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에서 사는 사람도 잘 땐 꿈을 꾼다

<주거의 재구성> ‘20대’ ‘비건’ ‘여성’의 홀로서기(2)

유비 | 기사입력 2020/07/19 [11:00]

부엌에서 사는 사람도 잘 땐 꿈을 꾼다

<주거의 재구성> ‘20대’ ‘비건’ ‘여성’의 홀로서기(2)

유비 | 입력 : 2020/07/19 [11:00]

*편집자 주: 다양한 시각으로 ‘주거’의 문제를 조명하는 <주거의 재구성> 기획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제로 웨이스트’와 유기농 먹거리

 

비건(vegan, 식물성 음식만 먹으며 동물을 희생시켜 얻은 의류나 동물실험을 거친 화장품 등도 사용하지 않음)인 나, 마지막으로 배달음식을 시켜 먹은 게 근 4년 전이다. 편의점 도시락이나 컵라면도 내 선택지엔 없다. 배달음식은 고사하고 불필요한 플라스틱 포장이 발생하는 즉석밥이나 페트병 물 같은 것조차 사 본 적이 없다.

 

물은 끓여 마시고, 밥은 유기농 현미와 귀리를 반반 섞어 일주일에 한번쯤 해서 냉장고에 넣어놓고 먹는다. 비닐백이나 랩 같은 일회용품도 아예 없어서, 거의 매일 직접 요리를 하고 열심히 설거지하며 남들이 생각하는 ‘자취하는 대학생’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다행히 요리를 좋아해 이런 삶의 건강함이 좋지만, 육식주의 사회에서 비건으로 산다는 건 분명 불편한 일이다.

 

▲ 설날,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 차린 떡국 밥상. 사람들을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며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게 참 좋다.  ©사진: 지지Jiji Pyun


비거니즘은 단순히 동물성 소비를 피하는 것뿐만 아니라 동물의 생태, 즉 환경에 대한 고민도 필수적이다. 재작년부터는 ‘제로 웨이스트’
(zero waste, 쓰레기가 발생하지 않게 하는 운동)에 집중해왔는데, 내가 죽고 나서도 나 대신 썩지 않을 쓰레기가 너무나 많고, 이 쓰레기가 곧 동물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 작년부터는 유기농, 토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현대 사회는 가장 효율성 있는, ‘가성비’ 넘치는 작물만을 마치 아프리카 대륙의 국경 긋듯 마구잡이로 심고 있다. 그 대표적 예가 GMO(유전자변형작물)인데, 생태계를 교란하는 ‘슈퍼 작물’로 생물종 다양성을 획일화한다. 게다가 이 가성비 좋은 작물들은 갈수록 더 강한 화학약품으로 범벅되어 땅을 오염시키며, 해당 작물 외엔 아무것도 살 수 없고 살아서도 안 되는 죽음의 땅을 양산한다.

 

그래서 요즘은 유기농산물을 직거래하는 사회적 협동조합인 한살림에 매주 간다. 모든 게 마트보다 1.5배 이상 비싸서 처음엔 원룸의 허름한 냉장고에 비해 너무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게다가 없는 것도 많다. 제철 국산 야채와 과일만 그때그때 나와서, 겨울에 토마토를 찾았다가 나의 무지함에 왠지 무안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불편함에도 생명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려 살아가며 함께 작물을 키워내는 장면을 그려본다.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에 대해 인식하는 순간이다. 그저 살아가기 때문에 먹는 음식이 아닌, 나를 살아가게 하는 음식에 대한 인식이다.

 

그렇게 장을 봐오고 나면 항상 초록 야채가 없어 후회한다. 한살림에 가면 항상 초록 야채를종류 별로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편애하는 버섯이나 양파, 감자 같은 것들만 들고 오게 된다. 아무리 요리를 매일 한다지만, 혼자 사는 사람에게 초록 야채는 처치 불가다. 사다가 한번 먹고 나면 냉장고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상추를 떠올리며, 먹고 싶은 음식을 해먹을지 애물단지 상추를 처리할지 매번 고민해야 한다. ‘먹고 싶은 걸 먹고 싶다. 상추를 썩히기도 싫다, 먹고 싶은 걸 먹고 싶은데.’ 결국 억지로 상추를 몇 번 더 먹게 된다. 초록 야채의 저주다.

 

가족들과 살 때는 집에 마당이 있어 온갖 상추나 케일 같은 것들이 쑥쑥 자랐다. 산 밑의 주택에서 햇빛 잘 받고 자란 초록 야채들은 필요할 때 먹을 만큼만 뜯어 먹으니 냉장고에서 죽을 날을 기다릴 일이 없었다. 내가 안 먹더라도 마당에 사는 곤충들이 뜯어먹으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 사는 집은, 뭣도 기를 엄두가 안 난다. 바로 옆의 키 큰 건물 때문에 빛이 잘 들지 않아 무엇도 고르게 자라지 않는다. 전에 키우다 데리고 온 식물마저도 스스로 죽어버렸다.

 

식물이 자라는 내 집이 필요해

 

바닷가의 낡고 작은 빈집을 구해 이곳저곳에서 버려진 가구들로 내 취향의 공간을 꾸리고 사람들을 초대하며 살고 싶단 꿈을 꾼다. 꼭 부엌과 침실이 분리될 수 있는 곳이어야만 한다. 부엌 한가운데서 잠드는 기분이 들 때가 제일 비참하니까.

 

크고 성능 좋은 냉장고도 있으면 좋겠다. 야채가 얼거나 금세 상해버리지 않도록. 더해 야채는 가능한 길러 먹고, 동네 사람들과 바꿔먹으며 살고 싶다. 그렇게 지닌 것들로 소소하게 친구, 손님들에게 내가 지은 밥을 대접하는 일상을 보내고 싶다. 집에 사람들을 초대해 맛있는 밥 해 먹이는 걸 정말 좋아하지만, 지금 집은 너무 좁아서 세 명만 들어와도 편히 앉을 수가 없다.

 

▲ 언젠가 바닷가 내 집이 생긴다면...   ©일러스트: studio 장춘


그러니 바닷가 내 집이 생긴다면, 남들을 애정으로 먹이고 재우는 일로 약간의 수익을 내고, 어느 정도 자급하며 살아가고 싶다. 전등이 떨어져도 고쳐달라고 전화할 곳은 없겠지만, 2주치 정신건강을 병원에서 조달하는 지금보다는 행복하지 않을까?

 

페미니즘 북카페 두잉, 내가 소망하던 공간 만들기

 

운 좋게도 한국에 막 돌아와 할 일 하나 없던 올겨울에 페미니즘 북카페 ‘두잉’ 2기 이사 자리를 제안받았다.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이후, 2017년에 등장한 오프라인 페미니스트 커뮤니티 카페라는 점에서 항상 관심 있게 지켜보던 곳이었다.

 

3년 만에 재방문한 두잉은 여전히 그 자리, 그 모습 그대로였다. 입구 계단 벽을 가득 채운 페미니즘 포스터와 엽서, 벽면을 가득 채운 약 1,500권의 페미니즘 도서 같은 것들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작고 가난한 나, 내 5평 마음속에 갇혀 세상에 나오지 못한 이야기를 풀어낼 곳이란 확신을 했다.

 

그날부터 약 3개월은 꼼짝 않고 두잉을 집처럼 지냈다. 페미니스트, 문학 전공자이면서 요리를 사랑하는 내게 완벽한 직장이다. 사실 그보다 내 꿈과 같은 삶의 터전이다. 바닷가의 집도 아니고, 제대로 요리를 할 만한 부엌을 갖춘 것은 아니어도,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찾아온다는 점에서. 겨울에는 따뜻한 차, 여름에는 시원한 에이드를 내어줄 수 있고, 매주 새로운 디저트를 만들어 따뜻할 때 맛보시라며 대접할 수도 있고, 책과 그 안팎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곳이라서. 

 

▲ 내가 인테리어 리뉴얼을 진행한 페미니즘 북카페 ‘두잉’ 내부 모습.     ©사진: 리아Lea Han

 

취임하기 한 달 반 전부터 주방과 카페 인테리어 리뉴얼을 전담해 내내, 심지어 꿈에서도 바빴다. 요즘 카페 여는 사람은 많다지만, 두잉은 그와 같은 길을 걷는 게 하나도 없었다. 카페 재료 하나도, 그저 값싼 카페 재료 사이트에서 마구 담아 결제하는 게 아니라 ‘남을 죽이지 않은 재료, 남의 집을 훼손하지 않는 생태적 농업, 누군가의 존엄에 보탬이 되는 소비’를 기본으로 했다.

 

비건인지 아닌지, 유기농 혹은 무농약, 친환경, 윤리적 재배인지 아닌지, non-gmo, 공정무역인지 아닌지 다 따져가며 구매했다. 특히 과일이나 커피 같은 경우 대부분 친환경, 유기 농사를 짓는 여성농민의 밭에서 온다. 여성농민의 노동은 전통적으로 남성의 보조 이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여성농민 당사자들과의 공정한 거래는 더욱 중요하다.

 

가구를 살 때도, 유행 따라 찍어내고 버려지는 가구가 넘쳐나는 시대에 새 걸 사는 건 큰 환경적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역 기반 중고거래 앱인 ‘당근마켓’을 몇 달 동안 뚫어져라 들여다 보며, 있던 가구를 팔고 새 가구를 들여오는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가구마다 들여오기까지의 눈물 나는 이야기와 정이 엮여 있다

 

게다가 페인트 하나도 그냥 고르지 않아 친환경 페인트보다 3-4배 가량 비싼 순식물성 ‘천연’페인트를 사용했다. 소위 ‘친환경’ 페인트는 정말로 친환경이라기보단 화학제품의 인체와 환경에 미치는 유해도가 기준치 이하로 낮은 것뿐이라고 한다. 돈은 없는데(나도 가난한데 내 직장은 더 가난하다) 페인트는 비쌌으니 두잉의 모든 노동자들이 카페에 나와서 다음날 못 일어날 때까지 벽만 칠했다는 슬픈 전설이 전해진다.

 

개편과정과 그 이후 운영 전반에서 수없이 회의하고 노동하며 두잉을 내가 정말로 소망하던 공간으로 실현시켰다. 그리고 우리가 꿈꾸던 공간으로 빚어 나갔다. 우리에게 안전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공간. 그리고 모두가 사랑할 공간. 여전히 두잉은 많이 부족하고 누군가의 빈 마음을 채워주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지나온 3년보다 더 긴 미래가 있을 것이기에.

 

▲ 직접 큐레이션한 책이 늘어선 ‘두잉’ 내부 한 부분.  ©사진: 리아Lea Han


여전히 부엌에 살지만 나의 꿈은 현재진행형

 

어떻게 해도 나의 것이 아니었던 가족의 집을 나올 때, 내가 원했던 공간은 그저 집 밖의 세계였다. 세계를 떠돌면서 내게 필요했던 건 가방을 싸고 풀지 않아도 되는, 매일 숙소비를 정산하지 않는 내 공간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나를 돌보고 누군가를 보듬는 공간을 꿈꾼다.

 

스스로가 내 공간과 그 안의 나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되길 바라고, 사랑하는 내 공간의 따스함이 남에게도 와 닿길 소망한다. 그래서 덜컥 두잉 일을 하겠다고 해버린 걸지도 모른다. 두잉이 내 공간을 확장시키리란 기대, 더 많은 우리들에게 안전한 만남과 편안한 소파 혹은 존재 자체로 용기를 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서.

 

하지만 여전히 바닷가 집의 꿈은 채워지지 않았다. 두잉이 내 공간에 대한 갈증을 채워준다 해도 여전히 나는 5평 이하의 부엌에서 자고 일어나 요리를 해서 이러니저러니 먹고 산다. 얼마 안 남은 이 집에서의 단기 계약이 끝나고 나면 어디로 갈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제발 부엌과 침실이 분리되는 곳에서 살고 싶다. 창문이 크고 직사광선이 잘 들어 식물이 고르게 클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아마 안 될 거다. 햇빛보다 비타민 보충제의 가성비가 훨씬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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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응원 2020/07/23 [10:30] 수정 | 삭제
  • 멋져요 내집 인테리어도 잘 하실듯 바닷가집에서요!
  • 휴이 2020/07/19 [21:51] 수정 | 삭제
  • 제로 웨이스트... 존경스럽다 매일 나오는 비닐 플라스틱류에 스스로 질립니다
  • popcorn 2020/07/19 [18:55] 수정 | 삭제
  • 우와, 생각은 해봐도 정작 이사하거나 사무실 꾸밀 때가 되면 시간과 예산 문제 때문에 재활용/친환경으로 공간 꾸미기 쉽지 않던데. 리뉴얼된 두잉에 한번 놀러가고 싶네요.
  • ㅈㅇ 2020/07/19 [18:50] 수정 | 삭제
  • 눈물... 다들 행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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