사람의 언어를 관객들이 감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항상 청인들은 너무 쉽고 편하게 우리의 언어로 이야기를 하잖아요. 근데 전 시청각 매체를 통해서 ‘농인의 언어를 우리(청인)가 진짜로 경험해봐야 하는 건 아닌가? 농인들이 자신들의 언어가 아니라 다른 언어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만큼 우리도 그들의 언어를 이해해 봐야 하는 건 아닌가?’라는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이길보라 감독 자막을 어떻게 표기할지 고민 많았어요. <반짝이는 박수 소리>에선 엄마, 아빠가 수어로 이야기할 때 조사라든지 이런 거 다 빼먹고 이야기하는 걸 그대로 살렸거든요. 예를 들어, ‘내가 봤어’를 ‘내가 봤.’ 이렇게 이야기하고 ‘어디 갔’, ‘나 어디 갔다 왔’ 이렇게 하시는 것을요. 근데 이 경우엔 껌 아저씨의 홈싸인을 한국어라는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거잖아요. 이걸 완성된 문장으로 변역할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난 이 사람의 언어를 정말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나? 근데 그 사람의 언어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그 사람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편집할 때 여러 시도를 했어요.
-껌 아저씨와의 소통은 어땠나요?
이길보라 감독: 우리 엄마, 아빠가 청각장애인인 걸 아시는 분들도 있으니까 ‘이길보라 감독이 소통을 담당했나 보다’ 하시는데요. 물론 그런 것도 있지만, 사실 껌 아저씨는 공식 베트남 수어를 쓰시는 분이 아니에요. 주변에 농인이 없는 마을에서 자랐고 농학교를 다닌 경험도 없고요. 그래서 자기만의 체계를 만들어서 소통하는, 그러니까 자기만의 홈싸인을 가지고 있는 분이에요. 그래서 그분의 체계를 조금 이해하면 대화가 가능해요. 완전히 깊은 대화는 못하더라도요. 신기한 건, 서새롬 피디도, 곽소진 촬영감독도 껌 아저씨와 대화를 너무 잘하는 거예요. 전 사실 소통이라는 건 어떤 능력이 아니라 의지라고 생각하는데, 그 의지를 분명히 가지고 있으니까 몸짓이나 그림 등을 다 이용해서 소통을 해내더라고요.
곽소진 촬영감독 껌 아저씨가 저와 소통이 가장 잘 되던 친구였어요. 왜냐면 베트남어는 통역가를 통하거나 나중에 우리가 베트남어를 배워서 조금씩 소통해야 했는데 껌 아저씨와 얘기할 땐 큰 해방감을 느껴지더라고요. 언어의 장벽을 전혀 느끼지 않을 정도로 해방감을 느끼면서 촬영했어요. 항상 통역하시는 분을 통하다가 껌 아저씨와 직접 소통하니까 너무 편했고, 오히려 우리가 통역가분에게 통역하고.(웃음)
-등장인물들과 관계를 쌓고 가까워지다 보면 피해 증언을 듣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그 과정은 어땠나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민이나 죄책감에 깊이 빠져들지 않기 위해 세워둔 원칙 같은 게 있었는지도 궁금합니다.
서새롬 PD 탄 아주머니의 경우, 사실 우린 이미 그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는데 작업을 위해서 한 번 더 증언해 달라고 요청할 때가 많잖아요. 그런 증언을 받아야 할 즈음엔, 셋이서 ‘어느 시점에서 증언을 요청하는 게 맞을까? 아침부터 하는 게 맞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했죠. 촬영을 3일로 잡았으면 ‘첫째 날부터 하는 게 좋을까, 중간에 할까, 마지막에 할까?’ 논의했고 증언을 요청하기 전에 탄 아주머니의 컨디션도 살폈고요. 또 증언을 들었던 시간이 30분이었다면, 이후 반나절 혹은 하루종일 다른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맛있는 걸 먹으면서 같이 시간을 보냈어요.
또 인터뷰가 한 번도 착취의 형태로 가지 않았다는 점도 훌륭해요. <기억의 전쟁>을 할 땐 첫 작품이어서 몰랐는데, 이제 다른 작업들을 하다 보니 차이점을 알겠더라고요. 창작자로서 욕심을 버리는 게 정말 쉽지 않은데 보라 감독은 인간의 존엄을 항상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피해 증언 인터뷰 중에 인터뷰이가 울면, 더 울게 하고 싶고 그렇잖아요. 근데 오히려 감정이 너무 북받쳤을 경우엔 먼저 끊고 쉬게 했어요. 그런 식으로 창작자가 지켜야 할 마지노선에 대해서 확실한 감독이었어요.
‘지금 피해 증언을 하는 이 사람에게도 내일이 있다, 내일은 또 아이를 돌봐야 하고 일도 해야 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던 거죠. 그걸 생각하지 않는 창작자들이 되게 많아요. 근데 내일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만 우리에게 들려달라고 부탁하고, 인터뷰를 쪼개서 촬영했던 게 훌륭했다는 생각이 들죠.
그리고 또 제가 느낀 건, 영화 속에 나오는 사람에게 갖게 되는 감정은 연민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이들이 증언을 시작한 이유가, 자기가 얼마나 힘든 삶을 살아왔다는 걸 알리고 어떤 식으로 보상을 받아야 되겠다는 게 아니라, 이제 이 이야기를 할 사람이 나밖에 없고, 내가 해야만 한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이잖아요. 그런 사람의 얼굴은 절대 불쌍하거나 혹은 비참하지 않아요. 오히려 굉장히 귀하고 얼굴에서 정말 빛이 나요. 탄 아주머니 촬영할 때도 얼굴이 너무 고상해서 놀랐어요. 마음먹고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간 사람의 얼굴은 다른 얼굴이 되는 것 같아요.
-영화에 제사 장면이 참 많이 등장합니다. 사실 많은 한국 여성들에게 있어서 제사는 불편한 분위기와 노동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에 저도 제사 장면을 보면서 기분이 묘했는데, 영화를 보다 보니 이들의 제사가 다른 의미라는 것이 느껴지더라고요.
곽소진 촬영감독 베트남은 사실 승전국이기 때문에, 베트남의 국가적인 역사 안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호명될 일이 없어요. 또 한국에서는 한국군이 그렇게 학살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고요. 그러니까 죽은 자들을 호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제사인 거예요. 제사 같은 형태 말고도 다른 방식으로 죽은 자들을 호명할 수 있는 일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그게 유일한 거였어요.
베트남 민간인 학살도, 이 사람들이 죽었다고 공동체에서 계속해서 기억하고 승인해 내야만 하는 겁니다. 또 한편으론 위령제, 제사를 지내는 과정을 통해 살아남은 이들이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자신의 삶을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거예요. 탄 아주머니가 영화에서 ‘제사를 지내야 했기 때문에, 그 덕에 내가 살았다’는 얘기를 실제로 하시죠. 정말 그런 의미였던 것 같아요.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무언가.
-영화엔 베트남전 참전군인들도 등장하는데요, 이들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고민이 있었을 것 같아요.
서새롬 PD 우리가 모든 이야기를 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작업 초반엔 ‘기억의 비중이 동일해야 하는 건 아닐까?’라는 의견도 없었던 건 아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몫을 하면 좋을 거라 생각했어요.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나면, (베트남전의 기억에 관한) 또 다른 이야기도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이길보라 감독 ‘기억의 전쟁’이라고 말하면, ‘한국군의 기억과 베트남 피해생존자의 기억이 싸우는 건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전 이 영화가 다뤄야 하는 건, 50년 동안 살아남아서 일상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먼저여야 한다고요. 참전군인에 대해서도, 무섭고 말이 안 통하는 분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지켜보다 보니 그들도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러는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면 다른 누군가가 담을 수 있지 않을까요?
곽소진 촬영감독 시민평화법정에 오신 참전군인분들이 있었어요. 제가 그동안 봤던 참전군인의 모습과는 무언가 다르더라고요.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를 지키셨는데 그 마음이 어땠을지 궁금했어요. 누군가 그 작업을 해 주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말고요.(웃음) 박주연 기자
* 영화상영관 및 행사 안내: 시네마달 https://cinemadal.modoo.at * <기억의 전쟁>은 IPTV와 VOD 서비스를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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