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의 화자를 ‘양’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양은 어렸을 때부터 일을 해온 사람이다. 중학교나 고등학교에 다니던 때를 생각하면 늘 어디선가 일을 하는 모습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지금도 물론 일을 하고 있다. 장소는 지하에 있는 서점이다. 계단 위의 벚나무에서 떨어진 꽃잎이 때때로 바람에 소용돌이치는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가장 좋은 시간의 햇빛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창백한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쏟아지는 일거리를 처리해야 하는 곳이기도 하다.
양은 결국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일은 양을 실종된 소녀의 마지막 목격자로 만든다. 모두가 반복해서 양을 찾아와 수없이 많은 질문을 한다. 양의 일생을 통틀어 한 번도 그렇게 많은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다.
실종된 소녀의 어머니는 양이 일하는 서점 앞에서 계속 전단지를 나눠주다가, 결국엔 딸의 사진을 세워놓고 하루종일 서점 앞에 엎드려있다. 출퇴근하면서, 혹은 길고양이의 밥그릇을 채워주면서 늘 그 웅크린 등을 바라봐야 하는 양은, 지하 안에서 일하는 내내 그 몸뚱이에서 도망칠 수 없는 양은 어느 날 문득 그렇게 생각한다. 어쩌라고요.
‘어쩌라고요, 아줌마. 나더러 뭘 어쩌라고요.’
대체 어쩌라고. 그 위악적인 말에는 순간 읽기를 멈추게 하고 시선을 머물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소설을 생각하면 늘 그 한 문장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아주 새롭고 놀라운 말이기 때문은 아니다. 많은 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그 말을 들을 수 있다. 그 말에 담긴 무책임과 외면도 낯설지 않다.
그 말은 공감과 연민의 정확히 반대 지점에 있는 무관심의 언어다. 그 말은 누군가의 고통을 한없이 납작하게 만들고,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만들고, 사람과 사람의 연결을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어쩌라고’는 당신이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말과 같다.
같은 고통을 통해 연대감을 성취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양의 ‘어쩌라고’는 조금 더 불편한 선언과도 같을 것이다. 흔히 여성에게 가해지는 위협과 폭력의 희생자일 것이 분명한 그 소녀를 향해 양은 어떤 공감도 연민도 드러내지 않는다. 양은 ‘아줌마 딸, 그 애는 나한테 아무도 아니라고요’라고 생각하며 소녀와 자신 사이에 분명하고도 날카로운 선을 긋는다. 그 사이에는 어떤 책임도, 공감도, 연결도 들어설 여지가 없다. 고통의 연대는 ‘어쩌라고’ 앞에서는 완전히 불가능하다.
‘어쩌라고’는 이토록 비윤리적인 언어로 보인다. 이 말이 단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장면이었다면, 양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비판의 대상으로 삼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겐 하나의 장면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이, 하나의 대사만이 아니라 양의 인생 전체가 주어져 있다. 나는 아주 낯선 사람의 이야기에서 아주 익숙한 대사를 발견할 때마다, 이 하나의 대사가 지닌 전사(前事)를 누군가에게 해명하기 위해 이 모든 이야기가 쓰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곤 한다. 어떤 말들은 이해받기 위해 책 한 권이 필요하고, 어떤 선택은 이해받기 위해 누군가의 삶 전체가 필요하다. 아주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진실들이 있다.
‘어쩌라고요’에도 어떤 진실이 담겨 있다. 양은 선택을 했다. 의심스러운 장면을 보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그러나 양이 그런 선택을 한 이유는 사람들이 지금껏 계속 양을 무시했고 만만히 봤고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은 자신의 의심이 의미 있게 받아들여질 거라고 확신하지 못했고, 신고자로서 적절한 보호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어쩌라고’, 그 안의 담긴 원망은 자신의 선택이 온전히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자의 감정이다.
소수자의 선택은 많은 부분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주어진 최소한의 조건들, 이득과 손실이 삶의 맥락 위에서 형성되고 그 역동 속에서 선택을 수행한다. 그래서 그 선택들은 간명한 한두 개의 문장으로 설명될 수는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런 이야기를 간직한 자들은 늘 간명한 한두 개의 문장으로 대답하기를 요구받는다. 실종된 소녀의 어머니는 매일 서점에 찾아와서 양에게 계속 질문한다. 마지막 질문은 늘 같다.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양이 가진 대답은 하나뿐이고, 그 질문이 허용하는 대답도 하나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외의 이야기는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다.
한 문장의 간명한 진실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길고 복잡한 이야기란 건 변명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이 단지 변명에 불과한 것이라면 새로운 언어, 삶의 진실은 결코 발견될 수 없다. 어떤 말이 이해하기 쉬운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그 말이 기존의 언어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새로운 언어는 늘 변명 같은 누군가의 삶의 서사에서, 거추장스러운 단서처럼 보이는 어떤 망설임에서 발견된다.
‘어쩌라고요’는 그렇게 나를 붙잡은 문장이지만, 결국 입 밖으로 내뱉어지지 못한 말이기도 하다. 그 말이 이해받기 위해선 책 한 권이, 자신의 인생 전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양도 알았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양은 지하의 합판 벽 뒤에 길고 거대한 통로가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아파트의 경비는 그 합판 벽 뒤에 통로 따윈 없고, 그저 곰팡이 핀 벽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양은 그 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낀다. 합판의 벽을 뜯어낸다면 그 진실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길고 긴 삶인지, 초라한 변명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합판 벽 뒤에 아직 숨어있다. 실종된 소녀의 마지막 목격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아직 사람들은 모른다.
[페미니스트의 책장]은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UnivFemi) 회원들의 글로 채워집니다. 이 기사의 필자 은진(호네시)님은 “글 쓰는 대학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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