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발굴한 여성의 역사: 가시화되지 않았던 여성들의 자취와 기억을 공적 담론의 장으로 건져 올리는 여성사 쓰기.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페미니스트 평화운동가이자 연구자인 신시아 코번(Cynthia Cockburn)은 여성들 사이의 ‘위치성’이라는 개념을 강조한다. 여성이 어디에 서 있느냐에 따라 전쟁과 민족주의, 평화에 대한 사유가 다르고 활동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민족주의를 평화운동의 자원으로 여기는 여성도 있지만, 민족주의는 전쟁을 자극하는 광기라며 비판하는 여성도 있다. 남성과 동등한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군대에 가는 여성도 있고, 군대 없는 세상을 위해 활동하는 여성도 있다.(신시아 코번 지음, 김엘리 옮김 『여성, 총 앞에 서다』 삼인, 2009) 만약 이분화된 두 극단의 확고한 입장만을 대비시켜 언급한다면, 모순적인 현실을 떠안고 살아가는 여성들이 그 사이를 무한 왕복하며 머뭇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지우게 된다.
변희수 하사의 눈물과 여군의 위치
필자는 페미니스트로서 병역거부 운동을 지지하며, 군대가 없어져야 한다고 외쳐온 사람이다. 그래서 트랜스젠더 여성 변희수 하사가 여군으로서 복무를 이어갈 수 있도록 “대한민국의 군인이 될 기회를 달라”며 눈물의 거수경례를 하던 날, 순간적으로 당혹감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가 군대 내에서 성별로 인한 차별을 없애고 성소수자의 자리를 확보하는 의미가 있다는 점에서 곧 납득이 되었다. 무엇보다 변 하사가 휴가 중에 성확정 수술을 받고 돌아오도록 대대장이 허락했다는 것, 그리고 동료 군인들이 그녀를 지지해 주었다는 것이 놀라웠고 진심으로 기뻤다.
하지만 결국 육군은 변 하사를 상대로 의무심사를 진행했고, ‘심신장애 3급’으로 현역복무에 부적합하다고 판단하여 강제 전역을 명령했다. 한국의 군대는 견고한 성별 이분법과 ‘정상적 신체’라는 편견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존립할 수 없는 집단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했다.
그러나 변희수 하사의 주장은 한국의 군대로 하여금 성소수자와의 공존을 고민하게 만들었고,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대 입학을 둘러싼 논쟁과 함께 우리 사회에 ‘여성’의 범주를 되묻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각각 여군의 일상을, 여대생의 안전을 위협하는 ‘침입자’라는 낙인을 찍으려는 움직임도 포착되었다.
변 하사의 강제 전역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군들의 거부를 그 이유로 들었다. 과연 그럴까? 이와 관련해 군인권센터 소장은 tbs 교통방송 라디오 ‘김지윤의 이브닝쇼’와의 인터뷰(1월 22일)에서 현역 여군들의 반응을 이렇게 전했다. ‘언제부터 우리 인권을 그렇게 걱정해줬냐, 남군하고 생활하는 게 불편하면 우리를 위해서 남군들 다 전역시킬 거 아니잖나. 소수자끼리 싸움 붙이는 비겁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고 얘기했다는 것.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일단 숙소는 영외 숙소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다. 그리고 화장실을 같이 쓰는 건, 어차피 다 칸막이가 돼 있다’는 설명이 덧붙여진 순간, 변 하사를 받아들이는 데는 ‘영외’와 ‘칸막이’라는 조건이 붙는구나 싶었다.
그날, 여군의 ‘위치’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위치성’은 권력 관계를 암시하는 말이다. 한 개인이 어떤 계급, (인)종, 젠더, 장애의 차원에 위치한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서로 다른 위치를 가지면서, 권력이 상대적으로 강하거나 약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유는 다른 자리에 서 있는 여성들이 어떻게 서로의 자리를 비추며 당면한 공동의 문제를 함께, 그러나 다르게 마주할 수 있을지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페미니즘이 모든 차별적 구조와 권력에 저항한다고 할 때, 페미니즘과 병역거부 운동 그리고 여군은 어디까지 함께 갈 수 있고, 어느 지점에서 어긋나는가. 병역을 거부하는 여성들과 군에 복무하는 여성들이 다른 위치성에서 함께 도모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예비역 여군이 군대를 반대하는 여성에게 건넨 말 ‘동지적 관점’
여성들의 병역거부 운동 사례를 발굴하는 기사를 쓰면서 예비역 여군 두 사람과 인터뷰했다. 병역거부 운동을 지지하더라도 징병제와 모병제는 다르게 다뤄져야 하고, 여군 또한 하나의 직업군이 되고 있는 현실에서 섬세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편집자의 조언을 듣고 여군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상사에 의한 성폭력 피해나 ‘최초로 ~이 된 여군 아무개’라는 뉴스 이외에, 여군의 일상과 그들이 마주한 문제들에 관한 이야기는 좀처럼 들을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기혼 여군의 70%가 남군과 결혼한다는 통계를 말하던 중, 육아휴직은 ‘여군’의 문제가 아니라 ‘군’의 문제라는 것을 강조하는 대목이었다. 김 씨는 “육아휴직이 마치 여군만의 문제인 양 질문하면 여군이 독박을 쓰는 거죠”라고 말했다. 여군이 군대에서 소수라는 사실을 당연한 전제로 던지는 질문 대신에, 여군의 수를 전체 군의 몇 퍼센트로 제한한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고 했다. 그녀들은 군대가 생산하는 성별 이분법에서 기인하는 부당한 노동조건에 맞서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국의 군대는 이러한 성별 이분법에 의해 유지되고 강화된다는 사실이 그 이면에 버티고 있다.
또 다른 예비역 여군 C도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주었다.
“일찍 결혼한 친구(여군)들은 일과 가정, 양육을 위해서 굉장히 애를 써요. 양립하는 것 자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든요. 양립을 강요하는 것은 나를 상실하게 만들더라고요. 그런데 오히려 군에서는 그런 여성들을 홍보의 대상으로 삼아요. 군대에서 진급하면서 자녀도 세 명이나 키운다고. 그러면 그 속에서 또 다른 여성들이 희생되잖아요? 친정엄마, 시엄마, 자녀까지도 희생시켜가면서 군 생활을 하고 있고, 그것을 평화롭고 행복한 것으로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물론 시대가 바뀌면서 많이 보완되었지만, 여전히 슈퍼우먼을 강요하고. 또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남성화되지 않으면 안 되고. 조직의 틀에 나를 맞추지 않으면 생존이 곤란해지기 때문에….”
C의 이야기가 맞벌이 부부로 아이를 키우는 내 친구의 고민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새롭게 다가왔다. 반군사주의라는 거대 담론에 함몰되어 정작 무엇을 못 보고 있었는가. 수많은 일화(逸話)도 자료가 될 수 있다면, 이제 통계 바깥에서 여군들의 이야기를 듣고 쓰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감사 인사를 전하고 여성들의 병역거부 운동에 대해 쓴 글을 보냈다. 이튿날 새벽에 김은경 씨에게서 답신이 왔다. “하는 일이 달라도 ‘동지적 관점’으로 보내준 글을 읽었다”며 여군 관련 자료들을 공유해 주었다. 그녀가 내게 건넨 마음, ‘동지적 관점’은 무엇일까. 이 물음을 안고서 각기 다른 ‘위치성’을 가진 여성들이 저마다 다른 곳에서 다른 시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군사화와 전쟁을 접한 경험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헌혈 캠페인으로 한국전쟁에 동원된 미스 재팬
패전 후, 점령주둔군에게 살던 집을 접수(接收)가옥으로 몰수되는 경험을 한 야마모토 후지코(山本富士子)는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년 당시 18세였다. 전쟁 발발 3개월 후 제1회 미스 재팬으로 뽑히자마자, 일본적십자는 유엔군 진료소에서 그녀의 헌혈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전시 헌혈 캠페인’을 벌였다. 이후 ‘유엔군 부상병과 한국 난민구조를 위한 모금’을 실시하고, 아사히신문에는 헌혈을 호소하는 광고가 실렸다.(『적십자가정신문』 1950년 10월 12일자) 미스 재팬 대회는 애초에 구호물자에 대한 감사를 전달하기 위해 미국에 보낼 친선대사 선발을 목표로 시작되었다.
이웃 나라의 전쟁을 위한 헌혈은 국경을 넘어선 인도적 행위로 비추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기에 연합국최고사령부(GHQ, General Headquarters) 점령하에서 한국전쟁을 지탱하는 병참기지로써 일본이 ‘참전’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헌혈 캠페인은 당사자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련의 전쟁 개입 행위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한국전쟁 시기에 수송함에 실려 바다를 건넌 젊은 일본 여성들의 피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인다는 식의 이야기가 회자되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들어보면 야마모토 후지코의 경험은 전시에 국가가 여성을 동원하는 방식의 한 사례로 다뤄질 수 있다. 그런데, 후일담에 귀를 기울여 보자. 영화배우로 활동하던 그녀는 1963년에 대형 영화사 다이에이(大映)와의 계약 변경을 앞두고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프리를 선언했다. 기자회견장에서 그녀는 “이번 일로 영화에 나올 수 없게 되어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 입장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그게 더 살맛 나고 인간적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격노한 사장은 야마모토 후지코를 타사의 영화나 무대에서도 완전히 배제하려 들었고, 이 사건은 당시 일본 국회에서도 거론될 정도로 인권 침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계기가 됐다.(별책 보물섬 2551 「일본의 여배우 100명⌟ p.39 참조)
미인대회 출신으로 헌혈 캠페인에 동원된 야마모토 후지코의 수동성에만 주목하면, 그녀의 삶에서 어떤 사건 ‘이후’의 경험 혹은 그 사건이 일어난 순간에 드러나지 못하는 ‘이면’을 놓치고 만다. 소여(所與)된 자리 혹은 수동성 속에서도 길어 올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누군가의 정체성을 어느 한 시기에 국한해서도 안 되고 하나로만 단정 지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후일담은 계속되어야 한다.
일본적십자 간호사들의 병역거부
전후 일본적십자는 ‘군대를 보유하지 않는 국가의 봉사구호기관으로서, 또 문민을 위한 활동을 하는 공공기관의 보조기관으로서’ 인정되어 국제적십자의 재가입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연합국최고사령부의 동원 명령을 받은 일본적십자사는 ‘아카가미’(赤紙)를 보내 간호사들을 소집했다.
사가현(佐賀県)에 있는 국립병원에서 일하던 간호사 다섯 명은 아카가미를 받아들고 다른 나라의 전쟁에 동원되기는 싫다며 울었고, 결국 병역을 거부했다. 특히 과달카날섬에서 종군했던 한 간호사는 “이제 막 돌아왔는데 더이상 전쟁에 나가기 싫다”며 그 자리에서 아카가미를 찢어버렸다. 일본적십자 관리는 “나라를 위해 기꺼이 일해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일본적십자의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며 그녀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니시무라 히데키 지음, 김정은 김수지 강민아 심아정 옮김,『‘일본’에서 싸운 한국전쟁의 날들』 논형, 2020년 근간)
그러나 병역을 거부하지 못했던 열여섯 명은 후쿠오카시(福岡市) 중심부에서 약 30km 떨어진 유엔군 제141 병참병원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유엔군은 일본에 14개의 야전병원을 개설했는데, 한국전쟁의 격화로 개설된 제141 병참병원은 환자 수가 약 1,500명 정도 되는 대규모 병원이었다.
마키코 지에코(牧子知恵子, 당시 25세)의 기억에 의하면, 야전병원에는 간호사가 1,000명 정도 있었고 의사는 모두 미국인이었다. 환자 중에 한국인 병사는 없었으며, 미군 환자의 대부분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게이트를 통과할 때 남성 경비병이 몸수색하는 것이 제일 싫었다고 한다. 일본 영토에 세워진 야전병원이었음에도, 간호사들은 출입할 때 반드시 여권을 제시하고 몸수색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경험이 어떤 연속선 상에 놓여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 현재 일본 각지에서 적십자병원이 자위대와 합동훈련을 하는 것을 문제 삼는다. 명목상 재난대비훈련이라고는 하지만, 유사시(有事時)를 가정한 무기체계와 설비 속에서 받는 군사 훈련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녀는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여 동맹 관계에 있는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 가담하게 된다면, 문민 통제(civic control)가 불가능한 제도상의 한계로 간호사들은 선배들이 겪은 무참한 경험을 다시 겪어야 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가라시 마리코, 「백의를 다시 전장의 피로 더럽히지 않기 위해 - 종군간호사의 역사에서 집단적 자위권을 생각한다」, 『月刊保団連』 No.1183, 2015년 3월)
이가라시 마키코는 ‘안전’을 내세운 재난대비훈련 혹은 국가가 말하는 ‘안보’가 결코 자신들의 ‘안녕’과 직결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안전이 무엇인지 되물어야 할 때다. 변희수 하사의 여군 복무 또한 여군의 안전을 위협하는 사건으로 회자되었다. 과연 안전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트랜스젠더 여성의 수용을 거부한 군은 여성에게 정말 안전한가?
징집 대상이 아닌 여성들이 병역거부 선언을 한 이유
병역 의무가 없는 한국 여성들이 병역거부 선언을 한다는 것, 젠더화된 사회에서 여성들이 ‘지지자’ 혹은 ‘조력자’가 아닌 ‘당사자’로서 병역거부를 선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2004년에 터키 최초로 병역거부 선언을 한 페르다 울체시는 “지금까지의 병역거부는 의무 당사자인 남성들과 직결된 문제였으며, 그 문제를 정의 내리고 틀을 만든 것도 그들이었다”는 것을 문제 삼았다. 그녀는 군대와 병역 의무를 넘어서는 확장된 의미의 병역거부를 주장했다. 또한 여성들의 병역거부 선언은 “이러한 투쟁에 참여하는 이유를 우리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는 게 핵심”이라고 강조했다.(전쟁저항자인터내셔널 지음, 여지우/최정민 옮김, 전쟁없는세상 엮음 『병역거부: 변화를 위한 안내서』 경계, 2018)
“군대의 담장 안에만 머물지 않고 일상을 지배하는 군사적 세계”를 거부했던 그녀의 목소리는 2018년 8월 30일, 서울의 작은 책방에서 ‘숲이아’의 병역거부 선언으로 이어졌다.
“한국에서 군대는 (…) 비틀린 남성성을 재생산하는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것 같아요. 상명하복이라는 위계적 체제에 순응하도록 훈련을 하고 위계질서에 정상성을 부여하지요. 여성, 장애인, 이주민… 비남성은 비정상으로 취급받고요. 또 주민등록번호 앞자리가 1인 사람만 징병 대상자로 삼는다는 점에서 성별 이분법을 강화하는 시스템으로 작동을 해요. 성별 이분법적 주민등록시스템에 기반해서 군대가 돌아가지만, 한편으로 성별 이분법 구조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작용을 하고 있다고 봐요. (…) 네팔에 갔을 때 안나푸르나 트래킹 신청서의 성별 표기란에 ‘Third’라는 제3의 성이 적혀 있어서 놀란 적이 있어요. 몇몇 나라는 법적으로 제3의 성을 인정하기도 하죠. 하지만 한국 사회는 군대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 쉽게 제3의 성을 인정해 주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숲이아는 성별 이분법과 군대가 서로를 강화하고 유지하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일상에서 강요되는 지정 성별을 거절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그뿐 아니라 징병제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 긋기를 통해 끊임없이 1등 시민과 2등 시민 혹은 국민과 비국민을 양산하는 방식으로 이분법적 사회 위계를 견고히 해온 것까지 문제 삼았다. 숲이아의 선언에는 병역거부가 왜 자신에게 고유한 싸움인지, 자기가 겪고 있는 사회적 부조리가 군사주의의 어떤 측면들에 얽혀 있는지에 대해 ‘자신의 언어’로 설명하려는 분투가 녹아 있다.
이분법적 세계와 남성화된 사회에 익숙해진 말들을 거절하기. 편하고 쉬운 말들을 버리고 ‘다른’ 말들을 모색하겠다는 숲이아의 선언은 “어떤 존재든 자신을 사랑하고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포착”하려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여성들의 ‘동지적 관점’을 묻다
헌혈에 동원되었던 미스 재팬이 추후 노동현장에서 권력적 관계를 거부했던 힘은 일본적십자사의 간호사들이 종군을 거부하거나 군사 훈련을 거부하는 힘과 무관하지 않다. 숲이아가 일상에서 강요된 지정 성별을 거부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표현하는 언어를 확보하는 것이 확장된 병역거부 운동의 하나의 사례인 것처럼, 생활 속에 만연한 권력적 관계를 알아차리게 하는 힘은 반군사주의를 견인하는 동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페미니즘과 반군사주의의 동행이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예비역 여군 김은경 씨는 페미니즘 덕분에 여군의 위상도 높아졌다고 말한다. 사실, 성별에 의한 차별이 철폐된 세계는 여군, 변 하사, 그리고 숲이아 모두가 자기다운 모습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세계라는 점에서 공통의 지향점이다. 하지만 군대의 존립 그 자체에 대해서 이들은 상충하는 양극단의 위치에 있다. 그렇다면 병역 ‘거부’와 ‘복무’ 사이에 깊게 패인 협곡(峽谷)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는 어떤 가능성을 말해볼 수 있을까?
서로가 후일담의 청자(聽者)가 되어 준다면, 요지부동으로 서 있던 각자의 자리에선 보이지 않았을 풍경이 아주 조금은 보이게 될 것 같다. ‘듣는다’는 행위 혹은 ‘듣기’의 과정은 서로를 변형(trans)시키기 때문이다. 헤어지면서 예비역 여군들은 필자에게 함께 공부모임을 꾸려보자고 제안했다. 아직은 또렷이 보이지 않는 ‘동지적 관점’은 이렇듯 ‘서로-듣기’의 공통장(場)을 만드는 과정에서 비로소 생성되는 것 아닐까. 불확실하고 임시적인 거점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서 있는 서로를 바라봐 주는 과정 속에서.
[필자 소개] 심아정. 독립연구활동가. 동물, 여성, 폭력을 키워드로 공부와 활동을 이어가면서 동두천과 부평을 오가며 미군이 떠난 자리와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난민×현장>, <수요평화모임>, 동물권공부모임 <ALiM:>(Animal Lights Me:), 번역공동체 <잇다>를 통해 대학 바깥에서 새로운 앎과 삶을 시도하고 있다. 다큐멘터리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상영과 토론의 여정을 기록 중이다. 최근에 쓴 글로는 「어떤 ‘야생화' 돼지의 삶과 죽음-퀴어의 관점으로 침략종 레토릭을 재전유하기」 『문학3』 11호, 2020년, 「‘다른’ 이야기들의 가능성-가해자들의 말하기(김효순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 서평)」 『창작과 비평』 2020년 봄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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