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도서관』(The Library, 데이비드 스몰 그림, 사라 스튜어트 글, 1995)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엘리자베스 브라운의 책 덕질기’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엉뚱한 캐릭터, 문장의 강약과 넉살, 디테일하면서도 웃음이 나는 장면 포착!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나는 특히 말미 장면이 흥미로웠다. 책이 쌓이고 쌓여 침대도 무너지고 책장도 무너지고 현관까지 막아버리자,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가진 전부를 기부한다. 도서관을 만든다. 그리고 이어진 결론이 “엘리자베스 브라운은 친구네 집으로 이사했고, 꼬부랑 할머니가 될 때까지 친구와 오래오래 잘 살았어요.”(Elizabeth Brown Moved in with a friend And lived to a ripe old age.)다!
노년의 두 여성이 벽난로 앞에 앉아 책을 읽으며 웃고 있는 일러스트가 함께 있다. 어린이들이 주로 보는 걸로 인식되는 그림책은 전통적 가족주의를 담은 장면이 많은데, 여성과 여성이 함께 산다는 이미지를 보는 것만으로 해석이 풍부해진다. 내겐 독서광 비혼 여성의 노년 서사로 읽혔다.
최근 그래픽노블 『바늘땀』을 읽었는데, 작가가 『도서관』을 그린 데이비드 스몰(David Small)이라는 걸 알고 조금 놀랐다. 『바늘땀』(이예원 옮김. 미메시스)은 가족의 정서적 학대로 트라우마에 시달린 아이의 성장기이자 탈출기인데,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다.
가족의 학대로 상처투성이인 ‘나’
『바늘땀』의 화자인 ‘나’는 여섯 살, 늘 침묵과 전운에 휩싸인 집에서 살고 있다. 엄마는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툭하면 문짝을 후려치듯 닫고 혼자 방에 숨어서 흐느끼거나 속내를 알 수 없는 분노에 빠져있다. 의사인 아빠는 모르는 척 방관하고, 지하실로 내려가 샌드백만 때릴 뿐이다. 형은 시끄럽게 북을 두드리고 ‘나’는 자주 아프다.
열한 살 때 ‘나’는 목에 혹이 발견된다. 엄마는 걱정은커녕 병원비가 든다느니, 찬물을 끼얹었다느니 하며 ‘나’를 비난한다. 지인들은 서둘러 병원에 가라고 당부하지만 정작 엄마아빠는 자동차와 가구를 사들이느라 ‘나’의 치료를 보류한다. ‘나’는 삼 년 뒤에야 수술을 받는다. 간단한 혹 제거술이라고 했는데 깨어보니 갑상선과 성대 한쪽이 사라져 있다.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퇴원 2주 뒤 ‘나’는 우연히 엄마가 쓴 편지를 발견한다. ‘내’가 암에 걸렸었고 엄마와 아빠가 비밀로 했다는 것. 그리고 엄마는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반복되는 악몽과 밤 공포증에 시달린다. 실험실 포르말린 병에 담겨있는 태아가 뒤쫓아 오는 꿈, 동굴에 갇히는 꿈, 헤매다가 당도한 곳이 무너진 폐허인 꿈. ‘나’는 학교의 권유로 상담을 받게 되고,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직면한다. 그리고 그 즈음 엄마가 레즈비언인 걸 목격한다. 또, 그동안 차마 발설할 수 없었던 외할머니의 정신 질환이 세상 밖으로 드러난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 ‘나’는 집을 나오고 차라리 덜 외롭다. 서른 살, 엄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간다. 엄마의 임종을 마주한다.
고통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나?
기묘한 심리스릴러 같은 이 책을 보고, 호기심이 생겨 작가의 인터뷰를 뒤졌다. 작가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재현하는 것이 어려워서, 피해왔다고 했다. 엄마를 그리는 중에도 화면 속 엄마가 자신의 목소리를 빼앗을 것 같은 불안에 휩싸였고, 실제로 발작처럼 식사하는 도중에 자기 목이 어릴 적 그때처럼 부풀어 오르는 걸 경험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마음의 고통이 몸으로 드러났던 그 순간, 자신이 더 제대로 고통을 직면해야 함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이 책을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고.
작가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몇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고통을 기록하는 일이 고통의 전파가 아니라 고통과의 화해가 될 수 있을까? 그건 어떻게 가능한 걸까?
그런데 스몰은 여섯 살의 자신과 그때의 어머니를 그래픽노블 안에 그려 넣으면서, 새로운 눈이 생겼다고 했다. 여섯 살 아이에게는 어른들이 거대해 보이는 게 당연하다는 것. 동시에 엄마 역시 불행했고, 그것에 대해서는 아이인 내가 책임지거나 이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새로 보였다고.
『바늘땀』의 맨 뒤에는 작가의 부모 사진이 실려 있다. 작가는 거기에 썼다. 지난날을 돌이켜 볼 여유가 생긴 뒤 가족사를 뒤적거려 본 결과, 과묵하고 까다롭게만 보였던 엄마가 조금 다른 빛으로 보인다고. 엄마는 자신이 인지한 것 이상으로 심장과 허파가 많이 아팠다는 것, 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 어머니였다면 레즈비언으로서의 일생에 더 많은 지면이 할애됐을 거라고. <아무도 그녀의 눈물을 듣지 못했다. 심장은 세상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하염없이 흐느끼는 분수와 같다.> 에드워드 달버그의 글이 자꾸 생각난다고.
고통을 발설하는 것 자체가 치유나 예술은 아니지만, 고통이란 것이 아주 사적인 동시에 보편적이기도 해서,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 화해의 비책이기도 한 것 같다. 거기까지 가는 데는 또 얼마나 긴 여정이 될지 아직은 겁이 나지만 말이다. 그런데, 데이비드 스몰의 부단한 트라우마 극복과정이 있기 전에, 그러니까 고통와 예술의 상관관계보다 먼저 따져야 할 것은 고통의 이유와 책임에 관한 것이 아닐까?
가정폭력의 가해자, 엄마가 겪은 고통
『바늘땀』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좋아하는 어린 ‘나’는 앨리스의 금빛 머릿결을 흉내 내며 노란 두건을 쓰고 밖에 나갔다가, 동네 아이들한테 호모, 변태라고 놀림 받으면서 쫓긴다. 이해할 수 없는 시선의 폭력 속에서 어린 ‘나’는 자기만의 굴을 파고 들어갈 수밖에 없다. 마치 엄마가 자기만의 굴을 파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어쩌면 그날 엄마는 어린 아들과 단둘이 친정에 나들이 가면서 마음이 조금 말랑해진 건 아니었을까. 갑갑한 집에서 탈출한 기분이 들지 않았을까? 원치 않는 아내로서의 역할, 엄마로서의 책임감을 강요하는 집에서 빠져나온 해방감에, 그날은 평소 말하지 못하고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조금 꺼내놓았던 건 아닐까.
그 뒤, ‘나’는 할머니에게 공포감을 느낄만한 일을 겪는다. 엄마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묻다가, 내가 할머니에 대한 두려움을 말하려 하자 서둘러 입을 손으로 막는다. 불안한 듯 두려운 듯 주변을 살피고, 다시는 그런 말 하면 안 된다며 무서운 얼굴을 보인다. 엄마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외할머니의 정신 질환을.
만약 당시 사회에서 정신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 과장과 왜곡이 만연하지 않았다면 엄마는 외할머니가 치료받을 수 있게 나서지 않았을까.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의 딸로 살아가야 하는 공포, 박대 받고 고생해 온 어머니가 또 다른 손가락질을 받을 것 같은 공포. 그것이 없는 사회였다면, 엄마는 할머니가 그렇게까지 나빠지기 전에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엄마는 자신의 심장병과 성소수자라는 정체성 때문에 아버지의 집안에서 버림받고 경제적인 빈곤에 시달리며, 외할머니의 병과 불행에 시달리며 내내 불안하게 살았던 건 아닐까. ‘정상가족’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채 살아가면서 느끼는 슬픔과 괴로움이 아이를 방치하고 소비에 기대어 살게 한 것은 아닐까.
만약 그때 사회에 여성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이 금지되어 있었다면, 엄마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가꿀 수 있었을 것이다. 일자리를 구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며, 조금 다른 모습의 가족을 꾸렸을지도 모른다.
차별금지법은 이 공동체의 미래
이 작품이 확실하게 보여주는 건, 사회가 차별을 조장하면 그 고통은 대를 이어 계속된다는 점이다. 세대와 세대뿐 아니라 형제와 친구에게도 전이된다. 사회복지이론에서는 한 사람의 문제는 적어도 3대까지 영향을 끼친다고 본다.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이어져 있어서, 연결되고 영향받으며 살아간다. 그래서 인디언 세네카 족이 7대를 내다보며 살림을 하고 정책을 세웠다는 게 오히려 합리적이다.
『도서관』을 함께 만든 사라 스튜어트(Sarah Stewart)는 데이비스 스몰의 아내인데, 그 역시 어릴 적 알콜중독자 가정에서 폭력에 시달리며 자랐다. 그때 탈출구 중 하나가 도서관에 숨는 거였고, 『도서관』은 그때의 이야기가 씨앗이 되어 다른 시점에서 명랑하게 다시 쓴 이야기이다.
이 부부 작가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자신들의 고통을 스스로 간신히 헤쳐 나오고 있지만, 이들이 겪은 폭력은 개인이 죽을 것 같은 고통을 견디며 극복해야 할 문제로 두어선 안 된다.
지난달 29일,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차별금지법을 대표 발의했다. 노무현 참여정부 시절 정부 입법안부터 17대~20대에 이르기까지 국회에서 수차례 차별금지법 제정안이 발의됐지만, 평등을 원치 않는 세력의 압력으로 번번이 폐기됐다. 소수자와 약자의 삶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차별을 금지하는 법 제정을 우리 사회는 13년간이나 미뤄온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지금 당장 차별받고 있는 당사자들에게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사는 이 공동체의 미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도서관』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두 사람은 하루도 빠짐없이 도서관으로 산책을 갔고요. 좋아하는 책을 찾아서 읽고 또 읽었답니다.”(They walked to the library Day after day, And turned page... after page... after page.) 두 여성은 나무들이 뻗어있는 산책로를 나란히 걸으며 책을 읽고 있다. 그 뒤로 고양이 세 마리가 뒤따른다.
『도서관』은 『바늘땀』보다 이십여 년 전에 나온 책이니, 작가가 아직 자신의 목에 난 바늘땀 상처와 화해하기 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마지막 장면이 엄마를 의식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조금은 문화적 허영이 있는 엄마가 동성의 애인과 함께 책을 읽고 산책하며 살기를 바라는 희망은 아니었을까 하고. 누군가는 내 상상이 과하다 할지 모르나, 독자의 특권으로 나는 이런저런 공상을 해본다.
*필자 소개: 안지혜 님은 그림책 『숲으로 간 사람들』(김하나 그림, 창비, 2018)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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