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몸, 다른 춤을 재현하는 퀴어 댄서들

<청년 페미니스트 예술인의 서사> 퀴어댄스팀 큐캔디

빼갈 | 기사입력 2020/08/04 [10:10]

다른 몸, 다른 춤을 재현하는 퀴어 댄서들

<청년 페미니스트 예술인의 서사> 퀴어댄스팀 큐캔디

빼갈 | 입력 : 2020/08/04 [10:10]

※ ‘따로 또 함께’ 창작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는 페미니스트 예술가들의 새로운 서사를 기록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10만 관중 앞에 선 큐캔디는 누구인가?

 

‘큐캔디’는 2013년부터 매년 서울퀴어문화축제 무대에서 공연해 온 퀴어댄스팀이다. 이전에는 여성퀴어댄스팀 큐캔디라고 소개했다면, 2017년 고민 끝에 퀴어댄스팀 큐캔디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이제는 다양한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가진 퀴어들이 모여 춤추며 저항하는 퀴어댄스팀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 2018년 서울퀴어문화축제 무대에 선 큐캔디의 뒷모습.  ©사진: 정운


춤을 추며 10만 명의 관중 앞에 서야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신의 몸과 움직임에 대해, 그리고 어떻게 관객 앞에서 내 몸이 재현되고 싶은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무대를 보는 이들은 큐캔디들이 모두 흥이 많고 날 때부터 춤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춤에 대한 멤버들은 역사는 같지 않다.

 

날 때부터 춤꾼이라 6살 때 박남정 춤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7살에 문워크를 했던 멤버가 있는 한편, 29살에 처음으로 춤을 배우고 춰본 멤버도 있다.

 

춤을 추기 시작했던 시기도 다르고, 노래가 나왔을 때 신이 나서 춤을 추는지 아닌지도 서로 다르다. 다만 대체로 내향적인 인간들이라는 점은 신기한 지점이다.

 

몸도, 정체성도, 춤의 역사도 가지각색

 

첫 춤에 대한 기억이 다르듯, 우리의 정체성도 같지 않다.

 

‘류’는 여성으로든 남성으로든 규정되고 싶지 않은 논바이너리(non-binary) 젠더퀴어(gender-queer)이다. 그런데, 긴 머리의 류에게 사람들은 가끔 이렇게 질문한다.

 

“내가 보기엔 너는 여잔데 왜 자꾸 여자가 아니라고 해?”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류는 자신에 대한 감각을 너무 쉽게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힘이 빠진다. 류가 자신의 성별 정체성을 고민하는 과정 안에는 스테레오타입을 부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머리가 모두 긴 집단 속에서는 머리를 자르고 싶었고, 머리가 모두 짧은 집단 속에서는 머리를 기르고 싶었다. 그러한 행위를 통해 류는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나는 규정되고 싶지 않아.”

 

반면 ‘루시아’는 여성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든 남성성이라고 불리는 것이든, 여러 가지 성별 특성들을 탐험하고 싶어 한다. 루시아는 자신의 무대 위 모습이 부치(butch)로 읽히든, 펨(femme)으로 읽히든 그것이 “재밌다.”

 

▲ 2018년 서울퀴어문화축제 무대 위 큐캔디의 모습.   ©사진: 정운


‘이안’은 여성이지만 여성이지만은 않다. 이안은 이렇게 말한다.

 

“여성으로 경험했던 것과 내 스스로에 대한 감각은 좀 다른 것 같아. 단순히 여성으로만 설명하긴 어려운 거지. 또 남자라고 하기에는… 거기까지는 또 아니고. 근데 이렇게 몸에 대해서 굳이 이분법으로 가를 필요가 있나?”

 

이안은 때로는 아저씨의 모습을, 때로는 소년의 모습을 함께 안고 산다. 원래부터 납작해서 조금만 운동을 하면 남자 가슴처럼 보이는 자신의 가슴도 좋다. 요즘 살이 쪄서 조금 더 여자 가슴처럼 보이는 게 싫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이안은 꼭 ‘여성’이지만은 않다.

 

반면, 레즈비언으로 정체화하는 멤버들도 있다.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여성을 사랑하는. 이들도 무대 위에서 재현되는 자신의 몸에 대해서 다양한 고민을 갖고 있다.

 

이처럼 큐캔디는 ‘여성’으로 규정되지 않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퀴어들의 모임이다.

 

퀴어댄스팀은 어떤 춤을 보여줄까?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규정하지 않더라도, 살면서 ‘여성’으로서 경험하고 고민한 것은 각 멤버들의 삶의 역사 속에 남아있다.

 

‘여성’으로 태어나서 자라는 과정 동안 자신의 몸을 완전하게 긍정하는 경험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페미니스트로서 스스로를 정체화하지만 아직도 옆구리 살을 내보이며 크롭티를 입을 정도의 용기는 내지 못했고, 겨드랑이 제모를 하지 않은 채 나시를 입고 무대에 서보지도 못했다. 때로는 이전과 달리 살쪄버린 뱃살을 보기 싫을 때고 있고, 다른 이들 앞에서 가슴을 강조하는 옷을 입거나 그런 춤을 추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류는 “한계 없이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기도 하고, 모든 것을 숨기고 싶기도 하다. 사회가 규정하는 아름다운 몸이라는 기준에서 벗어나고 싶지만 나라는 존재, 내 몸이 가진 역사가 사회와 분리되어 진공에 존재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한편 이것은 ‘성별 이분법’ 속에 갇히지 않는 방식의 무대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고민이기도 하다. 확연하게 구분되는 보이그룹, 걸그룹의 춤을 우리가 춘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 어디에 중점을 두고 표현해야 원본에 갇히지 않을지 고민한다. 특히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오히려 성별 이분법을 강화하며 성소수자를 차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2020년, 우리는 ‘성별’이라는 범주에 대해 다시 질문하는 춤을 추고자 한다.

 

예를 들어, ‘양말’은 젠더 규범을 넘나드는 몸의 ‘선’에 대해서 고민한다. 블랙핑크의 “뚜두뚜두(DDU-DU DDU-DU)”에 맞춰 춤을 추더라도 큐캔디가 고민하고 재현하는 춤은 원본과는 다르게 퀴어하다. 걸그룹이 재현하는 몸의 선을 그대로 모방하기보다는 더 파워풀한 선으로 춤을 표현해보는 것을 실험한다.

 

▲ 큐캔디, 뚜두뚜두(DDU-DU DDU-DU) 단독 공연.   ©사진: 정운


성별 이분법에 갇히지 않는 춤을 추겠다는 고민은 재미있는 실험으로도 이어진다. 대부분의 멤버가 겉으로 보기에 부치로 보이는 그룹에서, 1980년대 뉴욕의 퀴어들이 추던 과장된 여성성을 보여주는 ‘보깅’(voguing)의 ‘펨퀸’(femme queen)이라는 장르에 도전하는 것 또한 하나의 실험이다.

 

“다른 방식의 춤이 뭘까”라는 질문은 우리가 추구하는 춤 자체에 대한 화두로 넘어가기도 한다.

 

루시아는 최근 “다양한 육체가 단일한 춤의 완성도를 향해 달려가는 방식의 KPOP 춤”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연극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는 KPOP의 장점이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의 한계까지 밀어붙여야 하는 KPOP 춤의 방식을 넘어서는 다양한 육체를 긍정하는 방식의 춤은 무엇일지를 탐색해보고 싶다고 한다.

 

페미니스트 정체성이 춤의 동력

 

무대 위에서 어떤 방식으로 몸을 재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페미니스트로서의 멤버들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각자가 페미니즘을 접하게 된 시기와 계기는 역시 다르다. 누군가는 2001년 호주제가 폐지되던 때부터 함께했으며, 누군가는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 시기부터 페미니즘 운동을 접했다. 그럼에도 ‘여성’으로 자라면서 겪었던 성폭력과 성차별의 경험과 개인의 역사는 팀 내에서 다양하게 교차하며 만난다.

 

직업이 엔지니어인 멤버는 종종 거래처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을 때, 이런 말을 듣는다. “엔지니어 좀 바꿔주세요.” 소위 ‘여성’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엔지니어가 아닐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대학원생인 멤버는 석사 과정 때 ‘여자’라는 이유로 교수가 필드에 나가지 못하게 했다. 이처럼 가부장적 직장에서 벗어나 춤을 추러 오는 것은 때로는 그 자체로도 해방감을 준다.

 

▲ 2018년 광화문 앞 ‘낙태죄 폐지’를 요구하는 퍼레이드 행사에서 무대에 선 큐캔디의 모습.   ©촬영: 나윤


춤은 ‘여성’으로 자라면서 좁은 상자 안에 가둬뒀던 몸을 좀 더 활짝 펼쳐보게 한 계기였다. 춤이 아니었다면 도전하지 않았을 크고 빠르고 힘찬 움직임들은 우리의 몸을 이전과 사뭇 다르게 감각하도록 이끌었다.

 

폭력의 경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고민은 ‘어떤 춤을 출 것인가’와도 연결된다. 소위 “딸딸딸” 집안의 셋째딸로 태어나 ‘아들이 아니라서’ 어른들에 의해 차별을 겪어왔던 ‘리카’는 어릴 적 폭력의 경험을 보듬을 수 있는 ‘나를 돌볼 수 있는 춤’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멤버들이 각자 겪어왔던 성폭력의 경험은 “어떻게 하면 서로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라는 화두를 던지기도 한다. Sia의 “The Greatest”라는 노래는 퀴어들을 위한 노래이기도 하지만, 공연하는 무대에 따라서는 여성들을 향한 위로와 연대의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서로에게 노래가 되어 Queer can dance

 

큐캔디는 특히 선곡에 공을 많이 들인다. 노래를 만들거나 부른 아티스트가 혹시 성폭력 가해자는 아닌지, 가사에 성차별적인 내용은 없는지, 너무 성애 중심적이어서 무성애자들을 배제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건 무대를 보는 사람들에게 어떤 무대를 선사하고 싶은지를 고민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서 수없이 반복해서 그 노래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들을 때마다 내가 괴로운 노래를 선정한다면, 준비하는 과정도 얼마나 괴롭겠는가.

 

▲ 큐캔디, 카드(KARD)의 “Dumb Litty” 커버댄스 중에서.   ©유튜브 '퀴서비스'


이것은 이미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춤을 커버할 때 동작을 점검하는 과정에서도 수반되는 고민이다. 최근 카드(KARD)의 “Dumb Litty”라는 곡을 커버할 때, 뮤직비디오에는 여성 댄서가 엉덩이를 돌리면 남성 댄스가 그것을 조종하는 춤이 있었는데, 큐캔디의 커버 과정에서는 이를 완전히 다른 춤으로 바꿨다. 여성의 육체를 남성의 시선으로 대상화하는 춤을 다르게 바꾸어 추는 것은, 대중 미디어-컨텐츠 속에서 여성의 육체를 재현하는 방식을 바꿔내려는 실천이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히 모든 성애적인 코드를 지워버리는 것이 큐캔디의 목표는 아니다. 퀴어로서의 다채로운 섹시함을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무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 퀴어댄스팀 큐캔디의 또 하나의 화두다.

 

다른 듯 닮은 9명의 멤버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라면, 함께 무대에 서서 누군가에게 환희와 위안을 건넬 수 있는 귀한 경험을 함께했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높은 단 위의 무대에서 수많은 관중을 처음 마주했을 때의 어지러움, 희열. 그때 본 파란 하늘은 마치 여름밤의 냄새가 주는 떨림처럼 각 멤버들에게 남아있다.

 

그리고 특히나, 존재 자체가 거부당한다고 느끼는 경험들이 켜켜이 쌓여도 열심히 버텨내고 있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싶다는 것. 다른 듯 닮은 이들이 젠더를 가로지르는 선을 넘나들면 춤을 추는 것. 그것이 바로 Queer can dance, 큐캔디다.

  • 도배방지 이미지

  • 2020/08/06 [13:11] 수정 | 삭제
  • 공연 언제하나요? 꼭 한번쯤 직접 보고싶다
  • ㅇㅇ 2020/08/06 [12:29] 수정 | 삭제
  • 몸에 대해 탐구하고 춤에 대해 연구하는 큐캔디 멤버들의 노력이 느껴지네요. 응원합니다!
  • 민트 2020/08/04 [20:39] 수정 | 삭제
  • 무대를 만들어오신 과정이 담긴 소중한 글을 읽으면서 더욱 감사하고 힘이 났어요! 큐캔디의 자유로운 춤과 함께 세상이 넓어지고 흥이 났었어요..! 내 눈에 비춰진 세상도 나자신도 분명 모두 다양한 색깔의 무지개인데, 흑백의 이분법에 끼워맞추라거나 또는 이분법만 정답이라며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판단하려하고 존재를 지우는 편견들이 가끔은 너무 커보였는데.. 그렇지 않다는것을, 나답게 살아갈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세상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말할 수 있게 되었어요..!
  • 감동 2020/08/04 [14:24] 수정 | 삭제
  • 큐캔디 머쪄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