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하는 도시의 집에서 농촌의 자립하는 집으로

<주거의 재구성> 귀농 1인가구 비혼여성이 경험한 집의 세계

길날 | 기사입력 2020/09/23 [10:26]

소비하는 도시의 집에서 농촌의 자립하는 집으로

<주거의 재구성> 귀농 1인가구 비혼여성이 경험한 집의 세계

길날 | 입력 : 2020/09/23 [10:26]

*편집자 주: 다양한 시각으로 ‘주거’의 문제를 조명하는 <주거의 재구성> 기획 연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보도됩니다.

 

지난여름, 아주 이따금씩 짧은 해가 얼굴을 반짝 내밀기도 했으나 50일이 넘게 비가 퍼부었다. 역대 가장 긴 장마라 했다. 집 곳곳에 곰팡이가 창궐하고 맨발로 집안을 걸어 다니자면 묵직한 습기가 꾹꾹 밟혔다. 논둑 일부가 유실되고, 기나긴 비에 밭에선 작물들보다 풀들이 빠른 속도로 개체 수를 늘리며 키를 키우고 몸피를 불려 갔다. 밭이 풀들로 뒤덮여도 속수무책이었다.

 

전국 곳곳, 지구촌 곳곳에서 물난리가 나고, 가축들이 떠내려갔다. 코로나19에 겹친 재난―“이 비의 이름은 장마가 아니라 기후위기입니다”라는 해시태그가 아니더라도 기후위기 시대, 총체적 삶의 위기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 것 같았다. 지구가 안전하지 않구나, 삶이 안전하지 않구나…. 크고 작은 재난은 앞으로 더 자주 덮칠 테고, 그만큼 튼튼하고 안전하고 쾌적하고 안락한 주거 환경에 대한 열망은 높아져가겠구나 싶었다.

 

▲ 6년째 살고 있는 집. 마당에선 깨가 말라가는 중이다.  ©길날

 

남도의 한 농가에 정착한 지 6년 차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남도의 한 농가다. 5년 전 이른 봄에 남동생과 이곳으로 이주해왔다. 동생과는 20년 넘게 떨어져 지내다 여기로 오면서 같이 농사지으며 살게 된 것인데, 동생이 올봄에 이웃마을로 거처를 옮기게 되어 지금은 따로 살면서 기백 평 규모의 논과 밭만 함께 경작하고 있다. 한편 2년 전부터 한집에서 살아온 반려견이 있는데, 재작년 이른 봄날 강아지 한 마리가 목줄도 없이 온몸에 풀씨를 잔뜩 매단 채 제 발로 이 구석진 집까지 걸어 들어와 ‘식구’가 되어 주었다.

 

우리 마을을 오가는 군내버스는 하루에 단 세 차례 운행된다. 하지만 자가용이 없어도 별다른 불편함은 못 느끼며 살고 있다. 읍까지 나갈 일이 많아야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라 버스 시간에 맞추어 적절히 움직인다. 걸어서 20분쯤 걸리는 면 소재지와 5~10분 거리인 논과 밭까지는 주로 자전거로 다닌다.

 

내가 사는 집은 50년 전쯤 지어진 집으로 이사 오기 전에 내부 일부가 이미 리모델링되어 있었지만, 화장실이 실내에 있진 않다. 집 출입구 쪽의 수세식 화장실 대신 뒷마당 창고 한쪽에 생태화장실을 마련해서 쓰고 있다. 생태화장실에서 나오는 분변은 음식 잔여물 등과 함께 1~2년씩 삭혀 두었다가 밭의 거름으로 쓴다. 실평수가 스무 평이 채 안 되는 집은 천장이 낮고 실내가 어둡고 습한 편이지만 그럭저럭 살 만하다. 지난여름보다 더 큰비나 아주 세찬 태풍만 안 온다면 한동안 별일은 없을 것이라 여기며 살고 있다.

 

이 집에서 산 지 벌써 6년 차―이리 오랫동안 한 집에서 산 건 여덟 살 무렵 대도시로 이주하기 전에 태어나 자랐던, 아주 오래전에 허물어져서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저 동남쪽 어느 시골집에서의 살이 이후 처음이다.

 

▲ 귀농, 도시에서보다 자립적으로 생태적으로   ©일러스트: studio 장춘

 

도시의 ‘유리방’ 안, 그들의 집은 어디일까?

 

어렸을 때 시골을 떠나 30년 가까이 도시에서만 살았다. 20대 초중반 무렵 원가족으로부터 독립하여 생애 처음 얻게 된, 작은 부엌이 딸린 방 한 칸이 전부였던 월셋집은 어쩌다 보니 기차역 뒤편, 일명 ‘홍등가’를 경유해가는 좁은 골목에 있었다. 그 집에 이르는 길은 세 갈래였는데 부동산 가게 주인을 따라서 처음 집을 보러 갈 때는 그 성매매업소들이 있는 길로 가지 않았고, 낯선 동네라서 ‘그런 곳’이 내가 살게 될 집 근처에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짐을 대강 부리고 난 이사 당일 초저녁, 집 주변을 익히러 길을 나섰던 나는 성매매업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그 거리를 지나가게 되었고, 좁은 유리방 안의 흐리고 붉은 불빛들 속에서 한 명씩 ‘전시’되고 있는 여성들을 보았다. 그때, 무심한 얼굴로 거리를 지나쳐가고 있는 행인들 사이에서 잠깐 얼어붙었던 것 같다. 충격과 슬픔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그녀들’에게 집이 따로 있을까? 유리방 안쪽으로 이어진 좁은 어딘가에서 자겠지? 그런 생각들을 했다.

 

그곳에서는 겨우 몇 개월을 살았다. 기차를 타고 어딘가를 다녀와야 할 일이 있어서 밤이 되어서야 역에 도착하면, ‘업소 거리’를 피하여 일부러 두 배쯤 먼 길을 돌아서 집으로 가곤 했다. 돌아가는 그 길은 꽤 길고 좁은 골목길이었는데, 한날은 그 길을 걸어 집으로 가다가 맞은편에서 오던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모자를 눌러 쓴 남자가 내 가슴을 만지고 달아났다. 소스라쳐 소리를 질렀으나 어두운 골목엔 아무도 없었고, 골목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집들에서는 누구도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 집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업소들과 골목길이 겹쳐져 떠오르며 집 밖이 온통 지뢰밭처럼 느껴지던 며칠이 지난 후, 계약 기간과 상관없이 서둘러 집을 내놓았다. 그리고 도망치듯 그곳을 떠나왔다.

 

쫓기는 선배를 잠시 내 ‘둥지’에 숨겨주다

 

그 기차역 근처를 떠나 구해 들어간 자취방은 도시 외곽이라 할 만한 조용한 주택가에 있는 깔끔한 2층 원룸이었다. 한번은 몇 번 얼굴을 본 게 다였던 정치 수배범 ‘선배언니’가 나 혼자 살던 그곳에서 며칠 머물다 간 적이 있다. 그는 주로 대학 동아리 방에서 지냈는데 그곳에도 있기가 힘들어져 며칠 단위로 여기저기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어렵사리 연락이 닿은 내게 며칠만 묵을 수 있냐고 물었고, 난 흔쾌히 그러라 했다.

 

그때 난 직장인이었다. 언니가 떠난다고 한 그날 아침도 여느 때처럼 전날 늦게까지 무슨 문건인가를 작성하다가 잠들어 아직 깨어나지 않은 언니를 방에 남겨두고 출근을 했다. 저녁에 ‘오늘은 집에 가도 언니를 보지 못하겠구나’ 여기며 돌아왔는데 웬걸, 평소와 다르게 집이 어질러져 있었다. 집주인인 옆집 아주머니가 오후에 형사들이 다녀갔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앨범과 일기장과 책 몇 권이 사라지고 없었다. 언니의 안부가 염려되었는데, 건너 건너 알아보니 다행히 연행되거나 한 건 아니라고 했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직장으로 형사가 찾아오면 어쩌나, 누가 날 미행이라도 하고 있지 않나, 내가 모르는 새 집이 감시당하고 있는 건 아닌가··· 불안해하며 지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 집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차들이 다니는 도로가 집에서 가까웠으나 조용한 편이었고, 직장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으며, 집 뒤편으론 야트막한 산이 있고, 차도 건너편엔 깊고 푸른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주인아주머니마저 다정했으며, 집 상태에 비해 월세도 싼 편이었다. 다행히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 집에서는 2년 넘게 살았다.

 

‘길 위가 집’이라던 여성수행자들

 

이후 몇 군데 거처를 옮겨 다니며 5년 넘게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그간 모은 돈으로 하고 싶던 공부를 하면서 몇 년을 보냈다. 그러다 몸담게 된 출판 쪽 일을 하다가 사표를 내고, 도시를 벗어나 여기저기서 잠시 살다가 문득 이 나라를 떠나서 떠돌았다. 

 

▲ 인도의 한 아슈람에서 지낼 때, 공동부엌에서 아침마다 차파티를 만들었다.  ©길날

 

도 중부의 한 아슈람(수도원)에서 두 달간 묵었던 적이 있다. 서로를 ‘디디’(자매를 높여서 부르는 힌디어의 일종) 또는 ‘디’라 부르는 스무 명가량의 여성수행자들이 각자 방은 따로 쓰되 함께 텃밭을 일구고 식사를 하고 기도 시간을 갖는 등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곳이었다. 30대부터 80대까지인 다양한 세대의 여성들은 함께 살면서도 혼자 지내는 것이 익숙하고 온전해 보이는 이들이었다. 저마다의 단단한 우주랄까, 단순하고 소박한 삶 속에서 오랜 세월 수행해온 내공이 느껴졌다.

 

그곳은 4인이 머무를 수 있는 도미토리를 비롯한 작은 게스트 룸이 한쪽에 마련되어 있어서 다양한 여행자들이 오갔다. 어느 날 저녁, 넓고 기다란 흰 천으로 된 옷을 몸에 걸친 듯 두른 맨발 차림의 여성 네 명이 찾아왔다. 흰 마스크 같은 걸 착용하고 있어서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다갈색 마른 얼굴을 한 그들은 자매들에게 ‘산야시’라 불렸으며, 어딘가에 정주하지 않고 평생을 그렇게 떠돌며 수행하는 삶을 이어간다고 했다.

 

‘Wandering Student’(방랑하는 학생)라고도 불리던 그 길 위의 수행자들은 내가 깨기 전인 이튿날 새벽에 바람처럼 또 어딘가로 떠났다. 며칠 후에 나이 지긋한 ‘디’가 그들이 ‘자이나교’(기원전 6세기경, 인도에서 일어난 무신론 계통의 종교로, 불교와 함께 인도의 영향력 있는 종교의 하나이며 고행의 실천을 중요시한다) 교도들임을 알려주었다. 그들에겐 집이 없으며, 길이 집이라면 집이라고 했다. 집이 없다니, 한국에 돌아가면 당장 들어가 살 집이 없기는 나 또한 매한가지였음에도 놀라워했던 기억이 난다.

 

‘함께 산다, 함께 간다’는 가치와 만장일치제를 채택한 여성들만의 영성공동체―하루에 세 차례 기도하고 두 차례 몸을 움직여 노동하는 것 외 먹고 자는 게 일상의 거의 전부였던 안온함과 평화가 깃든 그곳―에 있을 때, 몇몇 디디가 내게 한국에 돌아가지 말고 여기서 함께 지내자는 제안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다고 말하지 못했다. 몸과 마음과 영혼에 바람이 무시로 일렁이던 때, 당시엔 내게도 길 위가 집이었다.

 

도시의 삶, 소비하는 삶에서 놓여나고 싶었다

 

여행에서 돌아와서는 주로 농촌 이곳저곳을 ‘떠돌며’ 살았다. 짐이라고는 책과 옷이 거의 전부인 박스 몇 개가 다였다. 당장 정주할 수 있는 곳이 없기도 했거니와, 10대 무렵의 ‘집 없이 살아가리라’던 다짐이 무의식중에 고개를 내밀며 삶 속에 스민 까닭도 있지 않았나 싶다. 그 시절, 난 왜 그런 다짐을 했는지 이젠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머니를 사랑했으나, 아버지의 가부장성이 지배하던 집이 싫었고, 청소년기에 눈 뜨게 된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가 빚어내는 온갖 불평등을 보며 ‘소유’에 대한 회의를 내 속에 깊이 들여놓은 까닭이었던 것도 같다.

 

▲ 농사지은 콩으로 쑨 메주와 한방을 쓰며 지난겨울을 났다.  ©길날

 

어쨌든 스무 살이 넘어 집에서 독립했을 때부터 나는 일과 공부 사이를 오가며 때로는 노동자로 때로는 학생으로 때로는 백수로 도시의 이 집 저 집 혹은 이 방 저 방을 떠돌았다. 일을 관두고 이 나라를 떠나 여행길에 오르기 전, 백수였던 때에도 월세 보증금 기백만 원가량 외에는 아껴 써도 두어 달 이상을 버티기 힘들 정도로만 통장은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로도 ‘안정된’ 집과 직장을 희구하진 않았다.

 

그렇게 나라 안팎을 가난한 여행자로 떠도는 동안, 10대 때부터 했던 다짐은 어느덧 삶이 되어 있었다. 최소한으로 벌고 최소한으로 쓰며 살아가리라. 하나부터 열까지 돈과 엮여 있는 도시에서의 삶, 일정한 시간에 출퇴근하면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사는 삶에 몸과 정신을 길들이는 게 내겐 퍽이나 벅찼다. 시간과 돈을 끊임없이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일찌감치 ‘비혼’을 결심했음에도, 노후를 위해 착실히 돈을 모아 안정적인 삶의 토대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것 같다. 가능한 한 적게 벌어 적게 쓰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안 벌고 안 쓰고 싶었다. 의식주를 마련하기 위한 돈을 버는 데 드는 시간을 가능한 줄이고, 이외의 시간을 할 수 있는 한 늘려서 몸과 마음이 돈을 버는 데 소진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아껴 쓰고, 다시 쓰고, 고쳐 쓰고, 쓰레기를 덜 만들고, 가능하면 걸어 다녔다.

 

그러니 내가 농촌으로 발길을 돌린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농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이르게 된 곳이 지금의 농가와 마을이다. 이곳에 와서는 여전히 소농 규모이긴 하지만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본격적이라고 할 만한 농사를 짓고 있다. 이웃마을에 사는 친구들과 모내기며 벼 베기 등을 함께하기도 하고, 씨앗을 나누거나 농사 정보를 주고받기도 한다.

 

비혼여성이 시골마을을 떠나고 싶을 때는?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도시에서라면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싼 값에 마련하게 된 농가다. 앞으로 상황이 어찌 변할지는 알 수 없지만, 특별히 ‘주거 불안’을 느끼며 살고 있진 않다.

 

내가 주거 불안을 느끼는 때는 오히려 직접적으로 집과 연관되어 있지 않을 경우인데, 가령 서로 친인척 관계인 마을의 몇몇 어르신이 그들의 조카이거나 자식인 ‘노총각’을 염두에 두고 에둘러, 때로는 직접적으로 내게 결혼 얘길 건넬 때다. 40호가 좀 못 되는 이 마을로 이사를 온 지 1년쯤 되었을 때 한 여성어르신에게서 이 얘길 듣기 시작했는데, 결혼 의사가 없음을 단호히 알렸음에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완곡하게 설득하려 드신다. 이런 어른들을 마주할 때는 ‘여기를 떠나야 하나’라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이런 일은 나이랑 별반 상관없이 귀농귀촌한 주변의 1인 가구 여성들이 심심찮게 겪는 일이다. 얼마 전에도 나와 비슷한 경우를 겪은 옆 마을에 사는 지인의 얘길 들으며 씁쓸해했다. 살고 싶은 집에서 살아갈 권리가 우리에게도 당연히 있는데, 이런 황당한 이유로 ‘지금 살고 있는 곳을 떠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불필요한 고민을 하지 않기 위해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어쩔 수 없이 품게 된다. 

 

치안 문제로 인한 불안도 물론 있다. 그래도 도시에서보다 덜한 면이 있기도 하다. 이 마을 저 마을로 이주해 오는 당신들의 딸이나 손녀뻘 되는 여성들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음을 알고 계셔서 그런가, 짐짓 무던하게 대해 주시고 안위를 물어봐 주시는 혼자 사는 여성어르신이 많고, 나와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이 비교적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때 생겨나는 안도감 덕분이 아닐까 싶다.

 

▲ 양파 수확. 집에서 5~10분 거리에 있는 논과 밭은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길날

 

최근 몇 년간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을 비롯해서 근처 군 지역으로 ‘비혼(지향) 여성들’이 제법 많이 이주해왔다. 가끔씩 얼굴을 보는 이만도 10명은 족히 되는데, 대부분 홀로 혹은 반려동물과 살고 있으며 20대부터 60대까지 연령대도 다양하다. 기십 평 규모의 텃밭을 일구거나, 이전부터 알았거나 지역으로 이주해 오면서 알게 된 이들과 약간의 논을 공동경작하는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 규모를 갖췄다고 할 만한 농사를 짓고 있지는 않다. 이들 가운데 몇몇과 이따금 만나서 밥을 나누고 그중 몇 사람과는 얼마 전부터 페미니즘 공부도 시작했다.

 

세상의 집들이 ‘환대의 공간’이 된다면!

 

이대로라면 기후위기 상황은 가속화될 것이고, 지구촌의 집들은 잠기거나 떠내려가거나 파괴되거나 날아가면서 ‘안전한 집에서 인간다운 주거생활을 할 권리’도 덩달아 사라지는 일이 더 잦아질 것이다. 내가 사는 이곳만 해도 농지가 점점 사라지면서 그 자리에 축사가 들어서고 있다. 농사짓기 힘든 기후로 변해가니 농민들은 돈이 되는 축산업으로 눈길을 돌리고, 번성하는 축산업이 기후위기를 부채질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그 ‘고리’를 비껴가기 위해서라도 물질적 풍요와 문명의 이기가 실어 나르는 편리함을 누리는 대신, 자급하는 힘과 기운을 품을 수 있도록 내가 발 딛고 선 이곳에서 꾸준히 농사지으며 돌아보고 질문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길 더 간절히 바라게 된다.

 

더불어 세상의 집(장소)들이 집이 있는 이에게든 없는 이에게든 ‘연대와 환대의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상상도 해본다. 집이나 가정이라고 할 만한 거처나 울타리가 없는 아이들, 청소년, 소수자 정체성을 지닌 나를 포함한 여성들, 우리 각자가 동등하게 ‘배우는 자인 동시에 가르치는 자’가 되어 자급 규모의 땅을 함께 일구어갈 수 있다면! 그러기 위해 우선은 도시적인 정치성으로부터 탈주하여 지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과 지금보다 더 잘 연대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들과 어울려 농사지을 수 있는 작은 경작지가 있으면 더 좋겠다. 연대하고 환대하는 열린 공간으로서의 집과 서로의 자급을 도울 수 있는 공동 경작지―이것이 자주 고립되기를 자처하는 지금의 내가 꿈꾸는 일종의 ‘공상’이자, 실현되길 바라며 키워가고 있는 꿈이다.

 

유무형의 손길과 발길들이 집을 길러내고, 집은 다시 수없이 다양한 존재의 거처가 된다. 그 순환의 고리 어디쯤에서 지구생태계의 한 점 같은 내가 오늘도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를 직조해가고 있으며, 언젠가 빈집이 되더라도 자연재해로 인해 사라지거나 일부러 부수지 않는 한 뭇 존재들을 변함없이 맞이하고 기르고 떠나보낼 집―살아 숨 쉬는 사물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세상의 집들이 지구 도처의 정치사회적 약자들에게도 공평무사해지기를 바란다. 더불어 내가 꾸는 꿈이 그리 많이는 늦지 않게 현실이 되는 날을 맞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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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ㅈㅁ 2020/09/25 [22:24] 수정 | 삭제
  • 집을 소재로 한 기고자 분의 일대기가 따뜻하게 읽히네요. “세상의 집들이 환대의 공간이 된다면” 그리고 그런 공간이 되기 위해 한 걸음 내딛으려면 우리가 지금 여기서 뭘 해야할지 잠시 숨을 고르고 생각해보게 됩니다.
  • ML 2020/09/24 [09:18] 수정 | 삭제
  • 살 곳을 정하는 일이 인생에서 정말 큰 과제이고 나를 알아가는 과정임을 알 것 같아요.
  • 단지 2020/09/23 [18:52] 수정 | 삭제
  • 나도 비혼여성들이 여럿 정착해서 살고 있는 시골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하는데... 도시의 집값을 감당하느니 시골에서 내집 가지고 사는 것이 훨씬 좋고 나한테 맞는 라이프스타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시골은 프라이버시가 잘 지켜지지 않아서 귀촌에 실패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앞으로는 비혼 귀촌인구가 더 많아지겠죠? 농촌 비혼여성 커뮤니티가 많아지고 다양해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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