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에서 원룸으로, 거실이 있는 투룸에서 공동체로

<주거의 재구성> 공덕동하우스 이야기(1)

홍혜은 | 기사입력 2020/08/08 [12:30]

기숙사에서 원룸으로, 거실이 있는 투룸에서 공동체로

<주거의 재구성> 공덕동하우스 이야기(1)

홍혜은 | 입력 : 2020/08/08 [12:30]

*편집자 주: 다양한 시각으로 ‘주거’의 문제를 조명하는 <주거의 재구성> 기획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얼마 전 라디오 광고 카피를 쓰고 녹음했다. ‘결혼’을 경유하지 않고도 만드는 다양하고 평등한 공동체에 대해 국민(사실 그게 정확히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인식을 개선하기 위한 광고였다. 내 소개로 “비혼을 지향하는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넣고 싶었는데, 그 안은 ‘대중적 말하기 전략’에 맞지 않다며 반려됐다. 대신 ‘비혼’이라도 살리는 방안을 찾자며 제안 받은 게, 한국 사회에서 사람을 소개할 때 흔히 그렇게 하듯 소속 단체 이름, 직함, 이름 순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비혼지향 생활공동체 공덕동하우스 대표”라고 말이다.

 

사실은, 이 호칭으론 명함 한 장 없다. 삼 년째 내가 쓰는 명함엔 작가, 기획자라고 적혀 있다. 나를 더 잘 소개하고 싶어서 뒤편에 ‘관심사’란을 만들었는데, 그 중 하나로 ‘시민결합’을 적어 두긴 했다. 그렇지만 혹시나 단체+직위 네이밍이 없으면 구색을 맞추기 힘든 곳에서 부를 때에 쓰려고 구성원들의 인준을 받아 직함을 만들어 두었던 것이었다.

 

▲ 지금 내가 사는 공간. 친구에게 선물 받은 달력과 프라하 여행 기념 그림이 붙어 있는 냉장고.  ©홍혜은


비혼 생활공동체 대표라니, 그래서 하는 일이 뭐지?

 

가끔 어딘가에서 이 직함으로 나를 소개 할라치면, 이런 상상이 될 때도 있다. 배경은 18세기경 유럽, 오스트리아 정도서 열린 음악회에 잘 차려 입은 귀족들 틈에 끼어서, 나는 원래는 길거리 고양이 같은 것인데 같이 가발을 뒤집어 쓰고 근엄한 표정을 하는 상상에 근질근질하고 웃음이 날 것 같다.

 

떠오르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대안가족인가? 활동단체인가? 가족의 대표라고 한다면, 나는 가장인가? 세대주인가? 생계부양자인가? 만약 공덕동하우스가 활동단체라면, 나는 활동하는 사람들이랑 24시간 같이 살고 노는 사람인가? 즉, 내 삶의 전부가 곧 활동인가? 페미니즘은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어서 그래도 괜찮나? 활동은 무엇인가? 세미나? 캠페인? 인터뷰? 저술과 강연? 각종 정책 자문에 참여하는 것? 점거 같은 걸 해야 하나? 그런데 어디를 점거하지?

 

비혼 생활이 활동 의제니까 먹고 자고 노는 모든 게 활동인가? 활동가는 무엇인가? 활동으로 돈을 버는 사람? 활동으로 총 수입의 몇 프로나 벌면 되나? 잠 자고 밥 먹는 것도 ‘생활공동체 활동’이라면 내 활동은 시급 얼마짜린가?

 

내 앞에 앉아 내 말을 듣고 있는 이 사람들은 나의 의문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몹시 궁금해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까지 아무도 대놓고 안 물어 봤다. 물어 봐야 ‘혹시 상근하시냐’ 하는 정도(답은 “그럴 리가요”). 공동체로 사는 사람의 주거에 대한 글을 쓰는 지금, 나는 무엇으로서 이 글을 쓰는가?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그 카피에서, 나는 “비혼지향 생활공동체로 살고 있는” 정도의 소개를 쓰기로 했다. 비혼을 의제로 운동한다는 것, 나의 지향과 삶의 방식을 일치시키려 하며 살아간단 것은 곧 이런 미주알고주알 같은 지점들을 매 순간 고민해 나가는 과정이다.

 

평균의 기대, 주어진 설명틀 밖에서 매번 확신 없이 자기 소개하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면 누구나 기대하는 그 방식으로 가족 안에서 나를 소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내입니다. 며느리입니다. 엄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정치적인 것으로 읽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을 경유하지 않고 친밀과 돌봄을 실천해 보겠다는 시도는 사회적으로 이렇게까지 야심 찬 것으로 읽힌다(최근엔 수박 먹고 드러누워서 문득 ‘이건 지나친 관심 아닌가?’ 생각했다). 한겨레, EBS, 여성조선(무려!)∙∙∙.우리를 궁금해 하며 구경하고 싶어 했던 언론만 해도 수십 군데다.

 

▲ EBS 다큐 시선 “누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중에서 화면 캡처.  ©출처: EBS


먼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이 비혼공동체는 판을 까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으로 기획되어 시작된 일종의 프로젝트 성격도 있지만, 흔히들 상상하고 질문해 오는 것처럼 0에서 출발해 비혼이라는 깃발을 걸고 사람을 모집하고, 건물을 구하고, 같이 살 사람과 살지 않을 사람을 정하는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나의 공동체는 당시의 나를 둘러 싼 한계, 역사, 익숙했던 것들의 차용, 그때의 내가 태어나서 처음 겪은 좋은 것을 주변과 사회와 나누고 싶은 마음, 이런 것들 위에 만들어졌고, 만들어져 가고 있다.

 

해서, 공동체로 살아가는 사람의 주거권에 대해 쓴다고 해서 내가 곧 정치적 비혼주의자 모두에게 그대로 따라 하면 되는 근사한 정답을 제시하고, 제도적으로 결혼의 위기를 처리할 완벽한 제안을 해내는 것이라 여겨지며 읽히는 글을 쓰고 싶지는 않다.

 

나는 혼인 혈연을 경유하지 않고도 함께 사는 데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식으로 사는 건 페미니즘적 관계 맺기, 평등, 소통, 돌봄, 친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도 그렇다고 하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구성해 나가는 과정에 있는 1인으로서 이 글을 쓴다. 공동체적 실천 과정 안에서 겪어야 했던 나의 곤란과,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공간을 둘러싼 제도와 정책의 구멍에 관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

 

공간이 생기니,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이십 대 중반 내 명의로 된 원룸을 처음 얻었을 때를 떠올리면, 그때 내가 원룸에 살게 되어 좋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이런 것이다. 당시 애인에게 뭘 만들어 선물하는 걸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조리 공간이 없어서 발렌타인데이 초콜릿을 아르바이트 하던 가게 주방에서 만들었다. 나는 기숙사에 살았기 때문에 주방도, 가스레인지도 없었다. 일터 주방에서 초콜릿을 만드는 건 아무리 사장과 친분이 있더라도 편한 일은 아니었다. 이제 더는 그런 고생을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니, 몹시 기뻤다.

 

조리 시설 없는 주거 공간에 살던 당시 내가 너무 하고 싶었던 것이 애인을 위한 초콜릿을 만들고 스테이크, 찜닭을 요리하는 일이었던 건(가스렌지에 이어 밥솥이 생기자 실제로 만들었다), 당시 내가 가장 우선으로 긴밀하게 여기던 관계가 애인이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공간이라곤 한 호실의 사분의 일 공간, 침대 하나, 책상 하나, 한 칸짜리 옷장 하나 갖고 살던 내가 관계망을 만드는 데 들일 수 있는 에너지의 양이 그 정도였다는 의미다.

 

공교롭게도 원룸에 살던 시기부터 애인이 아닌 몇몇 친구들과의 관계도 조금은 더 좋아졌는데, 기숙사 통금에 걸려 잘 곳을 찾아 식객으로 남의 공간을 떠돌 때와 작지만 내 공간을 갖고 공간의 주인으로서 친구를 손님으로 대접할 수 있을 때, 감각은 달랐다. 후자의 관계에서 나는 상대에게 훨씬 좋은 사람일 수 있었다. 이후 갈 데가 없는 동생을 내 소중한 원룸에 들여야 하는 상황이 되자, 나는 책임감과 보살핌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충실히 다자녀 가정 출신 장녀 역할을 수행하기로 했다. 병원으로 실습 나가는 동생을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 보온 도시락을 싸기도 하고, 논쟁 중에 맘에 안 들면 소리를 질러 의견을 관철했단 얘기다.

 

▲ 공간이 생기니,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일러스트: studio 장춘


더 넓은 관계망에 접속할 기회를 가진 것은 거실이 있는 집에 살게 된 후다. 원룸살이 끝물 즈음은 마침 메갈리아의 부흥기였다. 나는 12살 무렵부터 다져진 온라인 친화적 기질을 살려 사이트 메갈리아보다 한 달 빨리 사회적관계망 서비스를 통해 넷페미니스트들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만들었던 터라, 빅뱅같은 관계망의 생성과 팽창을 겪던 시기였다. 200명, 500명, 1000명, 초고속으로 팽창하던 젊은 넷페미니스트 관계망은 당연하게도 초고속으로 조각나서 작은 우주들로 나뉘었는데, 그 중 하나의 우주에 내가 위치하게 되었던 시절 마침 거실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가게 됐다.

 

그 집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놀러 왔다. 그 집을 이사 이틀 만에 열일곱 명이 거쳐갔는데, 술 먹고 근처를 지나가던 친구가 모르는 사람들을 우르르 데리고 오면 많은 사람이 둘러 앉을 상이 변변히 없어 종이박스 위에 잔을 올려 놓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재밌었다.

 

그래서 정식으로 집들이도 해 보기로 했는데, 되는 대로 초대해 보니 그 집은 냉장고 앞, 전자피아노 아래, 책상 아래까지 구석구석 사람이 들어가 잠을 청할 경우 열 명도 잘 수 있는 집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그 후로 그 집의 최대 수용 인원은 10인으로 정해졌고, 그 정도 규모의 관계망이 생겨났다. 그게 공덕동하우스다. 공덕동하우스는 공간이 생겨나니 거기서의 교류를 통해 자연발생한 공동체에 가까운데, 이름도 그 당시 놀러 오던 친구들이 별명으로 붙여 준 이름이다.

 

공덕동하우스는 주거공동체인가? 거점을 중심으로 생긴 관계망에 붙인 이름인데, 그 중 거점이 주거공간인 사람들도 있었다고 설명할 수 있다. 누가 살고 있었나? 우선은 원룸살이 중 갑자기 나타나 얹혀 살던 한 동생이 취직을 해 돈을 벌자 적금을 모았고, 보증금의 대부분을 지불한 세대주가 됐다. 나는 가장에서 세대원이 되어 상황은 역전이었다. 그리고 원룸 살 때부터 드나들어서 동생과 안면을 많이 익히게 된 식객 애인도 있었다.

 

마지막에 얹힌 게 지방에서 올라온 동생의 동생인데, 이 결정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세대주가 했다. 내 쪽은, 내가 고생고생 애지중지 만든 (돌이켜 보면 착각이다. 나를 경유해서 만들어진 거지, ‘내가 만든’ 게 아닌데) 페미니스트 생태계에 이질적인 존재가 들어 온다고 느끼고 위험 감지 레이더를 켜고 경계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동생은 마치 내가 원룸에 본인을 들인 것처럼, 본인의 동생 역시 본인의 주거 공간에 거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공덕동하우스 독서모임 여성의날 특집 <빵과 장미> 상영회  ©홍혜은


공덕동은 공간 크기 자체로 따지면 원룸보다는 세 배 정도 넓어졌고, 해와 바람이 잘 들었다. 가벽 개조로 방을 만들어 곰팡이가 피던 전 집에 비할 바가 아닌 환경이었다. 하지만 사는 사람, 드나드는 사람이 늘어서 모두가 지내기에 충분한 크기의 공간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곳은 그때의 나와 내 동생, 둘의 최선과 운을 통해 얻은 곳이었고, 우리는 적당히 불만족하고, 많이 만족했다.

 

모든 필요를 채울 수는 없어 우선순위를 두고 공간을 구획해서 썼다. 예를 들면 사적 공간으로 여겨지는 침실을 가장 큰 방으로 하자는 동생과,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최대한 넓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내가 팽팽하게 맞섰는데, 그때 나는 환대에 대해 고민하자고 말했다. 그 소통과정이 충분히 민주적이고 평등했는가? 그것은 지금까지 이어지는 고민이지만, 그때의 그 결정, 환대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해 공간의 가장 넓은 부분을 커뮤니티 공간으로 만든 건 지금 나를 둘러 싼 이 공동체가 생겨날 수 있는 토양이었다.

 

내 입장에서 보면 이 관계망은 자매, 애인, 친구, 남매가 뒤죽박죽 섞여 있는 공동체였고 나는 그 비균질한 관계망에서 지내는 게 이전에 애인들과 아주 좁은 관계로 지내며 쉽게 상처 주고 상처 받고 자존감이 닳아 없어지던 것보다 마음에 들었다. 결혼을 해서 이 균형을 고의로 깨고 싶지 않았고, 이대로 잘 지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사는 게 나쁘지 않고, 심지어 좋다고 얘기하다가, 운동 의제로서 비혼 키워드를 다루는 자리에까지 섭외 받았다. 당시 자주 드나들던 친구들을 중심으로 급히 총회를 열어(온라인 커뮤니티 운영하던 가락이다) 활동 멤버를 정하고 정식 이름을 붙였다.

 

▲ 멀리서 바라본 공덕동하우스의 불빛  ©홍혜은


누구나 ‘나만의 공동체’를 탐색할 기회가 있어야 한다

 

여기까지 내용은 크게 두 갈래로 요약될 수 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잘 꾸며진 집(예를 들면 부모집)이 있어서 방(원룸, 기숙사, 고시원)을 임시로 여기며 그럭저럭 건강히 살 수 있는 인간, 집이 없는데 방에 살아야만 하는 인간이다. 후자는 내가 그랬듯 공동체적 경험 기회를 박탈당하고, 좁은 관계에 몰입해 살 가능성이 높다. 그 사람이 여성이라면, 연애가 인생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사회 정책 기준은 후자의 상황에 맞춰 만들어지는 게 평등이다. 논해야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누군가가 꼭 방에 살아야 한다면, 그 방은 최소한 무엇을 갖추어야 할까? 그것 외에도 시민의 삶을 보장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어떤 공적 공간을 지원해야 할까? 작업실? 세미나룸? 공원? 운동 공간? 그 공간들은 어떻게 생겨야 하고, 어떻게 운영돼야 할까?

 

다음으로는, 인간은 남을 불러들일 수 있는 공간의 주체일 때나 환대의 마음이 생겨난다. 어떤 환대들이 쌓인 결과 예기치 못한 형태로 공동체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게 이전의 관계보다 마음에 들면 지속가능성을 고민하게 될 수도 있다. 주거공동체라는 게, 어느 날 갑자기 공동체를 해야겠다는 계시가 내려와 ‘대안가족’을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주거 공간을 찾아다니는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소수자일수록 평생의 모든 것이 ‘정상사회’의 기준, 요구에 의해 좌지우지될 가능성이 높은 혼인공동체로 다이빙해 버리면 삶이 힘들어진다. 그러므로 ‘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탐색과 모험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권리로 보장돼야 한다. 주방과 거실이 있는 집에 살 권리, 적절한 공공 공간이 동시에 보장된 사회를 만드는 방식으로. 주거권을 보장한다는 것은 통념처럼 단지 곰팡이가 없는 집, 단열이 잘 되는 집, 해가 드는 집을 주는 것이 아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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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휴먼링커 2020/08/27 [12:59] 수정 | 삭제
  • 저는 인천검단에서 공덕동하우스와 비슷한 3549 싱글 주거공동체를 만들어 살고 있습니다. 이런 유사한 컨셉의 공동체들이 서로 네트워크로 연결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혹시 관심있는 분들이 계시다면 네트워크 연결망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저의 블로그를 남기니 관심있는 분은 편하게 연락주세요. https://blog.naver.com/matew/222065003491
  • ㅇㅇ 2020/08/10 [17:38] 수정 | 삭제
  • 집 옮겨다니다 보면 처음에는 몰랐던 방구하기 노하우가 하나씩 쌓이더군요. 아픈 경험들도 그만큼 늘구... 미리 좀일려주면 안되나 싶은... 나만의 공동체를 탐색할 권리라니 마치 유토피아 같아요. 그러면 정말 좋겠다!
  • 비누 2020/08/08 [16:25] 수정 | 삭제
  • 글 너무 재밌네요. 저도 집이라고 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생기니 사람들과 관계망이 넓어지는 경험을 했어요. 원룸에서는 좀 곤란한 일이었죠. 친구 한 명만 와도 답답해지는 공간이라서... 주거에 대한 얘기에 공감하면서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