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이전의 내가 변한 지금의 내 모습, 되고 싶은 모습, 혹은 타인의 모습. 나는 이 책을 2019년 여름에 처음 읽었다. 그때도 나는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다른 사람’을 ‘타인’이라고 해석했다. 그런 걸 보면 그때의 나와 지금은 나는 썩 다른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그 교양 강의는 이름에 ‘문학’과 ‘인권’이라는 키워드를 달고 있었는데, 그런 것에 비해서는 사전에 권리와 평등에 대해 오래 고민해본 수강생이 많지 않은 수업이었다. 『다른 사람』을 읽고 진행했던 수강생들끼리의 토론 시간에 고작 ‘이런 사건은 응당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것 아닌가’를 주제로 떠들었던 게 기억난다. 하필 그날 토론 조로 배정된 나는 열변을 토했다.
“직접 읽어보셨으니 아시잖아요. 각각의 피해자들에게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는 걸요. 더군다나 신고와 처벌에 어려움이 따르는 상황에서 타인의 판단을 멋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얘기를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고민할 때 느꼈다. 이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듣는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고.
다섯 명의 다른 이야기들이 만들어낸 믿음
가해자의 이야기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에는 약 다섯 명의 인물이 들려주는 각자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조각난 채 언급되는 유리의 이야기를 밝혀낸다. 유리는 현재 시점에서 이미 죽은 사람으로, 유일하게 이 소설에서 자신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수 없다. 유리의 이야기는 이 다섯 명의 인물이 모두 성폭력으로 얽혀있다는 사실을 관통한다.
포문을 열고 책 내용을 이끌어가는 인물은 진아인데, 각각 다른 인물들의 말을 듣고 유리의 이야기를 밝혀내는 역할이라고도 할 수 있다. 특이하다고 생각했던 건, 진아라는 화자의 서술이 그다지 믿을 만하지 않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는 점이었다. 진아가 호소한 폭력 피해가 거짓으로 의심된다는 건 아니다. 그의 서술이 불안정하다는 느낌이 든다는 뜻이다.
진아는 애인의 폭력, 고발 전의 압박, 2차 피해, 미흡한 가해자 처벌 등 있어서는 안 되지만 너무나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사건들로 이미 고통받은 후다.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고 가해를 정당화하려는 직장 동료들과 상사에게 “어른이 되어야지” 따위의 말을 들었고, “피해의식이 있습니까?” 따위를 묻는 병원에서 상처받고 상담받기를 포기했다. 독자들에게 조리 있게 경과를 전달하고 자신의 감정을 차분하게 설명할 만큼 건강한 상태가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이 소설에서는 진아가 진아의 이야기를 할 때만 화자가 ‘나’로서 등장한다.
진아는 그렇게나 상세하게 자신의 고통을 털어놨어도 독자와의 거리감이 불가피한 반면, 동희는 철저하게 자의적인 해석을 늘어놓았을 뿐인데도 간단히 신용을 준다. 한 문장, 한 문단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두터운 벽이 동희를, 가해지목인을 보호한다.
하지만 나는 그 학생이 진아와, 단아와, 수진과, 승영과, 유리의 이야기를 모두 읽은 다음 동희의 말을 다시 듣는다면, 그때는 동희의 시선이야말로 비합리적임을 눈치챌 거라고 생각한다. 동희가 외면하고 있는 다른 이야기를 직접 읽은 것이기 때문이다. 동희의 시선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는 다른 이야기를 무시하고 있다. 진아가 바로 그 이야기들을 주워 모으기 위해 애쓰며 마침내 우리에게 믿음을 주는 동안 말이다.
이야기의 끝에, 진아는 우리가 결국 그에게 마음을 열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처음으로 우리를 직접 부른다. ‘너’는 유리이기도 하고 진아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우리다. ‘나’와 ‘너’의 최초의 만남. 소설이 바깥으로 이어지는 순간.
우리는 한순간도 같은 사람이었던 적 없다
그렇지만 정말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만으로 진아를 설명할 수 있을까? ‘너’라는 말로 유리와 진아와 우리를 묶어낼 수 있을까?
진아는 자신을 ‘클리셰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며 자신이 훑어본 일들을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일. 그렇게 대단하지도 엄청나지도 않은 사건’이라고 명명한다. 익숙한 설명이기는 하다. 여성 살해사건이 있은 이후, 미투 운동의 흐름이 있은 이후, 소라넷과 n번방 사건이 있은 이후, 우리도 서로를 더 끈끈한 ‘우리’라고 부르게 되지 않았나.
나는 내가 본 것이 각각 ‘다른 사람’의 삶 속에 있는 각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의미 있다고 느꼈다. 진아가 고향에서 수진과 함께 논밭을 거닐었기 때문에, 단아의 손을 오랫동안 잡아주었기 때문에, 이곳저곳에 적응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힘내서 살아왔기 때문에, 진아가 다른 누구도 아닌 진아이기 때문에. 수진이 수진의 삶을 살고, 유리가 유리의 레포트를 남겼기 때문에. 진아가 답답하게 느껴지고, 수진이 냉정하게 느껴지고, 유리가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그들이 결국 내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만은 없는 완벽한 타인, 즉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가 이 책을 읽고 난 다음 진아도 수진도 유리도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럼으로써 비로소 유리가 아닌 다른 ‘너’들이, 진아가 아닌 다른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가 ‘뭉뚱그려질 수 있는 클리셰’로 읽힐 때 우리는 하나가 된다. 하지만 ‘우리’라는 말은 거기에 모인 다른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지 않을 때 더 강력해진다. 우리가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때, 그곳이야말로 “응, 유리야.”하고 응답하는 사회일 것이다.
우리는 한순간도 같은 사람이었던 적이 없다. 우리는 같은 곳에 모인 ‘다른 사람’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강하다. 우리가 하나 아닌 우리에게 답할 때, 그 다성악(多聲樂)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믿는다.
[페미니스트의 책장]은 대학 페미니스트 공동체 유니브페미(UnivFemi) 기획으로 채워집니다. 이 기사의 필자 원정 님은 “문학이 언제나 약자를 대변하길 바라는” 유니브페미 활동가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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