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이불, 문제집 꽂힌 책장…아늑한 나의 감옥?!<주거의 재구성> 어느 탈가정 청소년의 “내가 살고 싶은 집”②10대 초반이나 그 이전에 ‘나는 나중에 커서 어떤 집에서 살까?’를 생각하면 막연히 흰색의 커다란 단독주택과 잔디 깔린 정원, 그리고 강아지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집을 나온 이후 내가 꿈꿨던 집은 단지 ‘답답하지 않은 집’이었다. 나의 사생활이 보장되며, 누구에게도 허락받을 필요 없이 내가 원하는 것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곳 말이다.
원하는 시간에 드나들 수 있고, 원하는 옷을 입고, 원하는 시간에 잠들고 깨어나는 것. 지금의 내가 생각했을 때 너무나 사소한 일상이지만 청소년인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나는 그 자유를 찾아 집을 나왔다.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면 안 되는 곳. 언제든지 용돈이 끊길 수 있고, 맨발로 쫓겨날 수 있는 곳. 말을 듣지 않았을 때는 30센티미터짜리 자나 나무막대기로 손바닥을 맞는 곳. 혹은 벽 한구석에서 손을 들고 벌을 서야 하는 곳. 마음대로 내 방문을 잠그면 안 되는 곳. 애인을 초대해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는 곳. 통금시간을 지켜야 하는 곳. 누군가가 내 가방이나 일기장을 허락 없이 열어볼 수 있는 곳.
청소년인 나에게 집은 가장 사소한 일상까지 침해받는 공간이었다. 나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부모는 많은 통제와 체벌을 가했지만, 정작 나는 집에서 안전하지 못했다고 느낀다. 집을 나온 이후에는 세상이 ‘가출청소년’에게 건네는 손가락질과 미성년자여서 겪은 법적인 난관이 있었지만, 부모와 한집에서 함께 살 때보다 마음이 편했던 것은 분명하다. 자유의 영역이 한결 넓어졌다. 좋아하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내 삶을 내 선택으로 꾸린다는 주체적인 느낌도 나를 더 강하게 해주었다.
최근에 <아티스트 웨이>(줄리아 카메론 저)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은 내 안에 있는 예술적인 창조성을 깨우기 위한 여러 방법을 제안하는데, 그중 인상 깊었던 한 가지는 어릴 적 나의 방과 지금의 나의 방을 비교하고 무엇이 다른지 생각해보는 활동이었다.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내 방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핑크색 이불이 덮인 침대와 문제집과 참고서가 가득 꽂힌 흰색의 책장이 떠올랐다. 나는 사실 핑크색을 좋아하지 않고, 문제집보다는 판타지 소설과 역사책을 더 좋아했다. 옷장 안에는 어깨와 목이 늘 답답했던 교복과 무난한 검은색 옷들이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튀어 보이지 않기 위해 교복을 입지 않을 때는 검은색 옷을 입었고, 나의 외모가 싫어서 친구들처럼 화장을 했다.
그러나 지금 내 방을 찬찬히 둘러보면, 내가 고른 따듯한 촉감의 이불이 깔린 침대와 부드러운 노란빛 조명이 방에서 은은하게 퍼진다. 내가 그린 그림이 그려져 있는 옷장에는, 몸을 죄지 않고 내가 원하는 촉감과 색의 옷으로 채워져 있다. 책장에는 나에게 영감을 주고 나를 즐겁게 해주는 책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내가 원하지 않기 때문에 더이상 화장을 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 나의 방은 지금 떠올려봐도 답답한 느낌과 함께 여자아이에게 요구되는 고정되어있는 딱딱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지금의 나의 방은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이곳에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편안하게 쉴 수 있다. 한마디로 사람답게 사는 느낌이 든다.
헤아리지 않으면 쉽게 잊어버리고 마는 그때의 기억을 되새기고자 하는 이유는 여전히 많은 청소년에게 집은 자유를 앗아가는 공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기억하고, 그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공감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청소년을 포함한 누구나, 자기답게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곳에서 숨을 쉬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끝>
*편집자 주: 다양한 여성들의 시각으로 ‘주거’의 문제를 조명하는 <주거의 재구성> 기획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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