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아니면 실패? n개의 질병 서사 복원하기

아픈 몸, 무대에 서다⑩ 질병 세계의 언어 만들기(2)

조한진희(반다) | 기사입력 2020/09/10 [17:31]

회복 아니면 실패? n개의 질병 서사 복원하기

아픈 몸, 무대에 서다⑩ 질병 세계의 언어 만들기(2)

조한진희(반다) | 입력 : 2020/09/10 [17:31]

※ 질병을 둘러싼 차별, 낙인,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아픈 몸들의 목소리’로 만든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기획자와 배우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질병은 여전히 과도한 두려움과 비극 속에 갇혀 있다. 생명체로서 질병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 정도 필연이다. 하지만 질병을 겪을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변화하면 질병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과 비극적 사고도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잘 수용되지 않는다.

 

생명의 순환인 생로병사 속 일부인 질병을 비극으로만 만들고, 질병을 제대로 겪을 수 없도록 만든 사회. 아픈 몸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는 사회. 그런 사회를 벗어나 질병권(疾病權)이 보장되는 사회, 잘 아플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로 나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차별 없이 아플 수 있도록 평등한 의료 접근권이 보장되고, 누구나 필요한 만큼의 돌봄을 주고받을 수 있으며, 상병수당 도입 및 아픈 몸 노동권이 보장됨으로써 생계 및 사회 활동이 보장받으며, 안전하고 평등한 죽음이 보장되는 사회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질병권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아픈 몸 앞에 ‘회복 혹은 실패’라는 두 가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좀 더 명확해져야 한다.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그대로 존중되며, 아픈 몸에 대한 극복과 죽음 사이 N개의 서사가 복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질병을 통해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며, 아픈 몸이 변화의 주체가 되는 저항적 질병 서사의 확장은 질병권 운동의 첫걸음인 셈이다.

 

주위 사람들의 ‘질병에 대한 몰이해’도 고통을 준다

 

이번 글도 지난 주에 이어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시민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저항적 질병 서사를 짚어 보고자 한다.

 

▲ 수영이 자신의 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중. (출처: 다른몸들)


"얼굴 하나, 표정 하나를 갖고 싶어서 헤맸던 시간들. 경련이 웃음으로 변하고 그 어떤 웃음도 내 것이 아니었던 시간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를 떠나갔다. 나를 스치듯이 보고 스치듯이 사랑하려 했던 사람들.”

 

근육병을 가진 수영은 근육병으로 인한 경련 때문에 표정과 움직임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다. 컨디션 상태에 따라 어떤 날은 너무 ‘멀쩡’해 보이기도 하고, 너무 ‘이상’해 보이기도 하는 질병의 특성을 모르는 이들은 수영을 오해하거나 부끄러워한다. 무지한 건 그들인데, 그들의 무지 때문에 수영은 거짓말쟁이가 되어 버린다.

 

아픈 몸들은 자주 의구심 앞에 놓인다. 크론병과 살고 있는 대학생 희제 또한 증세로 인해 자주 병결 신청을 하지만, 학교나 동료들은 꾀병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거두지 않는다. 학교생활을 위해 희제는 교수는 물론 조교나 동료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설명하고 또 설명한다. 그럼에도 그 설명은 자주 수용되지 않고 미끄러진다.

 

평생 질병과 함께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주변 사람들의 질병에 대한 몰이해는 그 자체로 고유한 ‘통증’이 된다. 그 통증은 ‘치료’가 필요하다. 치료 방법은 우리 사회 많은 이들이 다양한 질병 서사에 노출되는 것, 그리고 다른 아픈 몸들과 연결되는 것이다. 이번 연극이 관객에게는 질병 서사에 접속하는 자리였고, 시민 배우들에게는 다른 아픈 몸들과 연결되는 장이었다.

 

▲ 희제가 통증 때문에 힘들어 하고 있다. (출처: 다른몸들)


"오진과 책임 전가, 약 부작용의 반복. 내 두통조차 설명 못 하고 팔에 생긴 염증 하나에 쩔쩔매면서 자신은 틀렸을 리 없고 내 몸이 특이하다고 말하는 그 뻔뻔함. 제 발이 진료과들 사이를 헤맨 이유는 의사들의 혼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헤맨 건 제가 아니라 의학이죠.”

 

크론병과 살고 있는 희제는 현대의학을 정면으로 비판한다. 그의 몸은 증세에 따라 다양한 과(科)를 전전하지만, 정작 해결되는 증세는 많지 않다. 최첨단 현대의학이라고 하지만, 그의 몸 앞에서 현대의학은 지속적으로 무능력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의학은 거만한 태도를 고수할 뿐이다. 의학이 오류를 인정하지 않을 때 환자의 몸이 오류가 된다.

 

건강 손상이 존재 자체의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내 난소를 위해 기도하지 마세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이 출산을 위한 ‘자궁(포궁)’과 동일시되고, 다리아의 자궁 건강은 그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손주를 안겨주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것이 된다. 시어머니는 다리아의 몸이 손주를 낳을 수 있는 자궁이 되길 바라며 난소 혹이 없어지길 기도하고, 친정부모는 난소에 혹이 있는 다리아와 결혼하는 남자에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한다. 몸이 아프다고 해서 그 존재의 가치가 손상되는 게 아님에도, 특정 기능을 수행해야 존재가 인정되는 대상화 된 몸들에게, 건강 손상은 존재 자체의 가치 손상과 연결된다.

 

물론 이는 여성의 몸뿐 아니다. 노동자의 산업재해는 자본가에게 노동력 상실이지, 한 존재의 삶이 고통에 놓이는 것은 별 의미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즉, 인간 몸에서 인격이 분절되고 기능적 대상으로 취급되는 현실에서, 건강 손상이 의미하는 것은 건강 중심 사회에서 살아가는 그 존재가 겪게 될 삶의 어려움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특정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된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특정 기능으로 타자화된 존재들의 건강이 손상되었을 때, 그들의 남루한 위치가 선명히 보인다. 다리아가 자신의 난소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는 외침은 자신을 2세 출산을 위한 ‘자궁’으로 여기는 그 남루한 위치를 탈주하겠다는 의미다. 자신의 인격을 지우고 자궁으로 대하는 가부장제에 대한 저항의 외침이다.

 

▲ 나드가 ‘완전한 치유로부터 자유’를 원한다며 춤을 추고 있다. (출처: 다른몸들)


“질병으로부터의 완전한 치유가 아닌, 완전한 치유로부터 자유를 원합니다.”

 

우리가 질병으로부터 생존한다는 것은 생의학적으로 사망하지 않는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질병에 점유되지 않고 삶의 주체성을 상실하지 않는 게 핵심이다. ‘나드’가 병의 발병부터 재활과 재발로 이어지는 20년의 세월은 오로지 건강을 되찾기 위한 노력으로 점철된 세월이었다. 콘서트를 가거나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꿈꾸는 것도 건강을 되찾은 이후로 유예되기만 했었다. 아프기 이전의 몸을 되찾아야 한다는 목표 이외의 것들은 모두 미래에 저당 잡힌 채, 질병에 점유된 삶이었다.

 

그러나 나드는 완전한 치유로부터의 자유를 외침으로서, 질병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아픈 몸으로 현재를 살겠다고 선언한다. 닿을 수 없는 ‘질병을 극복한 건강한 몸’에 대한 사회적 압박과 자신의 집착을 끊어내고 마침내 자유로워지는 순간이다. 그가 마침내 질병이 자신 삶을 다 잠식하게 두지 않겠다며, 질병으로부터 생존자가 된 순간이다.

 

질병권 운동은 평등, 인권, 의료 공공성 운동이다

 

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의 추천사에서, 은유 작가는 “이것은 ‘완전한 치유’가 아닌 ‘완전한 치유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혁명적인 질병 서사다”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 주류 서사는 여전히 질병 극복과 질병으로 깨닫게 된 일상의 소중함 같은 감사 서사라는 점에서, 연극이 보여준 저항적 질병 서사는 우리 사회에서 확실히 낯선 혁명적인 서사다. 게다가 특정 질병 중심이라는 구분도 두지 않고 오로지 아픈 몸이라는 공통점만을 가지고, 공개 모집을 통해 저항적 질병 서사를 만든 연극은 우리 작품이 최초인 것으로 알고 있다.

 

서울대보건대학원 김창엽 교수도 연극 추천사에서 “세계적으로 ‘사람 중심’ ‘환자 중심’의 의료가 새로운 건강 이념으로 주목받는 때, 아픈 몸과 맘들이 스스로 그 중심의 중심으로 들어갑니다”라고 하였다. 의학에서 아픈 몸은 결핍된 몸으로서 회복되어야 할 몸으로 규정되고, 의학이 상정한 건강한 몸으로 회복되지 않는 몸들은 그저 열등한 몸으로 남게 된다. 연극은 치료 담론을 거부하며, 회복되어야 할 의무를 넘어 아픈 몸으로 살아가는 상태 그 자체로 초점을 이동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몸과 사회를 재규정하는 선언들의 연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수자 인권운동의 시작이자 끝은 ‘소수자들이 언어를 갖는 것’이라고 할 때, 이 연극은 아픈 몸들이 겪는 현실에 대해 다양한 저항적 가능성을 언어화했다.

 

▲ 연극 공연 후 토크쇼에서 질병권 운동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모습. (출처: 다른몸들)


나는 우리 사회에서 ‘질병과 인권’이 아직 하나의 운동으로 제대로 형성되지 못했다고 본다. HIV감염인 운동이 훌륭한 역사를 쓰고 있지만 특정 질병을 중심으로 한 운동이고, 장애는 질병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서로 긴장 관계가 있는 영역이라 앞으로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또한 환자 권리 운동은 2000년대 초반 글리벡 투쟁(만성 백혈병 환자들이 제약회사와 정부를 상대로 약값 인하 투쟁을 벌임)이라는 훌륭한 역사를 썼지만, 현재까지의 역사에서는 권리 옹호를 넘어 체제에 저항하는 운동으로 자리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보건의료 운동/건강권 운동은 여러 성과에도 불구하고 전문가주의가 강하고, 아픈 몸들이 스스로 인권과 권리를 발화하는 장을 마련하는 것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최근 몇 주간 의사들의 집단행동과 의료정책을 정부와 의사단체가 결정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의료정책 결정에는 의사뿐 아니라 다양한 보건의료인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아픈 몸이 한 주체가 되어야 한다. 즉 아픈 몸들은 단순히 의료 소비자 혹은 환자 권리를 옹호하는 것을 넘어서, 산업화된 의료의 공공성을 회복하고 의료서비스 접근권의 불평등과 건강 불평등을 해소해 나가는 변혁을 주도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질병은 빈곤, 젠더, 계급, 인종, 정상성 등 우리 사회 모순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음을 아픈 몸들이 삶으로 증언하고, 그 모순을 해소하는 주체로 설 수 있기를 바란다. 만약 질병권 운동이 지금처럼 계속해서 느리지만 분명하게 나아간다면 멀지 않은 미래이리라.

 

계급사회에서 ‘민중에게 권력을!’이라는 구호가 등장했다면, 건강 중심 사회에 필요한 구호는 무엇일까. ‘아픈 몸에 대한 상상력에 권력을!’은 어떨까. 더 나아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없는 몸으로 여겨지는 ‘아픈 몸에게 권력을!’이라는 구호를 외쳐본다.

 

*시민연극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 온라인 관람 예매 https://socialfunch.org/dontbesorry

*다른몸들 페이스북 페이지 https://facebook.com/damom.action

*연극 하이라이트 영상 보기 https://www.youtube.com/watch?v=qgLDvPMXix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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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일로 2020/09/12 [12:03] 수정 | 삭제
  • 몸의 기능과 인격이 등치되는 사회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몸은 중요하고 어떤 몸들은 헌신짝 취급받잖아요. 냉정하고 잔인하지만 사실 나와 주변인들을 봐도.. 사람이 타인에게 기대하는 것이 역할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생각이 들면 슬퍼집니다. 너는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몸이니? 못한다면 의미가 없는 존재지, 말로 노골적으로 안할뿐 그런 관계가 대부분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