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집을 나온 것은 2014년 가을이었다. 당시 나는 18살, 학교에 다니지 않는 탈학교 청소년이었다.
16살, 중학교 3학년 때 머리부터 발끝까지 통제하는 학교가 답답해서 숨이 막혔다. 더는 못 견디겠다 싶었을 때 나는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부모와 몇 달간 갈등을 겪은 후 학교를 그만둘 수 있었다. 이후 나는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하면서 검정고시 준비를 했고, 합격 기준이 낮아 통과하기 그다지 어렵지 않던 고등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당시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지겨워지면 쉬는 시간에 틈틈이 책을 읽었는데, 그때 처음 ‘학생 인권’이나 ‘청소년 인권’에 대한 책을 찾아 읽었다. 검정고시에 합격한 이후, 나는 책에서 읽은 청소년 인권단체 모임에 처음 찾아갔다.
이후 청소년 인권단체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그동안의 답답함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얻었다.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던 수많은 통제와 차별이 사실은 사회적인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내 주변에는 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었는데, 처음으로 내가 가졌던 분노와 답답함에 공감하는 이들을 만나면서 나는 새로운 세계를 맞았다.
나는 아는 것은 많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내가 해봤던 그 어떤 것보다도 열심히 단체 활동에 참여했다. 처음 거리에서 청소년 인권을 외치며 캠페인을 할 때, 그 해방감이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청소년 인권단체 모임에 참여하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모임에 남성은 없는지 물어보면서 걱정을 표하기도 했고, 내가 활동하는 단체에 전교조 등 특정 배후세력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나는 부모가 이런 마음을 표현할 때마다 내 삶이니 내가 알아서 할 거라고 항변했다. 갈등의 골이 깊어진 어느 날, 부모는 10시 통금을 내세우며 지키지 않으면 용돈을 주지 않겠다고 했다.
청소년 인권 활동을 하면서 부당함을 인식하는 감각을 키워나갔던 나는 부모의 협박이 치졸하게 느껴졌다. 청소년인 나는 일을 하고 싶어도 법적으로 부모 동의가 필요하고, 아르바이트를 구해도 주휴수당은커녕 최저시급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는 고용주들이 많았다. 우리 부모는 내가 알바를 한다고 하면 허락해줄 리가 없었다. 그런 나에게 얼마 안 되는 용돈으로 협박하다니.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명절 때마다 받았던 세뱃돈을 쓰지 않고 고이 모아둔 상자를 열었다. 돈이 쌓이는 맛에 꾹 참고 열지 않았던 상자 안에는 백만 원이 있었다. 나는 더이상 집에서 지내고 싶지 않았다. 학교가 내 숨을 옥죄었던 것처럼, 나는 집에서 지내는 것이 너무 답답했다. 고민을 하다가 일단 보증금 없이 단기간으로 지낼 수 있는 고시원에 가기로 했다.
나의 첫 집, 3평 남짓 고시원 방
생일이 12월인지라 나는 만 16세, 법적으로 미성년자였다. 우리나라 민법 5조에 의하면, 미성년자가 법률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법정대리인(친권을 가진 부모 등)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그 말인즉슨, 청소년은 부모 동의 없이 단독으로 부동산 계약서를 쓰지 못한다는 것. 고로 청소년이 집을 구해 독립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동의를 얻거나, 다른 사람의 명의를 빌려야만 한다. 딸이 밤늦게까지 다니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의 부모가, 내가 혼자서 집을 나가 생활하는 것을 받아들일 리는 만무했다. 나는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명의를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에 사는 활동가 중 한 명이 학생증을 빌려줄 수 있다고 했다. 서울의 한 대학가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따듯한 밥을 사주었다. 그는 내게 본인도 집을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다른 사람이 사주었던 밥 한 끼가 큰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에게 학생증을 손에 건네어 받은 순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긴장감이 훅 밀려 들어왔다. 다른 사람의 명의를 사용하는 일은 법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빠는 회사를 가고 엄마는 다른 일이 있어 집을 비운 날이 찾아왔다. ‘오늘이다’ 싶었다. 후다닥 책가방을 하나 집어 당장 입을 옷과 세면도구를 쑤셔 넣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는 기분. 집 문을 나왔을 때는 쌀쌀한 날이었음에도 혹여 부모가 알게 될까 불안함에 이마와 등에 땀이 흘렀다.
묵직한 가방을 등에 메고 길을 걷는데 이내 나는 짜릿한 해방감을 느꼈다. 드디어 집을 나오는구나. 그렇지만 마음을 놓기에는 일렀다. 미리 찾아본 역 근처의 고시텔에 닿았을 때 나는 신분증을 빌려준 친구의 주민번호와 나이, 띠까지 머리에서 끊임없이 되새겼다. 실수하면 안 돼, 절대로.
고시텔 카운터에는 중년의 아저씨가 앉아있었다. 그는 신분증 대신 학생증이 있다고 말하는 앳된 얼굴의 나를 약간 미심쩍게 바라봤다. 하지만 내가 건넨 명문대 학생증을 보고 ‘oo대 다니네?’ 하며 친근하게 아는 척을 했다. 혹여나 들키지는 않을까 떨리는 마음으로 계약서를 썼다. 그에게 한 달 방값 40만 원을 건네주고 나는 방에 첫발을 디뎠다.
삼 평쯤 되어 보이는 방은 정말 코딱지만 했다. 그 안에 싱글 사이즈의 절반 크기 정도 되는 침대와, 같은 면적의 바닥, 속이 훤히 보이는 유리로 된 화장실이 있었다. 본가의 내 방보다 절반도 안 되는 작은 방이었지만 나는 안도감이 들었다. 내 첫 집이었다. 부모가 더이상 간섭하지 못하는, 누구도 허락 없이 내 방문을 마음대로 열지 못하는 나만의 공간.
근처 대형마트에서 양손 가득 화장지와 청소 솔 등 살림살이를 샀다. 짐을 풀고 수납장에 옷과 사 온 물건들을 채워 넣으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창문이 없어 빛도 안 들어오고 환기도 제대로 안 되는 열악한 주거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며칠 만에 반평생 내 몸을 떠나지 않았던 아토피가 말끔히 나았다. 그동안 자유롭지 못한 환경은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아프게 했구나.
나는 처음으로 집에 애인을 초대했다. 한 명이 누우면 다른 사람은 편히 몸을 뻗거나 뒤척이기 어려운 침대였지만, 옆으로 누워서라도 함께할 공간을 갖게 되었다. 작디작은 딱딱한 침대 위에서 섹스를 하고, 밤에는 같이 잠들었다. 섹스할 때면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숨을 죽이거나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새벽에 자다가 일어나면 둘 중 한 명은 바닥에 누워서 쪼그리고 자고 있었다. 그래도 그런 공간이나마 존재함에 감사했다.
청소년인 내가 애인과 섹스를 하고 잠을 잔다는 것을 알면 충격을 받을 부모가 있는 집에 애인을 초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모텔에 가려고 해도 나이를 속여야 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하룻밤에 삼사만 원 하는 모텔비는 주머니가 가벼운 청소년에게는 너무 비쌌다.
주변 청소년활동가들의 조언에 따라 핸드폰 유심칩은 미리 빼 두었다. 친권자가 경찰에 자녀가 가출했다는 신고를 할 경우 위치추적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는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채팅 메신저 앱으로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며칠 동안 답장을 하지 않다가 계속된 메시지에 ‘엄마 아빠의 통제가 너무 힘들고 답답했다’고 말했다. 다행히 내 부모는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고 아빠는 결국 내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메시지를 보냈다.
다시 연락을 간간이 주고받기 시작한 이후, 부모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테니 집으로 돌아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돌아가지 않기로 선택했다. 나는 이미 자유로움이 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내가 그들의 자녀이자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미성숙한 존재로 여겨지며 통제받을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집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편집자 주: 다양한 여성들의 시각으로 ‘주거’의 문제를 조명하는 <주거의 재구성> 기획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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