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간 어둠 속에 있었던 내가 만난 ‘작은 기적’

아픈 몸, 무대에 서다⑧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목우 | 기사입력 2020/08/20 [13:34]

15년간 어둠 속에 있었던 내가 만난 ‘작은 기적’

아픈 몸, 무대에 서다⑧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목우 | 입력 : 2020/08/20 [13:34]

※ 질병을 둘러싼 차별, 낙인,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아픈 몸들의 목소리’로 만든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배우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저 어둠 속에 있는 것은 절망일까? 희망일까?

 

저 어둠 속에는 어떤 불빛이 숨어 있을까? 어두워져도 시야가 완전히 흐려지지 않는 암반응에 기대어 나는 어둠 속에서 사물들의 윤곽을 찾아보려 애쓰고 있다. 어쩌면 빛에 대한 감각이 이 어둠을 불안하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둠은 점점 짙어가고 더 깊어가며 내게서 멀어져간다. 마치 닿을 수 없는 어둠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기라도 하는 듯 저 멀리로 저 멀리로 까마득히 사라져간다.

 

나는 조현병 당사자다. 15년간 집 밖을 나오지 못하고 서른에서 마흔다섯이 될 때까지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남들이 고뇌하고 분투하며 때로는 웃고 행복을 느꼈을 30대를 나는 갖지 못했다. 대신 계속되는 환청과 망상으로 대문 밖으로 한 발짝을 떼기 어려웠다.

 

그런 나는 내가 불행하지 않았다. 모든 인간관계가 끊겨버려 비교할 만한 대상에 대한 자조 섞인 실망이나 회한조차 없던 것이다. 미래에 대한 고민도 타자에 대한 책임도 알지 못했던 15년. 그저 하루를 견뎌내면 그것으로 고마울 뿐, 삶이 빠르게 지나쳐가도 소진되는 삶이 안타깝지 않았다. 삶에 대한 기대로 빽빽이 채워진 계획표라는 건 내 인생에 없었다. 그렇게 죽어간대도 나는 끝내 내 삶의 의미를 묻지 못했을 것이다.

 

올해 코로나19로 정신요양시설에 계시던 많은 정신장애인분들이 돌아가셨다. 청도대남병원의 첫 코로나 사망자는 20년 가까이 병원에 유폐되어 있던 정신장애인분이었다. 무연고자. 그에게는 삶이 어떤 빛깔이었을까. 나는 어쩐지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도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았으므로 갇혀서 외출조차 쉽지 않은 삶을 살며 그저 밥 먹고 잠자고 약을 먹으며 살아도 억울하지 않은 삶. 그는 자유를 꿈꾸었을까. 친구를 가질 수 있고 아내와 함께 살 수도 있고 세상에는 수만 가지 빛깔이 있다는 것을 안 뒤에도 그는 그렇게 소진되는 삶을 견뎌낼 수 있었을까. 나는 그제야 절망이라는 단어의 뜻을 알게 된다.

 

조연호 시인의 시 중에 <왼발을 저는 미나>라는 시가 있다. “방문을 열면 죽은 미나가 흉한 냄새로 사람을 반기곤 했다. 아무도 네 어린 딸이 울고 있다고 미나에게 말해주지 않았다”로 끝나는 시.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문밖에서 울고 있다고 얘기해 주면 우리는 죽지 않는다. 어떻게든 살아서 사람에게 닿는다. 하지만 다른 생이 문밖에서 울고 있다고 내게도 그에게도 말해주는 사회는 없었다. 아마도 파시즘 체제를 겪어낸 그는 사회에서 더 철저히 소외되고, 사회는 그에게 나에게보다 더 깊이 침묵하고 있었을 것이다.

 

▲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 난간을 잡을 때, 그것은 희망일까, 절망일까?  (출처: 픽사베이)


유폐된 자에게 세상을 열어주다

 

그러나 세상으로 나왔을 때, 나는 다른 종류의 침묵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것은 내 안의 침묵이었다. 사람들과 동떨어져 지낸 숱한 날들이 남긴 것은 삶에 대한 무감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었다. 사람은,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고도 마음이 아픈 존재다. 누군가 아주 모르는 사람의 임종이라도 지나쳐 갈 때 눈물이 맺히는 존재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내게는 닿지 않는 아픔들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공감하는 일에 혼자만 무표정한 얼굴로 앉아 있는 일들이 잦았다. 나는 누군가의 삶을 오래 응시한 일도, 감정의 오고 감을 자연스럽게 느끼는 일들도 없었다. 그저 내 작은 삶을 살아왔을 뿐. 견뎌왔을 뿐. 모임의 자리에서 모임에 속한 한 사람이라는 감각을 가지는 것조차 어려웠다. 혼자인 것 같았고, 아득한 곳에 유폐되어 있었다.

 

▲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워크숍을 하며 스스럼 없이 나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 안으로만 파고들던 목소리가 밖으로 나와 파문을 만나고 파문을 지었다.   ©사진: 김덕중


그러다 조한진희 선생님이 기획한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라는 공연에 함께하게 되었다. 3개월 정도의 연습 기간 중 연출인 빠빠의 제안에 따라 우리는 뛰고 구르고 소리쳤다. 그리고 가슴 저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다. 현의 가느다란 멜로디가 끊어질 듯 이어지면서 곡을 완성하듯 내 안에서 완성되어 가는 선율이 있었다. 처음 듣는 그 소리는 낯선 만큼이나 내게 두려움을 주었다. 하지만 늘 웅크리고 회피하고 도망치던 나는 그 선율에 붙들려 세상 속에 기입되었다. 한 줌의 용기를 얻었고 불편함을 견뎌낼 힘을 가졌다.

 

연극에서 마지막 나의 대사는 이러하다. “나는 이제 그렇게 어룽거리는 한 점 빛이 되고 싶어.” 왜 어룽거리는 빛일까. 그건 물에 반사된 빛이기 때문이거나 아주 가늘게 눈을 떴을 때 어른거리는 빛의 잔상이기 때문이다. 100%의 빛이 아니라 어딘가를 돌아나왔거나 빛에 눈이 부셔서 눈빛을 가늘게 떴을 때 맺히는 빛이라는 말이다.

 

나는 오래 떠돌다 미약하게 돌아온 빛의 일부, 겨우 열어놓은 가는 틈을 통해 속삭이는 빛이고 싶었고 그것이 주는 평화이고 싶었다. 그렇게 빛이 된다면, 나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빠빠가 한 문장으로 정리해 준 “환청은 세상의 연약한 것들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은 내 마음이었을 거야. 망상은 소외된 꿈들이 짓는 몹시도 뜨거운 희망”이라고 말할 때 벅차오르던 눈물처럼.

 

▲ 워크숍을 진행하며 ‘사과’를 표현한 적이 있다. 사과의 상큼한 맛과 느낌을 전해야 했는데 그 순간 무표정한 단어에 표정과 감각이 생겼다. (출처: 픽사베이)


기적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러나 어둠. 불가해한 어둠이 있었다. 빛이 닿으려 하지만 자꾸만 멀어지는 어둠이거나 빛과는 전혀 다른 존재인 어둠이 있었다. OECD 국가 중 산업재해 사망자 1위인 나라, 일 년에 1천여 명이 산재로 죽어가는 나라, 자살률 1위인 나라, 그렇게 숫자로 매겨지는 삶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얼마나 검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그 죽음들이 견뎌야 했을 고독을 생각하면 숨이 막혀 왔다. 그리고 내 곁에서 조용히 울고 있는 지인들의 눈물을 떠올릴 때, 나는 그 어둠에 다가서지 않고는 삶을 회복할 수 없으리라는 걸 알았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검은 어둠 속에 선율이 흐른다. 그 고요는 무언가를 막 잉태해 내려고 둥글어진 산모의 배와 같다. 그리고 근육병을 앓고 있는 수영이 입을 연다. 아주 사소한 듯 터져나오는 대사. “한 달 전, 나는 아프로펌을 했다.” 관계 속에서의 고립과 그럼에도 살아있는 희망을 전해주던 수영의 목소리. 수영은 많이 울었다.

 

그에 대비되는 다리아의 당당한 목소리. 대한민국 출산지도라는 어처구니없는 그래프. 난소난종으로 몇 차례의 수술을 해야 했던 다리아는 말한다. “나는 애국자가 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모두들 내 난소를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이어지는 쟤의 이야기. 빈곤의 위협 속에서도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젊은 암환자의 슬프고도 유쾌한 투병기. “지금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데요. 저는 사실 머리는 미는 게 슬프지는 않거든요. 그러니 절대 울지 마세요.” “세상에 암 환자가 이렇게 많은데 여러분은 암 환자의 삶에 대해 아세요?”

 

무대를 가로지르는 희제의 움직임. 희제는 스무 살 무렵 크론병으로 진단을 받았다. 병으로 인한 그 어지러운 동선을 일갈하듯 내뱉는 한 마디. “그러니까 헤맨 건 제가 아니라 의학이죠. 의학이 완벽하다는 착각을 버릴 때, 비로소 의학은 제자리를 찾을 겁니다.”

 

마지막 엔딩 나드. 턱뼈가 녹아내려 근육이 뒤틀리고 자궁질환으로 인한 고독한 혼자만의 투병 생활을 이겨내며 마침내 타자와 연결되면서 마침내 뱉는 대사. “나는 이제, 완전한 치유가 아닌, 완전한 치유로부터의 자유를 원합니다.” 그리고 잊히지 않을 그녀의 길고 긴 춤.

 

우리는 무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제의를 치르듯 엄숙했다. 신내림을 받는 무당처럼 앓고 있던 날들에 신명이 돌았다. 누군가가 이야기를 하고 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삶의 한순간을 제의의 한순간으로 만들었다. 의미 없는 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누군가의 삶의 내밀한 고백을 경청하는 순간의 기적, 그 기적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이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이 이야기를 들은 3백여 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 후였다.

 

▲ 혼자 웅크리고 있던 나를 감싸는 사람들. 이들의 온기로 인해 나는 삶을 얻었고, 그 삶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누군가 뒤따라올 사람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걸어가는 삶을 알았다. 늘 아래로만 향하던 시선이 당신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있는 이 작은 기적.  © 사진: 김덕중

 

진심이 모여야 들릴 수 있는 목소리를 우리는 갖고 있다

 

그리고 연극 제작 과정에서도 인권적 실천이 필요하다며 스탭들의 임금과 노동권을 지켜주다 보니 기획을 맡은 조한진희 선생님이 8백만 원 정도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해 지방에 사시는 데도 공연 하루 전날부터 오셔서 리허설을 끝까지 보고 가셨다는 수화통역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을 때, 또 대사와 대사가 이어지는 연극이라는 어려운 무대의 목소리를 실감나게 문자로 통역해 주시느라 무척 애쓰셨다는 문자통역사 선생님의 이야기까지, 나는 진실이란 아주 어렵게 구성되는 성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마음들이 모였을 때에야 겨우 들릴 수 있는 진실이 우리의 목소리였다는 것이 새삼 묵중한 감동으로 마음속에 내려앉았다.

 

질병의 서사를 쓴다는 것.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던 그 삶들에 형태를 주고 윤곽을 준다는 것. 그리하여 아픈 몸들의 실존에 한 걸음 더 다가간다는 것. 그것은 이야기만이 줄 수 있는 힘이다.

 

삶의 어딘가 보이지 않는 어둠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그 어둠을 못 보고 지나치지만 그것은 삶의 닻처럼 우리 삶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래서 그 어둠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어딘가 삶의 한 부분이 상실된 것 같다고 막연히 느끼지만 그 상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가 했던 것은 그 상실을 증언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어둠을 어둠이라 처음으로 명명해본 일이었다. 개념과 추상과 객관으로 잡히지 않는 삶의 한 영역을 비추는 일이었다. 그저 발화되는 것만으로 해방을 위한 한걸음을 떼는 그런 것이었다.

 

거대한 체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용히 꽃대를 밀어 올리는 꽃처럼 그저 있는 세계를 있다고 말하는 일이었다. 세상이 애써 감추려 하는 그 세계를. 이 이야기들을 더 많이 공유해야 하는 이유가 우리에게는 있는 것이다. 당신이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하는 이유가. 왜냐하면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당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 것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당신 또한 또 다른 청중을 만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 위에 빛이 비치면 빛은 물결의 모양을 따라 어룽거린다. 그럴 때 빛은 하나가 아니다. 눈물도 그렇다. 마음이 마음을 만나면 마음의 모양을 따라 어룽거린다. 그리고 빛이 어둠을 만나면 빛과 어둠이라는 서로 다른 물질들에 공동의 공간이 생겨난다. 예전의 나는 어둠에 익숙해진 눈을 하고서 자꾸만 달아나는 어둠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간절함만큼 어둠에 닿지 못했다. 그러나 이 작은 기적에 힘입어 나는 어둠과 공생하는 삶으로 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동안 나를 들어주었던 이들의 실존의 검은 어둠 속으로. 그건 꼭 빛이 아니어도 좋다. 어둠 속에서 우리는 더 자유로워지기도 하니까. 다만 그 어둠이 텅 빈 허공이 아니라 누군가가 채굴을 하듯 파 내려간 삶의 뜨거운 막장이라는 것만은 기억해두자.

 

앞으로도 나는 오래 무감각한 채로 있을지도 모르겠다. 당신 삶의 암점에 눈먼 채로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역시 당신에게로 가는 채굴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그곳에서 캐낸 검은 석탄으로 당신이 추운 겨울날, 떡을 굽고 주전자를 올렸으면 좋겠다. 어둠은 붐빈다. 그리고 오늘 당신의 삶 속의 사랑하는 이들도 붐비고 있다. 우리, 부디 그것을 잊지 말자. 어둠 속에서 우리는 투쟁하고 휴식하고 안도해야 한다는 것을. 어둠은 또 하나의 삶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글쓴이: 목우. 누군가에게 평범한 햇빛이고 싶고 늘 찾아오는 빗소리이고 싶고 끼니때마다 풍겨오는 어머니의 김치찌개 냄새 같은 것이고 싶다. 무언가에 닿고 어루만져주며 그를 조금 움직이게 하고 따뜻하거나 상쾌하게 하고 곁에 있는 동안 하나의 사물인 듯 무심하고 평온한 것이 되기를 바란다. 나날을 최선을 다해 분투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가슴에서 현을 켜는 소리, 조현이라는 말에서 음악이 들려왔으면 좋겠다. 다른몸들 질병춤 서클에서 활동하고 있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온라인 관람 티켓 안내 https://socialfunch.org/dontbesorry

*다른몸들 페이스북 페이지 https://facebook.com/damom.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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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생 2020/08/22 [21:36] 수정 | 삭제
  • 글도 목소리도 표정도 몸짓도 아름답고 포근해서 자꾸 자꾸 생각납니다 아름다운 연극 아름다운 사람들 알게되서 행복해요
  • 파랑새 2020/08/22 [16:29] 수정 | 삭제
  • 뭐라 말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이 글을 여러번 읽었고 또 읽게될 것 같아요.
  • 구름 2020/08/21 [03:15] 수정 | 삭제
  • “환청은 세상의 연약한 것들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은 내 마음이었을 거야. 망상은 소외된 꿈들이 짓는 몹시도 뜨거운 희망” 글을 읽으면서 너무 아름다운 음악을 들은 것 같았어요. 저는 조현병 환자의 가족입니다.저희 가족에게 조현병은 늘 감추어야만 하는 비밀이었는데, 저도 제 이야기를 드러내서 말하고싶은 용기가 생겼어요. 감사합니다. 언젠가 연극도 보러갈게요. .
  • 구절 2020/08/20 [17:15] 수정 | 삭제
  • 너무나도 아름다운 글이라서 몇 번이고 읽었어요. 살아남아 주셔서, 목우님이 경험하신 어룽지는 빛과 자유로운 어둠을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traan 2020/08/20 [14:39] 수정 | 삭제
  • 당신의 글을 만난 것이 내게는 '작은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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