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됨과 작가됨은 양립할 수 있을까

세계적인 페미니스트 작가 16인의 에세이 『분노와 애정』

도라 | 기사입력 2020/08/11 [16:40]

엄마됨과 작가됨은 양립할 수 있을까

세계적인 페미니스트 작가 16인의 에세이 『분노와 애정』

도라 | 입력 : 2020/08/11 [16:40]

『분노와 애정』은 캐나다 사진작가 모이라 데이비(1958~현재)가 첫 아이를 출산한 후, 개인적인 동기 부여를 위해 찾아 읽은 16인의 여성·작가·페미니스트·엄마(1인 제외)들의 에세이를 엮은 책이다.

 

여성들의 몸, 그중에서 특히 ‘엄마됨’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 정체성으로 이들이 마주해야 했던 세상에 대한 서사이기도 하다. 영국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도리스 레싱에서부터 미국을 대표하는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시인이자 레즈비언 페미니스트 운동가 에이드리언 리치, 판타지 문학의 거장 어슐러 르 귄 등이 등장하여 서로를 인용하고, 수용 또는 비판하면서 그물처럼 엮이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열여섯 명의 여성 작가들은 분노와 애정이라는 배타적 감정, 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한 몸과 한 생애에서 화해시킬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탐색한다. 독자들은 이들의 글쓰기가 다른 여성들의 목소리와 함께 역사의 어떤 변곡점을 만들어왔는지도 엿볼 수 있다.

 

▲ 『분노와 애정』 모이라 데이비 엮음, 김하현 옮김, 시대의 창, 2019


수전 그리핀(1943~현재): 페미니즘과 엄마됨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훼손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를 기억한다. 나는 불쾌하지 않았다. 그 평화롭고, 주름 없는, 젊은 마돈나의 얼굴이 영영 사라지기를, 아니면 적어도 금이라도 가기를 어느 정도 바랐다. 그렇게 그녀가 쉽지 않은 삶을 살았다는 흔적이 드러나기를 바랐다.

 

필자가 지금 엄마의 위치였다면, 수전 그리핀의 저 짤막하고 ‘불경스러운’ 글에서 일종의 해방감을 맛보았을지 모른다. 그런 가정을 하고 보니, 그녀가 표출하는 내밀한 감정, 예컨대 양육에 따르는 분노, 그 감정에 따르는 죄책감, 피곤함과 귀찮음에 모두 적잖이 공감이 간다.

 

『분노와 애정』(시대의 창, 2019)을 엮은 모이라 데이비는 수전 그리핀이 “분노를 누그러뜨리려 애쓰지 않으며” 용기 있게 “자기 아이에 대해 적나라한 발언을 지면에” 실었다고 그녀를 소개한다.

 

수전 그리핀은 사회가 주는 억압, 사회의 기대와 현실이 주는 간극에서 오는 모순을 경험하며 엄마됨을 사유한다. 그녀에게 엄마란 자신이 사라지고, 희생해야 하는, 아이를 삶의 중심으로 두고, 아이를 통해 살아가야 하는, 그래서 아이의 자아와 일치되지만, 아이가 떠날 때는 자신을 전부 잃게 되는 상실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캘리포니아의 법이 바뀌기 전이었던 스무 살 때 나는 낙태를 했다. 의사는 수술을 빨리 마쳐야 했기에 마취를 하지 않았다. 적발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임신 4개월이었고 수술은 45분 동안 이어졌다. (중략) 수술이 끝난 후 내 모습에 깊이 감명 받은 의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진짜 여자가 되었군요.”

 

모성에 대한 그녀의 사유는 그녀의 몸과 몸이 맞닿은 수술대처럼 차가운 현실에서 시작된다. 『분노와 애정』에 실린 이 글은 수전 그리핀이 1974년, 싱글맘들을 위한 신문, <모마>(Momma)에 기고한 것으로, 이혼 6년 후 홀로 딸아이를 키우면서 경험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녀는 작가가 되고자 고군분투하는 자신에 대한 묘사와 더불어, 모든 책임과 불평을 엄마에게 떠넘기는 사회 구조에 불만을 제기한다. 자녀 양육 전문가들의 엄마와 여성에 대한 몰이해와 아이 중심적 사고가 엄마들을 “제한된 분노, 제한된 섹슈얼리티, 제한된 이동성”으로 억압하고 있다고도 일갈한다.

 

아이를 돌보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것이다. 우리 문화에서 남자는 아이 돌보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여성은 힘이 없다. (중략) 엄마는 아이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할 것을 요구받는다. 엄마들은 이상화된다. 엄마들은 미움 받는다. 아이들은 행복하지 않다... 여자들은 미쳐간다. 우리는 위험한 삶의 질서를 살아간다.

 

이 글에서 작가는 당시의 인습에 도전하는 도발적인 질문을 거듭 던진다. 그전까지 엄마들이 ‘감히’ 던지지 못했던 의문들로 글을 도배한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엄마의 입장이 되어 본 적 없는 필자로서는 ‘감히’ 던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역시나, 수전 그리핀도 이 모든 부정의(不正義)에 대한 인식이 “여자아이를 낳았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시작되었다고 고백한다.

 

나는 여자아이를 낳았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나 자신에게 마음을 열었고, 그때부터 여성이 겪는 그 모든 고난이 불합리해 보이기 시작했다.

 

에이드리언 리치(1929~2012): 분노와 애정

 

하지만 분명 나는 오랫동안 누군가의 엄마가 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욕구를 너무나도 절실하게 느꼈고 그 욕구를 난폭하게 표현하는 경우도 잦았기 때문이다. (중략) 그 시절에 나 자신을 소모했던 것이 슬프고,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훼손되고 조작되는 것에 분노한다.

 

여기 또 한 명의 분노하는 여성이 있다. 그는 자신에게 분노와 고통이 시작된 지점을 집요하게 탐구하다가, 그 “고통이 사랑의 막대함과 필연성에서 생겨”난 것임을 발견한다. 자신에게 모성(애)이 있음을 인정함과 동시에 부정한다. 이러한 성찰 끝에 그녀는 엄마됨이 “인간의 조건이 아니다”는 결론에 이른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선과 악, 생식력과 불임, 순수와 불결”로 양극화 하였으며, 이것이 여성 깊이 내면화되어 있는 것이라고 밝힌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이 글, <분노와 애정>에서 양가감정의 모성을 비롯하여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 모성 신화, 가부장제, 부불 노동, 제도화된 엄마됨, 강요된 이성애, 동성애(와 교차 페미니즘) 등 소위 2세대 페미니즘 운동의 화두와 3세대 페미니즘 운동의 서막을 예고하는 담론을 자기 몸 위에서 거침없이 던진다. 이 모든 것은 “진정한 신체와 진정한 정신에서 철저히 소외”된 자기 몸을 부단히 써가면서(writing the body) 밝혀낸 것으로, 페미니즘에서 자기 탐구가 얼마나 중요한 이론과 사유의 단초를 제공하는지 필자에게 상기시켜주었다. 

 

결국 내가 열중한 것은 여성 개인이 할 수 있는 한, 다른 여성과 손잡고 최선을 다해서 정신과 신체의 분리를 없애겠다는 결심이었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다시는 그런 식으로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나는 점차 “나의”엄마됨 경험에 있었던 모순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녀는 레즈비언으로서의 섹슈얼리티를 발견하고, 엄마라는 위치에서 느끼는 양가감정(분노와 애정) 즉 모순이 비정상적이지 않다는 결론을 내기까지, 자기 내면을 거침없이 탐구하였고, 자신과 세상과의 괴리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혼 후 남편이 자살을 한 것은 평생 그녀의 십자가였겠지만, 결국 자기 몸의 족쇄에서는 해방된다.

 

제인 라자르(1943~현재): 나쁜 엄마 모임

 

‘양가성’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어이기도 하다. 제인 라자르는 그녀의 에세이 <나쁜 엄마 모임>에서 모성의 양가성(분노와 애정)이 모순되면서도 일관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그녀가 얼마나 “공인된 정상성”과 “용인되는 관습”의 범위 밖에 위치함으로써 자유로운지, “좋은 엄마”의 틀에 갇혀 있는 엄마됨을 거부하고 있는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그녀에게 죄책감을 주기도 한다.

 

라자르는 수잔 그리핀처럼, 신화화된 모성과의 작별을 선언하고, 동지 엄마들을 찾아 연대감을 느끼기 위해 “나쁜 엄마 모임”을 만든다. 거기서 그녀는 간호사였다가 엄마가 된 뒤, 풀타임 가사 일을 하며 무너지기 직전인 동료 엄마, 애나를 만나고, 그녀의 경솔할 만큼 솔직한 발언에 마음속에 있던 “무언가가 부서져 산산조각 난 채 무너지기 시작”하는 경험을 한다. 나쁜 엄마인 라자르와 애나는 그 후 서로의 정신적인 지지자가 되어, 서로의 아이를 봐주며 각자의 공부와 일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여성과 여성의 연대를 통한 해방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이 책의 가장 통쾌한 장면 중 하나이다.

 

애나가 말했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어. 네가 아이 봐주는 날이잖아. 하지만 아침에 애들을 두고 나가는 게 힘들어." 우리는 언제나 말이 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걸 배웠다. 두 번째 문장은 첫 번째 문장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우리가 양가성을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양가성을 받아들이는 능력, 그것이 바로 모성애가 아닐까.

 

제인 라자르는 미국에서 태생 유대인(백인)으로 흑인 남성과 결혼하여 슬하에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녀는 인류학으로 석사 과정을 마치고, 시티 컬리지 뉴욕에 이어 예일 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하고, 1980년부터는 뉴스쿨(New School University)에서 문예 창작과 흑인 문학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녀는 이 에세이가 담긴 The Mother Knot(1976)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집필 활동을 하고 있으며, 주요 저작으로는 혼혈 아들들을 통해 미국 내 인종차별의 실상을 체감한 경험을 담은 Beyond the Whiteness of Whiteness(1996), 1995년 유방암 진단을 받고, 암과 분투하는 경험을 담은 Wet Earth and Dream(1998)이 있다. 그녀의 글은 모두 그녀 개인의 경험인 암과 질병, 삶과 (타인의) 죽음, 인종차별과 모성이라는 소재를 아우르고 있다. 그 중, 본서에 실린 에세이는 특히 모성에 대한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재평가 받고 있다.

 

▲ 원서 『Mother Reader: Essential Writings on Motherhood』 2001


앨리스 워커(1944~현재): 작가와 모성의 양립 가능성

 

사실 저는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성차별적 명령을 믿고 있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불알이 있어야 한다는(남자여야 한다는) 명령이지요. 하지만 제 생각에 아이를 낳는 것은 불알이 있는 것과 맞먹습니다. 사실 맞먹는 것 이상이지요. 아이를 낳는 것은 불알을 능가합니다.

 

앨리스 워커는 이 책에 출연한 유일한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이다. 워커의 글은 앞선 이들의 경험과 주장을 하나하나씩 소거한다. “과거 글을 썼던 여성 대부분은 아이가 없었다.”라는 틸리 올슨의 말에는 전면적으로 반박하며, 실비아 플라스에 대해서는 동시대를 산 흑인 여성 극작가 로레인 한스베리와 비교하면서 사학자들이 백인 여성들만 ‘여성’으로 기록해온 백인 특권(white privilege) 문제를 끌어온다. 

 

워커는 이 책에 등장한 작가 중에서 아이를 위협으로 보지 않고, 아이들과 그들의 삶을 긍정해야 한다고 발언한 첫 번째 작가이다. 그녀는 작가와 모성이 상치한다는 것은 페미니스트들이 아닌 남성들의 “명령”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윗세대 여성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모성에 관한 ‘진실’은 허구이며, 출산과 모성에 앞서 여성의 몸에 대한 자기 결정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모녀간의 대화를 통해 보여준다. 

 

“여기에 흑인 여성 화가들은 없나요?” 누군가 백인 여성 페미니스트에게 물었습니다.

백인 페미니스트가 대답했습니다. “이건 여성 전시회예요!”

 

앨리슨 워커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잠시 잊고 있었던 페미니즘의 교차성(intersectionality), 그중에서도 인종 문제를 재빨리 상기시켜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경험을 실증으로 들어, 백인 페미니스트들에게 인종차별주의가 내재되어 있으며, 이것이 흑인 여성들의 섹슈얼리티가 부정당해온 이유라고 서술한다. 그녀는 백인 여성들이 ‘여성’을 오직 백인의 것으로만 향유하는 문제를 지적하며, 페미니즘의 교차성이 탄생하는 당위를 명쾌하게 보여준다. 

 

비아시아권에 살면서 인종차별을 경험해본 적 있는 필자에게, 흑인과 여성이라는 두 정체성으로 인한 워커의 분노는 충분히 공감이 가고도 남았다. 10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나의 존재 자체가, 나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부정당한 경험과 당시의 억울한 감정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기억을 되짚고 보니, 워커가 백인 작가들의 주장을 반박하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짜릿한 쾌감이 느껴지게도 했다. 

 

앨리샤 오스트리커(1937~현재): 엄마들이 써야 한다

 

만약 여성 예술가가 엄마로서의 활동은 하찮으며 삶의 주요한 문제들과 아무 관계가 없고, 문학의 훌륭한 주제들과도 무관하다고 믿도록 배워왔다면 반드시 그 배움을 버려야 한다. 그러한 교육은 여성 혐오적이며 사랑과 탄생보다 폭력과 죽음을 더 선호하는 사고 및 감정 체계를 보호하고 영속화한다. 게다가 그건 거짓말이다.

 

앨리샤 오스트리커는 앨리스 워커보다 다소 강한 어조로 ‘작가의 모성’을 긍정한다. 그녀는 “글쓰기와 엄마됨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녀의 사유는 “여성 예술가가 엄마됨에서 얻을 수 있는 장점”에서 확장되며, 페미니스트들이 엄마됨을 중시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여성혐오적이라고 일갈한다. 남자 작가든 여자(엄마가 아닌) 작가든 엄마됨이라는 소재를 기피하려고만 했지, 누가 기록해왔냐는 것이다. “그동안 작가들은 엄마가 아니었기에” 어떤 작품도 이 인류사적으로 의미 있는 주제를 다루지 못했으며, 오히려 왜곡시켜 왔다. 그녀는 엄마들이 나서서 ‘엄마’를 쓰기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여성은 책을 쓰기보다는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이 서구 문명의 통념이다. 여기에서 약간 변주된 것이 여성은 아이를 낳기보다는 책을 써야 한다는 통념이다.

 

작가들이 제시하는 여러 주장과 그를 뒷받침해온 각자의 삶을 읽다 보니, 필자는 ‘엄마들은 작가가 될 수 없다’는 여성혐오적 시각을 비판하면서 엄마됨을 기반으로 글을 써야 한다는 입장, 그리고 사회가 기대하는 엄마노릇을 하면서 작가가 되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니 ‘모성 신화부터 버려야 한다’는 입장 사이에서 고민이 되었다. 어느 주장이 옳은 걸까? 그러나 열여섯 명의 삶 중 누구의 것도 옳거나 그르다고 재단 할 수 없는 것처럼, 정답도 오답도 애초에 없는 건지 모른다.

 

어슐러 크로버 르 귄(1929~2018): 작가는 영웅이 아니다

 

어슐러 르 귄은 엄마됨과 작가됨에 있어서 앨리샤 오스트리커와 생각을 같이 한다. 흥미로운 건, 르 귄과 틸리 올슨(1913~2007)이 작가됨과 엄마됨에 관한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기 위해 둘 다 해리엇 비처 스토(1811~1896)의 사례를 끌고 왔다는 점이다. 틸리 올슨은 “그 어떤 것도 종이 위에 옮겨지지 못한” 나날들 속에 고통스러워하는 스토를 보여주지만, 르 귄은 “14년 동안 아이를 몇 명 더 낳고 나서,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그것도 대부분 식탁 위에서 쓴” 스토에 집중한다.

 

르 귄에 의하면, 작가와 엄마됨이 양립할 수 없다는 통념의 기저에 예술가는 영웅이라는 전제가 있다. 영웅은 영웅적 행동과 업적을 위해서 그 또는 그녀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그리고 예술 활동 이외의 것들을 ‘부수적’인 행위이자 이율배반적인 것으로 치부한다. 남자 ‘영웅’들은 가족이나, 애정 관계, 즉 주변인들의 희생을 딛고 영웅이 되었다. 그 논리를 그대로 여성에게 적용시켜, 여성 예술가에게 있어서의 현실이자 하찮은 개념인 엄마됨은 작가, 즉 영웅됨과 양립할 수 없다는 신화가 생겨났다.

 

작가는 이것이 엄마들에게 두 역할 사이에서 가치 판단을 해야 하는데서 오는 죄책감과 내적 갈등을 유발하는 신화이며, 그 ‘선택’을 한 여성들에게 모성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도록 강요하는 오류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사고는 응당 여성혐오적임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페미니스트들까지 이를 재생산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여성이 엄마라는 "역할"을 받아들이면 공적이고 정치적이고 예술적인 책임이 사라진다는 논리에서 엄마들을 가부장제가 발명한 가공의 공간인 "사적인 삶"으로 밀어 넣는 것은 늙은 노바대디Old Nobodaddy의 게임을 하는 것과 같다. (nobodaddy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나온 구절로, nobody와 danny를 합친 말이다. 그 누구의 아버지도 아닌 거짓 신, 힘을 잃은 신을 의미한다. -옮긴이) 그에게 유리한 조건에서, 그의 규칙에 따라.

 

르 귄의 주장은 여러 면에서 공감이 갔으며, 앞선 주장들에 이어 변증법적 사고를 이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하나 아쉬운 것은, 에이드리언 리치나 수전 그리핀의 글 같이 솔직하고 인간적인 고민의 흔적이 최소 이 글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스스로 ‘수퍼우먼 신드롬’을 옹호하는 게 아니라고 반박 하지만, 수퍼우먼 르 귄의 얼굴이 계속 떠오르는 건 부정하기 어려웠다.

 

조이 윌리엄스(1944~현재): 아기에 반대한다

 

아기는 아기이고, 장난감 인형이고, 정력과 자궁의 대표자고, 죽음을 앞지르고자 하는 인간의 불가능한 소망이다.

 

미국 태생의 소설가 조이 윌리엄스는 아기에 반대한다. 글의 서두부터 속사포랩처럼 쏟아지는 단어의 나열은 그녀가 분출하는 감정의 격동을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아기의 출생 자체에 대한 찬반 여부는, 엄마됨과 작가됨의 양립이라는 책의 주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그녀의 신랄한 목소리는 퍼질만한 당위가 있다.

 

그녀는 아기에 “집착”적인, 그리고 여전히 여성에게 생에 최대의 업적으로 치하하는 문화와 사회적 분위기를 조롱하며, 난자와 정자 기증, 1980년대 “트랜드”가 된 입양, 재생산 산업의 붐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 글에서는 “자궁경부가 약한 딸을 위해 딸의 난자와 사위의 정자를 주입받아 손주를 임신”하는 사례를 끌어오기도 한다.

 

우리는 이 죽음과 함께 생태계의 파괴와 이 인구 과잉의 행성에 도래할 무질서를 발견했다. 그리고 모두들 이 달갑지 않은 광경을 부정하며 문을 쾅 닫아버리고 다시 장난감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아기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우리의 후계자를, 희망을, 인류의 이기심과 감상벽과 죽음에 대한 전 지구적 동경이 낳은 결과물을 말이다.

 

여성, 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출산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관습, 생태계 파괴와 자원의 고갈 등을 종합적으로 우려하는 작가의 비판은 지난 몇 년간 필자가 해 온 생각과 궤를 같이 한다. 그녀는 본인의 아이에 대한 부정이 아닌, 보다 넓은 차원에서의 인구 과잉의 문제와 출산 문제, 대자연의 문제를 한데 엮어서 고찰한다. 인간계의 관습에 매이지 말고, 인간계 뿐 아니라, 자연계까지 우리 인식을 확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현재 인류가 당면한 인구 과잉과 생태계 파괴의 가속화, 이에 따라 환경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 다각적으로 논의되는 현실 속에, 페미니즘의 사유는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필자를 데려다 주었다. 이제까지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제약이 된 적이 없는 것들이 제약이 되어 버린 2020년 코비드19 시대, 우리 몸을 둘러싼 이 모든 역학 속에서 그녀의 글은 작지 않은 울림을 준다.

 

몸을 쓴다는 것, 세상을 다시 쓴다는 것

 

열여섯 명 작가의 인종, 시대와 문화권은 2020년 한국과 판이하다. 이들이 말한 엄마됨과 작가됨은 북반구라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사유된 것이다. 또 최소, 결혼과 출산이 ‘시대의 요구’라고 할만한 ‘시대’가 지난 건 누구나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이고 이성애중심적인 한국 사회를 살아온 많은 여성들이 한번쯤은 고민해봤을 지점을 열여섯 개의 통찰력 있는 변주곡으로 들려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흥미롭다.

 

더불어, 2세대 페미니즘 운동이 일어나기 전과 후, 그 물결과 가장 지근거리에 있었던 페미니스트이자 작가들의 기록은 서구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을 조금 더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여성들의 ‘저항의 역사’에 대한 이해는 현재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유익하다.

 

“몸을 쓰는 것(writing the body)은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세상을 다시 써야 한다.”

-어슐러 크로버 르 귄 <세계의 끝에서 춤추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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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룸룸 2020/08/25 [12:06] 수정 | 삭제
  • 앨리스워커 뿐 아니라 토니 모리슨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좋은 기사 감사해요.
  • melody 2020/08/20 [12:34] 수정 | 삭제
  • 주옥같은 아티클들!
  • 시나이 2020/08/12 [21:31] 수정 | 삭제
  • 인간이 만드는 담론이란 참으로 복잡하군요- 인구의 증가(아이 만들기)가 가져오는 환경적 해악은 인도주의나 국가의 존속을 위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터부시되고 계속해서 모성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것 같아요- 잘 요약한 글이네요.
  • 2020/08/12 [19:12] 수정 | 삭제
  • 작가들은 표현력이 정말 남다르구나를 깨닫게 해준책. 그러나 대부분 공감할 수 있었다.
  • 다람쥐 2020/08/12 [13:39] 수정 | 삭제
  • 오!! 어슐러 르 귄이라니. 라인업이 으스스하네요 엄마작가는 아니지만 꼭 읽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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